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80화 (80/200)

제80화

칼리스와 에베르가의 기사들을 태우고 국경으로 출발한 지 사흘.

바로 어제 국경 근처의 도시에 들러 흑장미 기사단의 인원 스물까지 합류시킨 나는, 뒤로 길게 이어진 마차들을 이끌고 어느덧 저 멀리 산맥을 앞에 두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남았나.”

“이봐, 상인. 도련님께서 언제 도착하냐고 물으셨다.”

나는 앵무새마냥 제 주인의 말을 반복하는 기사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걸로 벌써 오늘만 해도 다섯 번째.

녀석의 갈수록 표정이 답답하게 구겨지는 것이,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얼마 안 남았습니다.”

물론 놈이 어떻게든 이성을 잃고 국경을 넘게 만들어야 하는 내 입장에선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같은 질문을 수십 번씩이나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매번 답해야 하는 것은, 생각 외로 참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또 그 말이군.”

“몇 시간 정도 남았다. 그렇게 자세히 말할 수는 없는 거냐?”

여러모로 참 짜증 나게 하는군.

나는 석연찮은 표정으로 조용히 눈을 감는 녀석 옆에서 한마디 거드는 기사를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길어야 한 시간이면 도착할 거 같습니다.”

“한 시간… 음, 알겠다.”

빌어먹을 놈.

난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이는 칼리스를 보고선, 나지막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쨌든 슬슬 도착이니 이쪽도 준비를 좀 해야겠군.

“아이시스.”

나는 품에서 수정구를 꺼내 살살 쓰다듬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응, 에릭.]

“시작해라.”

난 힐끔 내려다본 구슬에 비친 새하얀 머리칼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잠깐 정지!”

그렇게 또 얼마나 마차를 몰았을까.

나는 드디어 국경을 앞두고 산맥을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을 보며, 천천히 말을 멈췄다.

“여긴 지날 수 없다. 돌아가라.”

난 앞을 가로막은 창대를 보며, 슬쩍 짐칸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 돌아가라는 말 못 들었나? 당분간 수인연합과의 국경을 넘는 행위는….”

“밖에 무슨 일인가.”

도착했다는 말도 없이 갑자기 마차가 멈춰 섰기 때문일까.

나는 내가 따로 부르기도 전에 알아서 밖을 내다보는 칼리스를 보며, 조용히 뒤로 돌아 짐칸을 열었다.

“아무래도 나와 보셔야 될 거 같습니다. 지금 평화협정 때문에 병사들이….”

“빌어먹을, 그놈의 평화협정. 도대체 그 씹어죽일 개놈들하고 무슨 평화를 이루겠단 말이냐!”

“다, 단장님! 저희들이 알아서 할 테니 단장님께선 편히….”

“됐다. 머지않았으니 다들 여기서 내리도록 하지. 어차피 마차를 타고 저 험한 산맥을 오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윽고 씩씩대며 마차에서 내린 녀석이, 기사들을 데리고 천천히 병사들 앞에 섰다.

“아… 귀, 귀인께선….”

“이 멍청아! 입고 계신 갑옷 보면 모르겠어? 흑장미 기사단의 기사님들이시잖아! 죄, 죄송합니다. 안에 기사님들께서 계신 줄도 모르고 결례를….”

난 우르르 내린 기사들을 보기가 무섭게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병사들의 모습에, 뒤에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까랑은 태도가 완전 딴판이군.

뭐 당연한 일이었다.

앞에서 말이나 끄는 마부를 대하는 것과, 전장에서 자기들과 같은 병사들을 이끄는 기사를 대하는 게 같을 리가 있나.

“지나가도 되겠나?”

“예, 예? 하지만 황실에서….”

“이 산맥에 있는 수인족 마법사 둘을 잡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왔다. 그것만 마치면 바로 돌아가도록 하지. 너희들이 걱정하는 문제가 일어날 일은 없을 거다. 내 가문에 대고 맹세하지.”

