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용병 길드에 두 수인 마법사에 대한 의뢰를 올린 지도 어느덧 닷새가 지났다.
자그마치 금화 스무 개를 보수로 내건 그 파격적인 의뢰는, 예상대로 용병들의 입소문을 타고 도시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오늘도 열심이군.”
나는 이틀 전, 드디어 후작의 귀에 소문이 닿은 듯 움직이기 시작한 칼리스를 떠올렸다.
매일 새벽같이 저택을 나와, 수련장으로 보이는 건물에서 하루 온종일을 머물다 나오기를 사흘째.
날이 지나도 풀어지지 않는 그 악귀 같은 표정을 보아하니, 혹시나 녀석이 안 오진 않을까 하는 걱정은 이만 접어두어도 될 거 같았다.
딸랑-
“어서 오세요. 어머, 손님. 떠나신 거 아니셨나요?”
“하하… 어쩌다보니 일이 생겨서, 조금 더 머무르게 됐습니다.”
슬쩍 담장에 붙어 저택 부지 안쪽을 들여다보던 나는, 이만 슬슬 먹을 게 떨어졌을 카렌과 발라크를 위해 전에 들렀던 가게를 찾았다.
가능하면 이번에도 그 여동생 얘기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군.
“뭔지는 몰라도 꽤 급한 일이셨나 보네요. 건량을 그렇게 많이 사가셨는데.”
“예. 보니까 최근 용병길드에 꽤 괜찮은 의뢰가 나온 모양이더라고요.”
“괜찮은 의뢰라면… 그 수인 마법사 얘기 말씀이신가요?”
나는 가게 주인의 물음에 조용히 고개를 주억이며, 전처럼 건량과 육포를 수북하게 쌓아 계산대에 올렸다.
“소문이 여기까지도 돌았나보네요.”
“호호. 요새 오시는 손님들 중에 용병 분들은 다들 그 얘기만 하시더라고요. 게다가 그렇지 않아도 동생이 그거 때문에… 아. 그보다 손님, 용병이셨나요? 전에는 상인이시라고 하신 것 같았는데.”
역시 오길 잘했군.
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동생 얘기를 꺼내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말을 돌리는 그녀를 보며, 어색한 미소와 함께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게… 제가 의뢰를 받으려는 건 아니고, 의뢰지에 준비된 마차가 하나밖에 없다고 써있다더라고요. 그렇다고 마차에 못 타신 분들이 포기하진 않으실 테니, 옆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웃돈을 받고 태울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그럼 그 무시무시한 마법사들이 있는 곳까지 마차를 몰고 가시겠다는 건가요?”
“용병 분들을 태우고 가는 거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어차피 가서 의뢰를 해결하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단이 있으셔야할 테니, 설마 마차가 부서지게 두지는 않으시겠지요.”
“어머,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렇겠네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이며 봉투에 건량을 담는 그녀를 보고선, 품에서 또 은화를 열 개 정도 꺼내들었다.
“그런데 아까 동생분이 어떻다 하시던 얘기, 혹시 자세히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제가 어디서 듣기로는 영주님께서도 그 의뢰에 관심이 있으시다 하던데. 가능하면 한 번 만나 봬서 줄을 좀 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난 저번에도 그렇고 굳이 그런 얘기를 듣기 위해 은화를 열 개씩이나 들이는 이유를 적당히 둘러대며, 슬그머니 가게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괜한 목적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단단히 의심을 살 수도 있었으니까.
“어머,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나는 다행히 별다른 의심 없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가게 문을 걸어 잠그는 그녀를 보고선, 허벅지를 근처를 쓰다듬던 손을 조용히 들어올렸다.
하긴 별 것 아닌 이야기 값으로 주는 돈이라기엔 액수가 조금 크긴 해도, 보통 상인들이 어떻게든 귀족들과 거래를 트기 위해 쏟아 붓는 뇌물들을 생각하면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시골구석의 작은 남작가라면 모를까, 국경에 붙어있긴 해도 에베르 후작가는 그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명가 중의 명가였으니까.
특히 수인들과의 앙금이 깊게 남아있고 케벨 협곡 근처로 소집령까지 떨어진 지금이라면, 무기상으로서는 그야말로 떼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였다.
한 번만 거래를 트면 평생을 떵떵거리고 살 수 있으니 만큼, 정보에 따라 금화를 내건다고 해도 전혀 수상할 게 없었다.
“그러니까, 이틀 전부터였다나 봐요. 그때 제 동생이 저택 중앙의 계단을 청소하고 있었다는데, 첫째 도련님께서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위에서 내려오시더래요.”
난 혹시나 누가 들을까 주변을 슥슥 둘러보고선 조용히 자리에 앉아 얘기를 시작하는 가게 주인을 보며, 나지막이 고개를 주억였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걸까 싶어 도련님께서 저택 밖으로 나가시는 걸 보고 창을 내다봤는데, 작년에 국경에서 돌아오신 이후로 잘 들리시지 않던 수련장으로 향하시는 걸 봤대요.”
수련장이라.
내가 봤던 것과 시기까지 일치하는 걸 보아하니, 확실히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고 날이 새도록 돌아오시질 않는 게 요상해서 다른 시종들한테 물어보니까, 집사장님께서 그 소문이 무성한 의뢰지를 들고 가주님 방에 들어가신 이후로 그렇게 변하셨다나 봐요.”
“허어. 공자님께서 그 의뢰랑 무슨 관련이라도 있으셨나보군요.”
