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그럼 영주의 아들이 직접 그 용병 길드라는 곳에 왔었단 말인가?”
“음. 듣자하니 자기가 의뢰를 받겠다고 아주 못을 박아놨다더군.”
도시에 도착해 의뢰를 내걸고, 수정구를 통해 아이시스를 부른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형님, 그러면 저희는 먼저 가있으면 되는 겁니까?”
“그래. 그렇지 않아도 마차를 하나 더 얻어왔으니, 가서 뭐 하나만 준비해놓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준비? 무슨 준비를 말하는 것이냐.”
“음. 그건 조금 있다 한 번에 말해주마.”
나는 카렌과 발라크가 자리 잡은 동굴 안에서 곧 도착할 아이시스를 기다리며, 조용히 가져온 건량을 씹었다.
왔군.
“에릭?”
난 밖에서 빼꼼 안을 내다보며 나를 부르는 하얀 머리칼을 보고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응. 에릭이 부른 날, 바로 출발했으니까.”
“훌륭하군. 일단 타라.”
나는 내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경계를 풀고 동굴 안쪽으로 들어오는 그녀를 반기며, 셋을 데리고 마차로 들어갔다.
“형님, 이건….”
“지도?”
“음. 인류 제국과 수인 연합의 국경 근처를 나타낸 지도다. 아무래도 위치다 위치다보니 아주 정확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눈에 띄는 큼지막한 것들은 대충 이걸로도 알아볼 수 있을 테니 괜찮을 거다.”
난 짐칸에 놓여 있던 지도 한 장을 내밀며,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우선 다 모였으니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부터 설명하마. 아이시스. 정찰대 시절에 북쪽 국경에서 인간과 수인들을 싸움 붙였던 것, 기억하나?”
“응. 덕분에 전공, 많이 세웠어.”
나는 악마왕에게 훈장을 수여받던 때를 떠올리기라도 했는지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주억이는 아이시스를 보고선, 덩달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어쨌든 그때 인간 쪽에서 보낸 기사단 중 하나를 이끌던 녀석이, 바로 저 도시의 소영주다. 칼리스 에베르. 제국 북부에선 세손가락 안에 드는 명가인 에베르 후작가의 적자. 듣자하니 그놈이 국경에서 돌아온 이후로 완전히 폐인이 됐다고 하더군.”
난 이따금씩 발작을 일으키기까지 했다는 식료품 가게 주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씨익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덕분에 가문을 이을 첫째가 망가져버린 후작이 복수를 위해, 지난 일 년 동안 닥치는 대로 국경에 병력을 보냈던 모양이다. 가문의 기사들은 물론 아예 용병들까지 잔뜩 고용했다더군.”
“그럼 에릭, 우리는 그 녀석들을 죽이면 되는 거?”
“아니. 그깟 병사나 기사들 몇 죽는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건 없을 거다. 이미 인간하고 수인은 아슬아슬하긴 해도 평화협정을 맺은 상태니까.”
분하긴 하겠지만, 그걸 빌미로 또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겉으로는 국경을 넘어온 수인족 둘이 인간들을 학살한 모양새가 되긴 하겠지만, 용병 길드에 남아있을 기록 때문에라도 쉬이 수인 연합에 책임을 묻진 못할 테니까.
애초에 두 수인 마법사가 당연하게 국경을 넘어올 거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의뢰에,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된 보수.
거기에 소영주가 직접 의뢰를 수주해간 걸로도 모자라, 가문의 기사들을 일에 끌어들인 것까지.
오히려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가, 도리어 후작가에서 꼬투리를 잡기 위해 자작극을 꾸민 게 아니냐는 역풍을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에베르 후작가와 의뢰 대상인 두 수인 간의 일이 아닌, 어떻게든 군 대 군의 문제로 만들어버린다면 얘기가 달랐다.
“가능하면 일을 크게 벌여야지.”
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지도에 있는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지난번에 국지전을 일으켰던 그 평야 옆에 나있는 커다란 산맥.
아무리 요새 상황이 상황인지라 몰래 국경에 닿는 것이 어려워졌다지만, 이 넓은 산맥을 모두 시야에 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멀리서부터 적당히 경계가 느슨한 곳을 찾아 들어간다면, 충분히 양쪽에 들키지 않고 산에 오를 수 있었다.
“이쪽에 보면 여기 그려진 것처럼 폭포 옆에 커다란 동굴이 하나 있을 거다. 이곳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으면, 곧 내가 인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겠다.”
“그냥 기다리고만 있으면 되는 건가? 하지만 에릭, 네가 도착하기 전에 뭔가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나.”
“음. 그래서 발라크까지 같이 보내는 거다. 두 사람은 다리가 좀 느리니까.”
국경을 두고 군 대 군끼리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어느 쪽이든 먼저 국경을 넘게만 만든다면 끝.
거기에 누군가 공격까지 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도착하기 전에 적당히 시간을 두고 수정구로 연락할 테니, 카렌. 네가 발라크랑 같이 반대편으로 넘어가서 수인 놈들한테 마법 하나만 던져주고 돌아오도록. 그럼 범인을 찾으러 올라온 녀석들이랑 인간 놈들이 마주치게 되겠지.”
더구나 그 산맥은 인류 제국과 수인 연합 중 어느 한쪽에 붙어있는 게 아니라, 꼭대기를 기점으로 국경이 나뉘어 있는 곳이었다.
