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뭣… 다, 다들 피….”
콰아앙-!
곧 불덩이가 건물 안에 떨어짐과 동시에, 커다란 폭음이 울렸다.
“에릭, 뭐해?”
“…음. 아무것도 아니다.”
척 보기에도 내가 있는 곳까지 휩쓸어버릴 것 같은 모습에 황급히 계단 위쪽으로 몸을 던지려던 나는, 주변을 감싸는 두꺼운 얼음벽을 보고선 어색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다행히 아이시스가 카렌이 무어라 중얼거리던 것을 대신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애초부터 그녀한테 전하려던 거였을지도 모르겠군.
치이익-
“으으….”
곧 무시무시한 열기에 녹아내린 얼음이 뿜어낸 수증기 사이로, 매캐한 연기와 함께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들렸다.
“아, 으… 악!”
나는 아직도 뜯겨나간 귀가 있던 자리를 부여잡고 패닉에 빠져있는 빈센트의 머리를 잡아끌며, 홀로 간신히 버티고 서있는 기사의 앞에 섰다.
“이, 비겁한….”
“비겁? 멍청하긴. 전쟁에 그런 게 어디 있나. 그리고 그런 얘기를 하려면 적어도 두 명을 상대로 우르르 몰려오진 말았어야지.”
난 허울 좋은 소리를 하며 이를 가는 녀석을 향해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선, 조용히 손을 뻗었다.
콰악-
“크윽….”
텅그렁-
그대로 기사의 목을 잡아챈 나는, 천천히 투구를 벗겨내고선 날카롭게 이를 세웠다.
“네놈, 무얼… 컥.”
콱 박아 넣은 이를 통해 달큰한 핏물이 꿀럭꿀럭 넘어왔다.
“아으….”
간만에 보는 피 맛에 절로 눈꼬리가 휘었다.
나는 옅은 신음을 흘리며 금세 말라비틀어져가는 시체를 보고선, 아쉬움에 주변을 슥 살폈다.
타닥-
아무런 대비도 못하고 제대로 들어맞은 탓일까.
모두 불길에 휩싸인 채로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하긴 부대장이라는 녀석도 검을 지지대삼아 버티고 있는 게 고작이었는데, 다른 놈들은 오죽하겠는가.
“프흐.”
“히, 히익….”
곧 이를 떼어낸 나는, 채워지지 않은 갈증에 자연스레 빈센트를 내려다봤다.
눈앞에서 제 호위가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지는 모습을 본 녀석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선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레벨이 증가합니다.]
[황자의 호위부대장, ‘알메로 갈몬드’를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힘이 ‘1’ 증가합니다.]
[체력이 ‘1’ 증가합니다.]
난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선, 다시 한 번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이 정도면 여기저기 널브러진 숯덩이들 중에 한두 명 정도는 더 건질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위에 더 쓸 만한 게 남아있으니 일단은 그걸로 만족해야겠지.
“형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곧 폭발에 휩쓸려 무너진 입구를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온 카렌과 발라크를 보며, 들고 있던 시체를 옆으로 던졌다.
“괜찮다. 그보다 카렌.”
“그… 위, 위험해보여서 어쩔 수 없었다. 인질을 붙잡고 있었던 건 알지만, 뒤에 있는 놈들이 꼼지락거리면서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래도 저 꼬맹이한테 미리 얘기했으니….”
“탓하려는 게 아니다.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이거나 받아라.”
“그, 그런가? 으음, 알겠다.”
카렌에게 기어코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기절한 빈센트를 넘긴 나는, 입가에 묻은 피를 핥으며 아이시스를 돌아봤다.
“나머지는 맡기겠다. 카렌, 발라크. 아이시스를 도와서 도시를 점령하도록.”
“에릭, 어디 가?”
“음.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다.”
난 궁금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아이시스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지금쯤이면 마흐제브가 마룡왕과 마주쳤을 터.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슬슬 출발해야했다.
[황자의 호위대장, ‘베르겐 에문트’를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힘이 ‘1’ 증가합니다.]
[체력이 ‘3’ 증가합니다.]
[황자의 호위 마법사, ‘카르민 아카한’를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마력이 ‘2’ 증가합니다.]
“흐흐.”
나는 위에 있던 두 시체를 흡혈하고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 두 놈만 하더라도 이 정도인데, 과연 검귀는 어느 정도일까.
“기대되는군.”
이윽고 건물을 나선 나는, 곧장 서문을 통해 도시 밖으로 나와 전장으로 향했다.
* * *
산맥을 타고 고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제국군 뒤쪽에 도착한 나는, 조용히 전장을 내려다봤다.
“못 올라오게 막아! 어떻게든 떨어트려!”
마왕군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방패를 들고 버티는 병사들의 뒤로, 분주히 마법을 준비하고 있는 마법사들이 보였다.
“파이어 볼!”
콰앙-!
선봉으로 나선 임프와 고블린뿐만 아니라, 그들의 시체를 딛고 전진하는 가고일들마저 주춤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화력.