“그, 그건 에베르 가문의… 예, 예! 알겠습니다!”

나는 기어코 검집에 박힌 가문의 인장을 보여주고 나서야 길을 비키는 병사들을 보며, 조용히 기사들을 따라 그들을 지나쳤다.

“헌데 소영주님. 정말로 이 위에 그 수인들이 있긴 한 겁니까?”

“듣자하니 이 상인이 그 둘한테 원한을 샀다더군. 접수원한테 전해 듣기로는 놈들이 이리로 올 거라 확신을 하고 있었다지?”

“예. 지금 분명 이 위에 있을 겁니다. 실은 의뢰를 내걸고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제가 이 산맥 주변에 있는 마을들을 다니며 장사를 할 거라고 소문을 퍼트려놨으니 말입니다.”

“으음, 하지만 그건….”

난 영 못 미더운 눈으로 나를 살피는 기사들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맨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인들은 대체로 눈이 좋은 편이니, 제가 이렇게 앞에서 돌아다니고 있으면 금방 찾아서 내려올 겁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아래에 있을 때부터 저를 보고서 오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나는 가장 앞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게 슬쩍 수정구를 쓰다듬었다.

혹시라도 들킬 염려가 있었기에 따로 말을 건넬 수는 없었지만, 눈치가 좋은 아이시스라면 이 자체를 신호로 받아들이고 알아서 움직일 거라 믿었다.

“…네 말이 맞다 치더라도, 그럼 왜 굳이 우리가 이렇게 산맥을 올라야 되는 거지? 저들이 알아서 올 거라면 굳이 움직일 필요 없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어도 되는 거 아닌가.”

“그게 아니지요. 만일 저 혼자였더라면 모를까. 저들이 바보도 아니고, 이렇게 기사님들과 함께 있는데 그렇게 다가올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마 지금쯤 이쪽을 노리고 어딘가에서 무시무시한 마법을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으음, 그것도 그렇군.”

“다들 혹시 모르니 날아올 마법을 경계하라! 그리고 가능한 여럿이 휘말리는 일이 없도록, 각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 이동하도록 한다.”

난 중간에 옆에서 멍청한 소리를 내뱉는 기사를 설득하고선, 빠르게 산을 올랐다.

저 멀리 희끄무레하게 연기가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이미 카렌이 반대쪽에서 한바탕 일을 치르고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전에 신호도 줬으니 슬슬 뭔가 하나 날아올 때가 됐는데…

“단장님! 앞에….”

“알고 있다.”

“히, 히이익!”

나는 생각하기가 무섭게 앞에서 날아온 얼음덩어리를 보며, 다리에 힘이 풀린 척 꼴사나운 소리와 함께 넘어졌다.

“흐읍!”

콰작-!

이윽고 내 앞을 가로막은 칼리스가 검집 째로 얼음을 박살내는 것을 본 나는, 겁먹은 표정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찾았군. 위쪽이다, 다들 서둘러 이동하도록!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네는 일단 두 명 정도 호위로 붙여줄 테니,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도록.”

“예, 예.”

카앙-!

난 뒤이어 날아온 마법마저 가볍게 옆으로 쳐내며 기사들과 함께 달리기 시작하는 녀석을 보고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혼자 걸을 수 있겠나? 힘들면 부축해줄 테니 빨리 내려가도록 하지.”

“죄, 죄송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휘청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나를 향해 팔을 뻗는 두 기사를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이쪽도 늦지 않게 출발해볼까.

“우선 아래에 마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줄 테니, 이후엔 병사들이 있는 곳까지 가서 그들한테… 컥!”

푹-

일단 한 놈.

날 부축해주기 위해 다가선 기사의 가슴을 갑옷 째로 꿰뚫은 나는, 그대로 앞서 내려가고 있던 놈을 향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뭐야? 왜 갑자기 말을 하다가 말….”

촤악-

난 이윽고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돌아본 녀석의 목까지 베어낸 뒤, 날에 묻은 피를 툭툭 털어내며 몸을 돌렸다.