한 마디로 누군가 복수심에 멀어 열심히 눈앞의 상대를 쫓다보면, 어느 순간 국경을 조금 넘어가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얘기였다.
“…이해했어. 우린 거기서 도화선에 불만 붙여주면 되는 거?”
“음. 바로 그거다. 수인들이 지난 일 년 동안 지겹게도 동족을 괴롭힌 기사들을 못 알아볼 리는 없을 테니, 혹시나 싸움이 흐지부지될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주억이는 아이시스를 대견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새하얀 머리칼을 슥슥 쓸어내렸다.
“아무튼, 다들 할 수 있겠지? 특히 카렌. 수인족들이 제시간에 맞춰 올라오지 못하면 전부 꽝이다. 혹시라도 마법이 빗나가지 않게 잘하도록. 물론 절대 녀석들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흥. 당연한 걸 묻는군. 이 몸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본녀는 위대한 마왕, 카르카쉬의 핏줄이다. 산맥 아래에 있는 녀석을 머리 위로 불덩이를 꽂아주는 것 정도야, 딱히 어려울 것도 없지.”
난 자신 있게 가슴을 쭉 피는 카렌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선 슬쩍 발라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발라크. 믿겠다.”
“예, 형님! 맡겨만 주십시오!”
나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답하는 발라크의 후드를 손수 올려주고선, 이만 녀석을 데리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래도 아이시스랑 카렌보다는 네가 마차를 모는 게 낫겠지. 그럼 셋 다 먼저 가있도록. 금방 따라가겠다.”
“음. 걱정하지 마라, 에릭.”
“에릭, 연락해.”
히힝-
난 곧 천천히 멀어져가는 마차를 보며, 조용히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음. 생각보다 많군.”
카렌과 아이시스, 그리고 발라크까지.
세 사람을 먼저 국경에 보낸 지도 어느덧 사흘 째.
나는 의뢰한 대로 약속한 날에 먼저 도시 북문에 도착해, 저 멀리 열을 맞춰 걸어오고 있는 기사들을 살폈다.
“그쪽이 의뢰인인가.”
“예, 예… 헌데….”
“쯧. 그 용병 길드에서 전해 듣지 못한 건가?”
“아… 그, 그게. 제가 그동안 잠시 일이 생겨서 다른 도시에 갔다 오느라….”
“됐다. 어서 출발하지.”
싸가지 없는 녀석.
난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내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는 칼리스를 보고선, 속으로 씨익 미소를 지었다.
사람이 많이 까칠해졌다더니, 직접 보니 생각보다 더하군.
좋은 일이었다.
그만큼 복수심에 화가 많이 났다는 뜻일 테니까.
“그,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잠깐. 나도 거기 타도록 하지.”
“예? 하지만….”
“단장님!”
“그 두 수인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나는 기껏 타고 온 마차를 내버려두고 굳이 내가 모는 것에 타겠다는 녀석을 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방금 전에는 어서 출발하자더니, 참 귀찮게도 구는군.
“네놈. 혹시라도 도련님께 무례가 되는 행동은 하지 말도록.”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난 마차에 오르려다 칼리스에게 자리를 비키며 나를 쏘아보는 기사들을 보고선, 속으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무례라니, 그럴 리가 있나.
어떻게든 국경까지 잘 모셔다드려야지.
“그럼 정말로 출발하겠습니다!”
히힝-
나는 칼리스가 타고 온 마차에 기사들이 모두 오른 것을 확인한 후, 천천히 말을 몰아 성문을 지났다.
“이름이 뭐지?”
“저, 저 말씀이십니까? 그, 가젤이라고 합니다.”
“가젤… 무기상인가?”
“예, 예.”
“훌륭한 무기군. 혹시 일이 끝나면 우리 기사단에 전부 팔 생각 없나? 가격은 섭섭하지 않게 쳐주겠다.”
난 달리는 마차 안에서 조용히 말을 걸어오는 녀석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헌데 그것 말고 저한테 따로 여쭈실 게 있다고….”
“음. 그래. 혹시 자네가 의뢰했다는 그 두 수인 마법사에 대해서 좀 알려줄 수 있겠나? 가능하면 약점 같은 게 있으면 더 좋겠군.”
“약점… 말씀이십니까?”
약점이라.
나는 칼리스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 척 신음을 흘리다, 곧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려주지 못할 것도 없지.
“그러고 보니 약점은 아니지만, 불길을 다루는 녀석이 마법사답지 않게 발이 많이 빠르다고 들었습니다. 가능하면 얼음 마법을 쓰는 놈부터 먼저 잡고 가시는 편이 낫겠지요. 아, 물론 전술 같은 건 저보다는 소영주님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아니, 됐다. 음. 한 놈은 발이 빠르단 말이지.”
물론 거짓말이었다.
기사들에 비해 발이 느린 건 카렌이나 아이시스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되면 다들 아이시스를 노리려 들 테니, 발라크에게 적당히 그녀를 보호하라고 하면 수인들이 올라올 때까지 더욱 편하게 시간을 벌 수 있을 터였다.
“혹시 다른 건 더 없나?”
“다른 거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난 이후로 계속해서 얘기를 붙여오는 녀석을 향해, 적당히 거짓을 섞어가며 가능한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정보를 제공했다.
열심히 경청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군.
그게 제 목을 더 죄여오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