제82화
“아아악!”
“미, 미친 인간 놈들!”
촤악-
나는 목격자를 모두 죽이라는 칼리스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하는 기사들을 보며, 슬그머니 일행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명도 살려둬선 안 된다. 다른 놈들이 더 올라오기 전에, 빠르게 정리하고 자리를 뜬다.”
“예, 단장님!”
보아하니 혹여나 수인들이 도망치지 않고 맞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제 주둔지에 불덩이가 떨어졌던 만큼 데려온 병사들이 어중이떠중이는 아닌 듯 보였지만, 그래도 백전연마의 기사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으니까.
“이 악마 같은 놈들, 이게 무슨 짓이냐! 정말 전쟁이라도 벌이자는 거냐!”
“아니, 그 반대다. 전쟁을 막기 위함이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면, 함부로 이 일을 꼬투리잡지 못할 테니까.”
“이노오오옴! 그런 말도 안 되는 궤변을!”
쿠웅-!
“에릭, 저거 말려야 되는 거 아닌가?”
“쯧. 도망이니 칠 것이지,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적당히 상황을 지켜보다 수인들이 도망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슬슬 기사들이 쫓지 못하도록 나서려고 했건만.
난 결국 화를 이기지 못하고 달려드는 부족장을 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앙-!
“부, 부족장님!”
“크으… 어서 가라! 그리고 어떻게든 아래에 이 사실을 알려라. 인간 놈들이 국경을 넘어 침입해왔다고!”
죽기 살기로 도망치는 부하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보고 싶었던 걸까.
나는 칼리스에게 도끼를 내리치는 척, 병사들을 잡으러 제 옆을 지나치는 기사들을 쳐내는 그를 보며 인상을 와락 구겼다.
가능하면 병사보단 부족장을 살려 보내는 편이 더 쉽게 일을 키울 수 있었을 텐데.
표정을 보아하니 여기서 조금이라도 제 부하들을 살리고 죽을 작정인 듯했다.
“아이시스. 지금 가장 멀리 도망친 놈을 쫓는 녀석을 노려라.”
“…응.”
쩌적-
천천히 고개를 주억인 아이시스가 손을 슥 들어 올리자, 이제 막 내리막으로 모습을 감춘 병사를 쫓던 기사의 발밑이 얼어붙었다.
“뭣… 큭!”
쿵-
“뭐하는 거냐! 빨리 일어서! 절대로 한 명도 놓쳐선 안 된다!”
“예, 예!”
덕분에 앞으로 고꾸라져 병사를 놓친 녀석을 본 부단장이 호통을 치며 이를 갈았다.
제 상관이 목숨까지 바쳐가며 어떻게든 아래에 소식을 전하라고 했으니, 저를 쫓는 기사가 사라졌다고 해서 다시 돌아오진 않겠지.
나는 그새 멀리 도망간 놈을 쫓기 위해 황급히 일어서는 기사를 보며, 조용히 단검을 내던졌다.
“빌어먹을, 놓칠까보….”
푹-
“뭐, 뭐냐? 웬 단검이… 이런 젠장!”
난 뒤통수에 단검이 박힌 채 맥없이 쓰러지는 녀석을 보고선 황급히 대신 쫓아가려는 부단장을 보며, 천천히 몸을 풀었다.
“계획이 바뀌었다. 우선 기사들부터 다 처리하지.”
“음, 알았다.”
“예, 형님!”
지금 내려간 것이 평범한 병사가 아닌 부족장이었다면 따로 움직일 것 없이 마지막에 살아있는 기사들만 처리하면 됐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쪽에서 판을 더 키울 필요가 있었다.
상부에 같은 일을 보고하더라도. 일개 병사와 못해도 천인장급인 부족장의 입에서 나온 얘기가 가지는 파급력이 똑같을 리 없었으니까.
원래 계획대로 끝냈다간, 국경을 넘어와 있는 시체를 보고도 서로 적당한 선에서 합의하고 일을 묻으려들지도 몰랐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제국은 물론, 수인 연합 또한 곧 올라올 마왕군을 두고서 괜히 엄한 곳에 불씨를 피우고 싶진 않을 테니까.
“카렌.”
“하찮은 것들이. 본녀를 두고 등을 돌리다니, 배짱 한 번 좋구나.”
화륵-
“크읏… 빌어먹을!”
나는 순식간에 모두를 감싼 화염의 벽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빨리 저 마법사부터 죽여!”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군.”
촤악-
난 지금껏 도망치는 병사들을 먼저 잡기 위해 우리 쪽에는 시간을 끄는 역할로 잠시 붙어있던 기사를 가볍게 베어내며, 주변을 슥 둘러봤다.
“잘됐구나. 거기, 어느 부족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만 버티면 된다. 지금 이 빌어먹을 인간 놈들의 행태를 알리러 내려갔으니, 곧 지원군이….”
푹-
“그륵… 왜, 어째….”
“닥쳐라. 괜히 네가 직접 가지 않고 부하들을 보내서 계획이 틀어져버렸으니.”
[레벨이 증가합니다.]
나는 아직도 우리가 제 편인 줄 알고 슬금슬금 이리로 붙는 부족장의 가슴을 찌르며, 슬쩍 아이시스를 내려다봤다.
허공에 수놓인 마법진 안쪽에 어느새 도형이 가득 들어찬 걸 보아하니, 거의 다 준비된 것 같았다.
“뭐냐, 어째서 같은 수인을….”
“…같은 수인? 하하하하!”
난 가슴에 단검이 꽂힌 채 축 늘어진 시체를 보고선 당황한 칼리스를 보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기는군. 아직도 우리가 수인으로 보이나?”
“너, 너는….”
