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딸랑-
카렌과 발라크에게 건량을 전해주고 다시 도시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용병길드를 찾았다.
에베르 후작이 용병들을 계속해서 후한 값에 고용하고 있다는 소문이 대륙 전역에 퍼지기라도 한 건지 건물 안쪽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북적이고 있었다.
“혹시 지금 의뢰 신청도 받습니까?”
사람들 틈새를 지나 인파에 지쳐 늘어져 있는 직원들 앞으로 다가간 나는, 곧바로 옆에 있던 의뢰용지를 뽑아 들었다.
“…의뢰요? 받기는 하지만, 용병 분들이 모이실지는 장담할 수 없어요. 근 1년간 후작님께서 내신 의뢰 때문에 다들 그것만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이 많은 사람들이 전부 말입니까?”
접수원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슥 둘러봤다.
말하는 걸 보아하니 항시 의뢰가 걸려있는 건 아니고,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하긴 후작 입장에서도, 용병길드 입장에서도 한 번에 모아서 전장으로 보내는 편이 낫겠지.
괜히 한둘씩 계속 받았다간 일처리만 복잡해질 테니 말이다.
“그만큼 보수가 높게 잡혔거든요. 두 당 은화 열 개. 실력만 된다면 하루에 금화를 몇 개씩 벌어 가시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시더라고요. 물론 매번 전투가 있는 건 아니지만, 실제로 A급 이상인 용병분들 중엔 벌써 다해서 금화를 열 개 넘게 받아 가신 분도 계시다고 해요.”
혼자서 금화 열 개라.
자그마치 100명을 넘게 잡았다는 건가.
당장에 이곳에 몰려든 용병들만 봐도 수백은 되는 거 같은데.
물론 모두가 가서 돈을 벌어 오는 것은 아닐 테고 어쩌면 죽는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서로 수천 명은 죽었을 터였다.
그런데도 평화협정을 맺고 물러서다니.
말이 평화지, 실상 언제라도 부서질 수 있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요즘은 공고가 잘 올라오지 않지만, 그래도 간간히 사람을 구한다는 의뢰는 들어오고 있어요. 전처럼 두 당 은화가 걸려있는 건 아니더라도 하루에 동화를 스무 개씩 준다고 하니까, 오히려 다들 이전처럼 목숨을 걸고 나서야 되는 의뢰들은 다 피하시는 모양이에요.”
“음.”
확실히.
보통 몇 날 며칠을 걸려 도시 간에 상단을 호위하는 의뢰들조차 보수가 은화 한 개를 넘지 않는데, 그저 용병 신분으로 국경에서 지내기만 해도 하루에 동화가 스무 개라니.
다른 의뢰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했다.
“정말… 덕분에 용병분들은 허구한 날 오늘은 후작님께서 의뢰를 거신 게 없냐, 의뢰를 하러 오신 분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사람이 안 구해지냐. 저희만 중간에 끼어서 죽을 맛이라니까요?”
“그렇군요. 힘드시겠네요.”
“아!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손님께 푸념을… 으으. 어쨌든 그래서 의뢰를 걸으시더라도 수주하시는 용병 분들이 오랫동안 나오지 않으실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괜찮으시겠어요?”
“예, 괜찮습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테이블 위에 늘어지는 접수원을 보고선,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여기에 의뢰 내용하고 보수 그리고 기한을 적어주시겠어요?”
난 그녀의 안내에 따라 펜을 집고서, 천천히 의뢰를 작성했다.
아무리 용병들이 눈이 높아져서 의뢰를 잘 받지 않는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보수가 그들의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작성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올리기 전에 혹시 잘못 적으신 부분이 있을지 모르니, 먼저 확인부터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내용이, 수인… 마법사 처치?”
내게서 종이를 건네받은 접수원은, 가장 위에 적힌 의뢰 내용을 보며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저… 죄송하지만 이건 힘들 거 같아요. 이번에 평화협정 때문에 함부로 북쪽 국경을 넘는 게 불가능해졌거든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쪽이 국경을 넘어올 거니까요.”
“네? 하지만 어떻게….”
“하하… 실은 부끄럽지만 몇 년 전에 수인 둘한테 물건을 좀 많이 올려친 적이 있었거든요. 그러고 바로 도망쳤는데 그 둘이 끈덕지게 쫓아와서 죽이려 들지 뭡니까. 지금껏 어떻게 잘 도망쳐서 숨어 살고 있었는데, 혹시나 이번 평화협정 이후로 그 둘이 넘어와서 저를 찾을까 무섭더라고요.”
나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표정이 썩어드는 직원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이 올려친 거지 사실상 사기를 쳐서 쫓기고 있는 주제에, 도리어 용병을 고용해 입막음을 하려고 하다니.
