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미안하네만, 오늘은 여기까지 함세.”
마흐제브와 함께 산을 오른 지도 오늘로 벌써 나흘째.
나는 평소와 달리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는데도 검을 집어넣는 그를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어차피 수정구를 통해 아이시스한테 전해들은 얘기에 따르면 오늘 중에 마왕군이 도착할 것 같았기에 조금 있다 내려갈 생각이긴 했지만, 설마하니 그가 먼저 말을 꺼내올 줄은 몰랐다.
“으음, 아무것도 아니네. 그냥… 일단 내려가면서 얘기하지.”
난 착잡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는 노인을 보며, 얼른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어쩐지 어제부터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더라니.
아무래도 그 빌어먹을 3황자 녀석과 뭔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듣자 하니 그 돌연변이 수인족들… 그러니까, 동부에서 피난 온 사람들 얘기에 따르면 마왕군이라고 하는 것 같더구먼. 그놈들이 코앞까지 왔다는 모양일세.”
“마왕… 말입니까? 하지만 그건….”
“그래, 어디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지. 하지만 마냥 우스갯소리도 아닐세. 이 늙은이도 이리로 오기 전에 움직이는 석상 같은 놈들을 봤으니 말이야.”
움직이는 석상… 가고일 선봉대를 말하는 건가.
“어찌 됐든 중요한 건, 동부를 고작 한 달 만에 먹어 치운 놈들이 곧 이곳에 도착할 거라는 걸세. 전쟁이 벌어질 게야. 많은 사람들이 전장에서 죽어 나가겠지. 차라리 그뿐이라면 다행일 걸세. 만일 우리가 여기서 막지 못한다면, 안쪽에 있는 제국민들이 위험해질 테니.”
그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어떻게든 꼭 막아야 하네.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도 저 많은 병력들을 이곳 벨라노르에 모으신 것일 걸세. 제국 동부에서 수도가 있는 중앙으로 넘어오려면, 북쪽으로 크게 돌아서 수인들의 땅을 밟던가. 아니면 남쪽으로 난쟁이들이 지키고 있는 산맥을 지나던가. 혹은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할 테니 말이야.”
마흐제브는 저 아래 도시 안쪽에서 분주히 물건을 나르는 병사들을 살피다, 이내 동쪽으로 넓게 펼쳐진 평야를 내려다봤다.
“어쩌면 제국의 존망이 걸렸을지 모를 만큼, 공적도 후하게 쳐줄 걸세. 적도 많으니 실력만 출중하다면 당장 영웅이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게야. 그리고 이 늙은이는 자네라면 분명 할 수 있으리라 믿네.”
노인은 진중한 눈빛으로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조용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함께 제국을 지켜주지 않겠나.”
“하지만 어르신, 전….”
“알고 있네. 자네가 저들을 피해 도망쳐왔다는 걸. 그리고 어디 멀리 도망쳐 숨어있으려는 걸 말일세. 그때, 말해주지 않았나.”
그는 씁쓸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다시금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이해하네. 그리고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도 알고 있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주게나. 내 최대한 배려해줌세. 조그마한 공적만 세우고 부상 당한 척 돌아가도 괜찮네. 부? 영화? 원한다면 이 늙은이가 폐하께 직언을 드려서 작위라도 줄 수 있네. 그저, 같이 제국의 적에 맞서주게. 그거면 충분하네.”
그런가.
그때 그 여유로운 표정은 그래서였군.
나는 간절한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는 노인을 보며, 입술을 꾹 물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전혀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몰려오는 마왕군을 피해 어디 멀리 숨어있는다 하더라도, 결국 제국이 망하면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었다.
언젠간 적들에게 붙잡히게 될 테니까.
그렇다고 아예 전장 한복판에서 싸우라는 소리도 아니었다.
그저 작은 전공.
지금 내 실력을 생각하면 우스워 보일 정도로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도 일개 용병인 나를 귀족으로 만들어주겠다 얘기하고 있었다.
“어떤가?”
나흘 전이었다면 모를까.
전에 경비대장이 자신의 정체를 귀띔해줬을 테니, 지금 한 말이 마냥 허풍은 아니라는 것도 알 터.
이후엔 귀족 작위를 내려서 붙잡아둔 뒤, 천천히 제자로 끌어들이면 끝이었다.