“아까의 그 마부?”
나는 슬쩍 후드를 벗은 내 모습에 놀란 눈으로 말을 더듬는 기사들을 보고선, 깊숙이 찔러 넣은 단검을 빼냈다.
푸슛-
“아이시스. 이만 처리하도록.”
“응. 마침, 준비 끝났어.”
번쩍-
“아이스 스톰.”
난 아이시스가 시동어를 읊음과 동시에 눈부신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 마법진을 보며, 조용히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마, 막아!”
“형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일이다. 너흰 절대로 여길 지날 수 없다.”
쩌억-
“컥….”
뒤늦게 무언가 잘못됨을 직감한 기사들이 황급히 이리로 달려들었지만, 좁은 입구를 떡하니 버티고 선 발라크를 뚫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비켜, 비켜라! 내가 직접 뚫겠다!”
“이미, 늦었어.”
그렇게 가까이 있던 네댓 명 정도가 발라크에게 밀려나 바닥을 뒹굴 때쯤.
한곳으로 몰려든 기사들을 모두 제치고 앞으로 나선 칼리스가 검을 치켜들었지만, 아쉽게도 딱 거기까지였다.
휘오오-
“큭….”
조금씩 덩치를 불려가던 바람이 어느덧 거센 폭풍이 되어 몰아쳤다.
“크으으… 제, 젠장!”
녀석은 어떻게든 치켜든 검을 내리치려고 했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세기를 더해가는 폭풍에 밀려 자꾸만 몸을 휘청거릴 뿐이었다.
“으음….”
“에릭, 추워?”
“이 정도는 괜찮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얼음벽으로 둘러싸인 안쪽은 태풍의 눈처럼 마법의 영향이 미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로, 기온 또한 점차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빌어, 먹을….”
카가각-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금세 모든 게 꽝꽝 얼어붙은 주변을 보며, 조용히 아이시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다.”
“으응….”
곧 도리질 치며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는 그녀를 지나쳐 유일하게 아직 꿈틀거리는 얼음조각 앞에 도착한 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단검을 들어올렸다.
“메르시안이라고 했던가?”
난 내 입에서 튀어나온 제 연인의 이름에 크게 움찔거린 녀석을 보며, 천천히 검기를 일으켰다.
“참 별 볼 일 없는 계집이었다. 네놈처럼 말이야.”
푹-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쓰러트렸습니다.]
[상대가 트라우마로 인해 오랜 시간에 걸쳐 약해져있는 상태입니다.]
[체력이 ‘1’ 증가합니다.]
“카렌, 얼음 좀 녹이도록.”
“흐으으… 아, 알겠다. 크흥.”
“…그리고 이거라도 걸쳐라. 추우면 춥다고 얘기를 하지 그랬나.”
나는 그새 감기라도 걸렸는지 코를 훌쩍이는 카렌을 보며, 두르고 있던 로브를 벗어 덮어주었다.
어차피 이제 잠시 위에 다른 걸 입어야했으니까.
“발라크, 넌 괜찮나?”
“저는 괜찮습니다, 형님.”
“음.”
넷 중에 그나마 가장 아이시스의 마법에 영향을 받았을 발라크는 이렇게 멀쩡한데.
어쩌면 그녀가 화속성 마법을 주로 다루는 것과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군.
“…에릭, 다 녹였다.”
“수고했다.”
나는 금세 다 녹은 얼음을 보며, 한곳에 몰린 시체들을 적당히 떨어트렸다.
기사들 중 몇몇은 혹시 능력치를 올려줄지도 모르기에 마음 같아선 다 흡혈해버리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이 녀석들은 국경 너머에서 저들끼리 치고 박고 싸웠다는 증거가 되어줘야 했으니까.
“아이시스, 발라크. 너흰 남아서 멀쩡한 시체들에 상처를 내고 기다리도록.”
“…시체에 상처를 말입니까?”
“그래야, 수인들이랑 싸우다 죽은 줄 알 테니까.”
“음. 바로 그거다.”
역시 척하면 척이군.
난 대견한 표정으로 아이시스를 바라보다, 슬슬 떨림이 멎은 카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렌, 넌 나랑 같이 잠시 수인 놈들의 주둔지로 향한다. 저 중에 아무거나 골라 입도록.”
나는 칼리스의 시체에서 갑옷을 벗겨 입으며, 근처에 있던 흑장미 기사단의 시체들을 가리켰다.
“이, 이걸 말이냐?”
“잔말 말고 서둘러라. 빨리 갔다가 돌아와서 다시 돌려줘야하니까.”
그에 살짝 당황한 카렌이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나를 올려다봤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시선을 흘리며 그녀를 재촉했다.
“형님, 그런 거라면 제가 입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넌 안 된다. 맞는 갑옷이 없어.”
“아….”
좋아, 다 입었군.
“카렌, 아직 멀었나?”
“으윽… 거의 다 입었다. 생각보다 많이 무겁구나.”
나는 낑낑거리며 갑옷을 걸치는 카렌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선, 조용히 부족장의 시체로 다가가 단검을 회수했다.
“다 입었으면 출발하지.”
“음, 알겠다.”
난 이윽고 발라크의 도움을 받아 금방 갑옷을 입은 카렌을 보며, 빠르게 산맥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인간들이 멋대로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을 전해줄 것이 부족장이 아니라 전쟁의 불씨를 지펴줄 힘이 없다면, 직접 높으신 분들 눈앞에서 일을 벌여주면 되겠지.
기대해도 좋다, 칼리스.
곧 네 이름이 지금 네가 올라간 하늘까지 울리게 될 테니.
물론 절대 좋은 쪽으로 날리지는 않겠지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