아름답게 허공을 수놓는 형형색색의 마법들이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수십 수백에 달하는 마족들이 육편이 되어 흩날렸다.
“젠장, 끝도 없이 밀려드네. 이 빌어먹을… 컥!”
“알만! 빌어먹을… 뒤에 뭐하는 거야! 3열하고 4열은 방어막을 치는데 집중하라고!”
물론 마왕군이라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중간 중간 제국의 마법사들이 쳐놓은 방어막을 뚫고 들어온 마법과 화살이, 적지 않은 이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다만, 그래도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고 있는 마족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전력을 다른 쪽에 몰아넣은 건가.
척 보기에도 마왕군 쪽에 7대 종족으로 보이는 이들은 몇 없었다.
제국군도 그걸 아는지, 서둘러 전선을 밀어내고 다른 곳으로 합류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이제부터 3열도 공격에 가세한다! 4열은 때를 봐서 간간히 화력을… 컥!”
촤악-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기습으로 쓰러트렸습니다.]
[민첩이 ‘1’ 증가합니다.]
[레벨이 증가합니다.]
나는 마법사들 사이를 숨어 다니며,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들을 찾아 숨통을 끊었다.
굳이 한쪽에 들어갈 전력을 빼서 다른 곳에 박아 넣은 건 다 이유가 있을 터.
이전에도 군량의 문제로 벨라노르를 뚫지 못하고 돌아갔던 걸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단기간에 승부를 보기 위해 수를 던진 게 아닐까 싶었다.
이곳의 전력이 빈 만큼, 반대쪽을 빠르게 처리하고 넘어가 양쪽에서 에워싸려는 속셈이겠지.
하지만 그러려면 무조건 상대보다 먼저 한쪽을 무너트려야 됐다.
“제기랄… 다들 조심해라! 누군가 안쪽에 숨어 들었….”
푹-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기습으로 쓰러트렸습니다.]
[마력이 ‘1’ 증가합니다.]
“음. 이 정도면 됐나.”
난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맥없이 고꾸라지는 마법사를 보며, 단검에 묻은 피를 툭툭 털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놈들만 열 명을 죽였으니, 이만하면 충분히 시간을 끌었겠지.
나는 겁에 질려 제대로 마법을 펼치지도 못하고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녀석들을 두고서, 잠시 전선에서 몸을 빼 주변을 둘러봤다.
콰앙-!
반대쪽 산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상에 다다른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저쪽은 거의 끝난 모양이었다.
남은 건 아래쪽 본대인가.
촤르륵-
나는 곧 박쥐로 흩어져 빠르게 산을 내려갔다.
아무리 위쪽을 헤집으며 시간을 벌었다한들 여전히 이쪽은 제국군이 마왕군을 밀어내고 있었지만, 어차피 금방 반대쪽을 정리한 놈들이 합류할 테니 문제없었다.
“뭐? 오른쪽 고지가 점령당해?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머잖아 제국군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평야에 도착한 나는, 들키지 않게 기척을 죽이고 숨어들어 두 본대가 맞붙고 있는 전선으로 향했다.
중간 중간 지휘관으로 보이는 녀석들을 마주칠 때마다 불안한 표정으로 흘끔 뒤를 살피는 것이, 아무래도 전황이 안 좋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슬슬 퍼지기 시작한 듯했다.
“…서둘러야겠군.”
갑작스레 성문이 열려버렸던 벨라노르도 소식이 없고, 양쪽 고지 중 하나는 적에게 먹힌 상태.
제국군 사이에 당장 퇴각명령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건, 여기서 물러나면 수도를 포함한 제국 중부까지 마왕군의 마수가 뻗치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것도 곧 두 고지가 모두 점령당하고 나면 포기하고 퇴각을 준비할 터.
그렇게 되면 자칫 마흐제브를 놓쳐버릴 수도 있었다.
“그것만큼은 안 되지.”
금방 전선에 도착한 나는, 빠르게 주변을 훑으며 마흐제브가 있는 곳을 찾았다.
지금쯤이면 홀로 마룡왕을 상대하며 시간을 벌고 있을 테니, 주변이 휘말리지 않도록 어느 정도 본대에서 떨어진 곳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콰아아앙-!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피하며 계속해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순간 저 멀리서 들린 커다란 폭음에 황급히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찾았다.”
난 곧 새카맣게 피어오른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노인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저보다 수십 배는 커다란 거룡을 상대로 검 한 자루를 쥐고서 홀로 버티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신화 속에서나 볼 법한 영웅의 서사를 보는 것만 같았다.
툭-
나는 온몸에 자잘한 상처를 입은 채로 마룡왕의 공격을 위태롭게 받아내는 그를 보고선, 천천히 투구를 벗었다.
스릉-
그리고 곧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선, 사방으로 퍼지는 거대한 불길에 정면으로 맞서는 노인을 향해 달려 나갔다.
“어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