물론 보통은 아무리 이런 시국이라도 어지간한 전공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 까다로운 검귀가 직접 골라 데려왔다는 것만으로도 불만을 누를 수 있을 터였다.
그의 하나뿐인 제자가 바로 현 그랜드 마스터인 가제프였으니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만일 내가 정말 제국민이었다면, 용병 가젤이었다면 거절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난 흡혈귀, 에릭 가이오스였다.
그 빌어먹을 제국의, 연합의 개자식들에게 바보처럼 속고 배신당한 그리고 버려진 용사 전설이었다.
“그래, 그… 으응? 어, 어째선가! 정 나서기 힘들면 그냥 도시에 남아있어도 괜찮네. 나머지는 이 늙은이가 알아서 할 테니….”
노인은 설마 이마저도 거절당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는지, 꽤나 당황한 듯 횡설수설했다.
어떻게든 나를 붙잡으려고 하는 그 다급함에, 나는 밀려오는 착잡함을 견딜 수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허어….”
그 안타까운 신음이 진심이었기에, 더더욱 가슴이 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흔들리진 않았다.
그러기엔 내 안에 뿌리박힌 분노가 너무 깊었으니까.
“단순히 도망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제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는 마흐제브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구먼. 아무리 그래도 이 이상 강요하는 건 무리겠지.”
그는 이미 마음을 정한 내 눈빛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발을 떼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검은 받지 않겠네. 그래도 나흘간 자네의 검을 이끌며 행복했으니 말일세. 가제프, 그 아이를 보낸 이후로 이리 즐거웠던 적은 처음이구먼. 값은 그걸로 치렀네.”
“어르신….”
둥- 둥-
쓸쓸히 산을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저 멀리서 들리는 소음에 고개를 돌렸다.
도착했나.
“저, 저건….”
뒤따라 아래를 내려다본 노인의 얼굴에 경악이 비쳤다.
나는 너른 평야를 시커멓게 메운 군세를 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으음, 생각보다 훨씬 많구먼. 자네는 빨리 들어가게. 지금쯤이면 도시에 아주 난리가 났겠구먼. 그래도 진즉부터 조금씩 대피시켜놨으니 그리 혼잡하진 않을 걸세. 아마 서문으로 가면 피난 가는 행렬이 있을 게야. 혹여 괜히 징집당하지 않도록 내 얘기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세나.”
“…감사합니다.”
난 이만 빠르게 산을 내려가는 그를 보며, 뒤이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올라가서 대형을 갖춰라! 적들이 오기 전에 준비를 마쳐야 한다! 거기, 성문이 닫히기 전에 빨리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얼마나 내려왔을까.
나는 옆을 스치며 올라가는 병사와 마법사들을 보며, 슬쩍 그쪽을 훑었다.
아래로 길게 이어진 행렬을 보아하니, 이쪽으로 올라오는 인원만 해도 족히 수만 명은 될 듯했다.
참 징글징글하게도 많군.
그래도 이만큼이나 왔다는 건, 도시 안에 남아있는 병력은 얼마 안 된다는 거겠지.
“가젤 님, 어서 들어오십시오!”
머지않아 성문 앞에 도착한 나는, 막 닫히기 시작한 문을 보며 황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늦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난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경비대장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마흐제브에게 얘기를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아직까지 전처럼 예를 지켜주고는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서 한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껏 쌓아온 호감과 신뢰가 많이 무너진 듯 보였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어차피 성문을 열러 다시 돌아올 때 대충 상황을 꾸며주면, 금방 회복할 수 있을 테니까.
고작해야 그거 하나 지키자고 괜히 마흐제브에게 끌려 성문 밖에 나와 있을 수는 없었다.
“서문 경비대장한테는 사람을 보내 연락을 취했으니, 가시면 문제없이 피난 행렬에 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만 용무가 바빠서 가보겠습니다.”
나는 빠르게 할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경비대장을 보며, 적당히 근처 민가에 숨어 상황을 살폈다.
카렌이 신호를 받고 시선을 끌면 곧장 경비대 건물로 들어갈 수 있게끔, 절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쿠웅-
이윽고 성문이 완전히 닫히고, 경비대가 혹시라도 아직 피신하지 못했을 사람들을 찾아 움직였다.
똑똑-
“안에 계십니까! 지금 바로 대피하셔야 합니다!”