“저택 안에서 도는 얘기로는, 아무래도 옛 연인이랑 관련된 일인 게 아니냐고 얘기가 돌았다는 거 같아요.”
“옛 연인이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주억이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나지막이 혀를 찼다.
칼리스, 그놈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지난 며칠간 저택 안쪽을 살펴본 걸로, 녀석이 의뢰 장소에 나타나리라는 건 이미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듣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닌, 좀 더 쓸 만한 정보들이었다.
이를테면, 요새 에베르 후작이 그렇게 애지중지 모으고 있다던 용병과 병사들에 대한 얘기 말이다.
“그리고 음, 이건 어디까지나 소문이긴 한데….”
따로 말은 안 해도 슬슬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이 내 표정에 드러나기라도 한 걸까.
나는 슬쩍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운을 떼는 가게 주인을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도련님께서 직접 그 의뢰를 받으시려는 모양이에요.”
“…귀족이 용병들이나 맡는 의뢰를 말이에요?”
“네. 그것도 후작님의 배려로, 국경에 나가있는 기사단까지 일부 합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모양이에요.”
“기사단까지….”
난 짐짓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꾹 쥐었다.
그래, 기사단까지 부를 생각이란 말이지.
나는 무언가 고심하는 척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차륵-
“알겠습니다. 아, 벌써 시간이… 하하. 좋은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슬슬 제가 약속이 있어서요.”
“호호. 아니에요. 어째 제 얘기가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손님.”
난 계산대에 은화 세 개를 더 얹으며, 천천히 가게 밖으로 나왔다.
딸랑-
기사단을, 그것도 요즘 국경을 사이에 두고 매일 같이 수인들과 얼굴을 마주했을 놈들을 빼서 합류시킬 거란 말이지.
이러면 따로 복잡하게 일을 꾸밀 필요도 없겠군.
그저 녀석들을 데리고 어떻게든 국경을 넘기만 하면 되겠어.
* * *
카앙-!
검과 검이 부딪히는 요란한 쇳소리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기합들로 가득 찬 수련장 안쪽.
“후욱, 후우….”
벌써 세 시간째 상대를 바꿔가며 쉼 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던 남자는, 거친 숨을 훅훅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훅, 괜찮… 후욱….”
자그마치 일 년이라는 공백은, 고작 며칠 만에 메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메르시안….”
하지만 시체조차 찾지 못한 옛 연인의 복수를 위해,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저, 도련님. 이만 들어가서 쉬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어제도 그렇고 요 며칠간 계속 무리하셨지 않습니까.”
“비켜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살피는 기사들의 눈빛에도, 칼리스는 손에 쥔 검을 놓지 않았다.
제 아버지의 말마따나 언제까지고 이렇게 한심하게 무너져있을 수는 없었다.
이만 털어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제 손으로 복수를 끝마쳐야만 할 것 같았다.
“칼리스 도련님.”
계속해서 기사들을 상대하며 검을 휘두르던 그는, 곧 수련장의 문을 열고 자신을 찾는 노인의 목소리에 이만 무기를 집어넣었다.
“가시지요. 마차를 대기시켜놨습니다.”
“마차는 필요 없다. 괜히 이목만 끌지 않겠는가. 먼 거리도 아닌데, 그냥 걸어가도록 하지.”
“홀홀. 오히려 눈길을 끄시는 편이 나을 겝니다. 아예 여기 계신 기사님들까지 몇 분 데리고 가신다면, 용병들도 저들이 끼어들 틈이 없을 걸 알고 이만 포기하겠지요.”
“으음.”
칼리스는 노집사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같이 수련하고 있던 기사들 몇을 데리고 건물을 나섰다.
어차피 온전한 복수를 위해, 용병들에게 돈을 쥐어줘서라도 떼어놓을 예정이었다.
가능하다면 애초에 그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을 생각조차 못하게 만드는 편이 나을 거 같았다.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그는 곧 마차를 타고 도착한 건물을 바라보며,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딸랑-
“그러니까, 만약에 의뢰를 못 받더라도 일단 가서 먼저 죽이면 된다니까?”
“맞아. 중요한 건 어떻게든 그 수인 놈들을 죽이는 거지, 의뢰를 받은 놈이 죽였냐가 아니잖아. 자그마치 금화 스무 개야, 스무 개! 하다못해 꼬투리 잡혀서… 응? 저, 저게 뭐야?”
“…기사? 아니 기사 놈들이 왜 용병 길드에 들어와?”
기사들을 이끌고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곧장 접수대로 보이는 곳에 도착한 칼리스는, 당황한 얼굴로 자기를 올려다보는 접수원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수인 의뢰를 받고 싶군.”
“아, 그… 죄송하지만 의뢰는 용병패가 있어야….”
툭-
“어… 어? 호, 혹시….”
찌익-
그는 투구를 벗어 내려놓기가 무섭게 놀란 눈으로 말을 더듬는 직원을 보며, 옆에 붙어있던 의뢰지를 찢어 접수대에 올렸다.
“내 이름으로 달아놓고, 의뢰주한테도 그렇게 전하도록.”
“아… 네, 네! 알겠습니다 소영주님!”
칼리스는 사색이 돼선 연신 고개를 주억이는 접수원을 보며, 짧게 용무를 마치고 이만 건물을 나섰다.
의뢰지에 적힌 대로라면 출발까지 앞으로 사흘.
그전까지 최대한 기량을 되찾아놓을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