눈초리가 많이 따가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게 그나마 가장 그럴싸한 이유였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러셔도 실제로 의뢰대상이 국경을 넘어올지는 확실하지 않잖아요? 함부로 국경을 넘지 못하는 건 저희뿐만 아니라 수인들도 마찬가지일 텐데. 만일 대상이 기한 안에 나타나지 않아서 의뢰가 실패했을 경우에는, 규정에 따라 보수의 일정 부분을 의무적으로 지불하셔야 되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네, 괜찮습니다.”
의뢰는 당연히 실패하겠지만, 대상이 나타나지 않을 일은 없었다.
저 두 마법사는 카렌과 아이시스를 뜻하는 거였으니까.
게다가 애초에 용병들을 노리고 의뢰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저 의뢰의 내용을 후작의 귀에까지 퍼트려줄 도구에 불과했다.
“예, 그럼 보수가… 그, 금화 스무 개?”
차르륵-
나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드는 접수원을 보며, 품에서 금화 스무 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난 아주 넋이 나간 직원을 뒤로하고, 곧장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엘리사, 뭐해? 그렇게 멍하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헙! 이, 이게 뭐야? 무슨 금화가….”
이제 남은 건 아이시스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카렌과 함께 먼저 보내놓고 출발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어서 후작이 미끼를 덥석 물기를 기대하며, 조용히 문을 열었다.
딸랑-
* * *
“후, 후작님! 후작님!”
“무슨 일이냐! 혹시 칼리스가 또 발작을 일으키기라도 한 게냐?”
곳곳에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가구와 액자들이 놓인 커다란 집무실 안.
탁상 위에 그득히 쌓인 서류를 넘기며 머리를 싸매던 남자는, 급히 문을 두드리는 제 집사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박찼다.
“그, 그게 아닙니다!”
“그럼 대체 뭐냐. 설마 황실에서 또 서한이 날아오기라도 했나?”
“그것이… 이, 일단 이것부터 좀 보십시오!”
남자, 에베르 후작은 집사가 건넨 종이를 보고선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용병길드의 의뢰지가 아닌가. 설마 칼리스, 그 아이가 멋대로 의뢰를 건 게냐?”
“도련님께서 그러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으음, 그럼 도대체….”
이윽고 조용히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그는, 곧 두 눈을 크게 뜨며 덜덜 손을 떨었다.
“이, 이건… 이 의뢰, 누가 걸었는지 알 수 있겠나?”
“그것이… 알아봤지만 의뢰를 건 당일에 한 번 얼굴을 비추고선 다시 오지 않았답니다. 아무래도 그 기한에 적힌 날짜에 나가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수인 마법사 처치.
후작은 그 짤막한 제목 아래 적힌 내용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커다란 불기둥을 부르는 마법과, 주변을 모두 얼어붙게 만드는 마법을 다룰 줄 아는 마법사 둘.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훌륭한 아들이, 제 연인을 잃고 폐인이 되어 돌아온 그날 밤.
가문의 자랑인 흑장미 기사단이 있는 곳을 덮친 불기둥과, 수인들 사이로 피어난 얼음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그 때문에 그 자리에 있던 마도병단을 몰아세우느라 파르메르 백작가와 관계가 틀어진 것은 물론, 훗날 두 마법 전부 그들과 관련이 없는 걸로 밝혀져 수많은 손해를 져야만 했다.
“칼리스… 칼리스를 어서 불러오너라!”
하지만 그보다 가슴 아팠던 건, 결국 범인을 찾지 못해 끙끙 앓아누운 아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는 거였다.
그렇게 그 복수를 대신해, 병사들과 용병들을 보내 빌어먹을 수인들을 잡아 죽이기를 벌써 일 년.
평화협정을 맺었으니 국경에서 군을 물리고 동쪽에 지원을 보내라는 황실의 말에, 얼마나 분통을 터트렸는가.
헌데 이렇게 그 원수들에 대한 단서를 찾게 되다니.
“…후작님, 부르셨습니까.”
“칼리스.”
후작은 초췌한 아들의 얼굴을 보고선, 주먹을 꾹 쥐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자랑스러웠던 가문의 보물은,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찾았다.”
“예?”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애인을 죽이고 희롱한 그 무뢰배에게 복수할 수만 있다면, 분명 지난 일을 마음에 묻고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터였다.
“찾았다니, 그게 무슨….”
“그때, 네가 말했잖느냐. 기사단 가운데 불기둥이 솟아올랐었다고. 그리고 파르메르 백작가에서 그런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자는 없다고 했던, 얼음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법사 말이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후작은 한순간에 눈빛이 돌아온 제 아들을 보며, 말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 불빛이 단지 추잡한 복수만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무엇이 됐든, 다 죽어가던 그를 움직이게 만들 원동력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어디입니까! 보내주십시오, 아버지. 기필코, 기필코….”
“진정하거라.”
그는 집사에게 받았던 의뢰지를 건네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간 모아온 병력을 모두 보낼 테니, 꼭 복수하거라. 그리고 돌아오거라.”
“예, 후작님.”
으득-
종이를 건네받은 아들의 입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후작은 그저 조용히, 곧장 집무실을 나서 수련장으로 향하는 아들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