“여긴 비었나 보네. 곧장 다음으로 가자고.”
난 문을 두드리며 슬쩍 안을 들여다보는 인원들을 보고선, 잠깐 몸을 숨겼다 이내 다시 창을 통해 밖을 내다봤다.
슬슬 시간이 됐을 텐데.
콰아앙-!
“뭐, 뭐야! 방금 무슨 소리야!”
“여, 영주성이….”
아니나 다를까.
나는 커다란 폭음과 함께 시끄러워진 바깥을 보며,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끼익-
몰래 문을 열고서 거리로 나온 나는, 저 멀리 도시 중앙에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거대한 건물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콰앙-! 쾅-!
곧이어 다른 곳에서도 치솟는 불길과 함께 시커먼 연기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눈을 돌릴 수 있겠군.
“다들 빨리 움직여! 영주성은 걱정할 필요 없다. 그쪽에는 황자님의 호위를 맡으신 마법사님들이 계실 테니, 우리는 민가에 일어난 화재부터… 아! 가젤 님, 설마 아직….”
금방 경비대 건물 앞에 도착한 나는, 부하들을 진두지휘하며 물을 퍼 나르고 있는 경비대장과 곧장 눈을 마주쳤다.
그래, 영주성에 황자가 남아 있단 말이지.
호위로 마법사들까지 데리고 있고.
“아무래도 역시 이대로 도망치기는 건 아닌 거 같아서 뒤늦게나마 걸음을 돌렸습니다. 배려해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정말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미 성문이 닫힌 터라… 일단 곳곳에 일어난 불길을 잡는 것부터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예, 물론이지요.”
나는 안쪽에서 물을 받아 나오는 경비병들을 보며, 자연스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거기 뒤쪽에, 기다리지만 말고 알아서 퍼가!”
호스 앞에 자리를 잡고서 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건네주고 있는 녀석을 비롯해 열 명.
난 곧장 망설임 없이 허벅지에서 아다만티움 단검을 뽑아, 손목을 슥 그었다.
뚝- 뚝-
“가젤 님? 분명 서문으로 나가신다고… 아니, 그보다 왜 갑자기 손목을….”
나는 가만히 기다리는 대신 앞에서 양동이를 들고 물을 푸러가다 흠칫 몸을 떠는 놈을 보며, 조용히 단검의 날을 세웠다.
“일단 하나.”
촤악-
“뭐, 뭐야? 저거….”
“왜 그래? 뒤에 무슨 일이라도… 흐억!”
난 난데없이 힘을 잃고 푹 고꾸라지는 동료를 보고선 당황한 그들을 향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우웅-
“…피?”
퓻-
손목의 상처에서 쏟아진 핏물이, 내 손짓에 따라 날카로운 바늘모양으로 뭉쳐 빠르게 쏘아졌다.
“컥!”
주변에서 짧은 비명과 함께 하나둘씩 신형이 무너졌다.
“바, 방금 무슨… 히, 히이익!”
“음. 한 놈 살았나.”
나는 아홉 개의 바늘 중에 빗맞은 하나를 보며,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연습이 좀 모자랐나.
실전에선 생각만큼 잘 움직여주질 않는군.
서걱-
난 하는 수 없이 단검을 한 번 더 휘두르고선, 시체밖에 남지 않은 복도를 지나 성문을 여는 장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들 빨리 안 나오고 뭐하는 건가! 지금 한시가 급한… 어?”
나는 뒤늦게 건물 안을 살피러 들어온 경비대장의 목소리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레버 위에 손을 올렸다.
끄그그극-
음, 생각보다 뻑뻑하군.
난 예상외로 잘 움직이지 않는 레버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괜히 혼자 못한다고 한 게 아니었나.
그래도 조금씩 움직이는 걸 보아하니, 큰 문제는 없을 거 같았다.
쿵-
“이, 이 소리는… 설마!”
됐군.
나는 결국 체중을 써가며 간신히 끝까지 내린 레버를 보며, 뿌듯한 미소와 함께 복도로 나왔다.
“가젤… 네, 네놈이!”
“…아니, 내 이름은.”
난 마침 막 허겁지겁 복도로 들어선 듯 보이는 경비대장을 보고선,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 말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주었다.
“에릭. 내 이름은 에릭 가이오스다. 멍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