“가능한 서둘러야겠군.”

나는 바닥에 쓰러진 두 시체를 잠시 내려다보다, 대충 근처에 시체를 파묻고선 먼저 올라간 기사들을 따라 발을 움직였다.

어차피 이젠 이런 피라미들을 흡혈한다고 해서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그보다는 발라크가 붙어있긴 해도 혹시나 카렌과 아이시스가 놈들에게 붙잡힐 수 있으니, 조금이라도 빠르게 합류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는 편이 더 나았다.

보통이라면 그렇게 쉬이 잡혀주진 않겠지만, 지금은 일부러 녀석들을 유인하기 위해서라도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라고 일러둔 상태니까.

“놈들이 도망친다! 절대 놓치지 마라!”

“녀석들이 국경을 넘지 못하게 막아! 빨간 머리가 발이 더 빠르다 했으니, 우선 저 녀석부터 쫓는다!”

머잖아 카렌과 아이시스를 쫓고 있는 기사들을 발견한 나는, 슬쩍 나무 뒤에 숨어 상황을 둘러봤다.

“흥. 그런 속도로는 평생이 걸려도 이 몸을 잡을 수 없다.”

“젠장, 마법사 주제에 뭐가 이렇게….”

“마법사가 아니라 주술사다! 빌어먹을 인간 놈들, 우리 수인들의 주술을 네 녀석들이 다루는 그 요상한 기술들과 똑같이 부르지 마라!”

연기가 아주 완벽하군.

나는 정말로 화난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카렌을 보며, 나지막이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저 정도면 적어도 이중에선, 저 둘이 혹시라도 수인이 아닐 거라 생각할 놈들은 없겠어.

“흐흐, 드디어 한 놈 잡았다!”

“…응. 잡았다.”

콱-

“뭐, 뭣… 두 명이 아니었….”

쩌억-

아이시스랑 발라크도 잘하고 있군.

난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유지해가며 기사들로부터 잘 도망치는 셋을 보고선,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슬슬 다리를 움직였다.

곧 놈들이 국경에 닿을 테니, 늦기 전에 먼저 도착해있어야겠지.

“죽어! 감히, 감히 메르시안을….”

“단장님,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저 커다란 바위 너머로는 수인들의 국경입니다!”

“크으윽… 제기랄! 그럼 저 씹어죽일 원수들을 눈앞에 두고 가만히 돌아가란 말이냐!”

처음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품 안에 챙겨놨던 시커먼 로브로 옷을 갈아입은 나는, 어느새 국경 앞에 도착해 바위를 가운데 두고 대치하고 있는 이들을 보고선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대, 대장!”

“도대체 이게 무슨 소란이냐! 제멋대로 국경을 넘을 걸로도 모자라서 인간 놈들을 여기까지 끌고 오다니!”

“그게… 자, 잘못했다.”

“…미안.”

작전대로 세 사람에게 대장이라 불리며 그들 앞에 나선 나는, 목소리를 내리깔며 주변을 슥 둘러봤다.

“대장? 대장이라고? 네놈, 설마….”

“음? 뭐야. 누군가 했더니 그때 그 계집 하나 죽였다고 질질 짜면서 돌아간 놈팡이가 아닌가. 이거 오랜만이군.”

“네, 네노오오오옴!”

“단장님! 고정하십시오!”

난 대장이라는 말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쪽을 바라보는 칼리스를 향해, 보란 듯이 씨익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참 형편없는 계집이었지. 죽어가면서도 어찌나 살려달라고 앵앵거리던지. 귀가 다 아파서 홧김에 시체는 새 모이로 던져버렸다.”

“그, 더러운 입으로….”

“음?”

“그 더러운 입으로 메르시안의 얘기를 꺼내지 마라!”

“다, 단장님!”

걸려들었군.

나는 결국 면전에서 쏟아진 제 옛 연인의 욕설에 참지 못하고 덤벼드는 녀석을 보며, 조용히 단검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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