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밤중에 이상은 없었나.”
“그렇습니다!”
“특이사항은?”
“두 시간쯤 전에 수도에서 기사단이….”
“다들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제 막 햇살이 성벽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른 새벽.
일찍부터 동문에 도착한 나는, 성문 앞에 집합해 인수인계를 치르고 있는 경비병들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 가젤 님!”
“하하. 가젤 님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편하게 가젤이라 불러주십시오.”
난 경비대 건물 앞에 놓인 단상 위에서 나를 발견하고는 급히 뛰어내려와 허리를 숙이는 경비대장을 보며, 재빨리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이른 시간이긴 해도 근처에 새벽부터 일어나 몸을 푸는 기사들이 있었기에, 괜히 그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사양이었다.
“허허. 일찍 나와 있었구먼.”
“오셨습니까, 어르신.”
“마흐제브 님, 좋은 아침이십니다!”
나는 머잖아 도착한 마흐제브를 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래, 밤중에 잘 쉬었나? 어떻게, 둘이 어제 얘기는 잘 나눴고?”
노인은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와 경비대장을 번갈아 봤다.
“예. 경비대장님께서 정의감이 아주 투철한 분이시더군요. 덕분에 벨라노르에 머무는 동안에는 안심하고 지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크흠. 그, 그런가? 그거 잘됐구먼.”
그는 예상외의 대답에 잠시 당황하며,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훑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보아하니 무슨 꿍꿍이가 더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우린 이만 가보겠네. 고생들 하게.”
“예, 고생하십시오!”
뭘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생각대로는 안 될 거다.
나는 곧 성문을 나서는 마흐제브를 따라, 어제 올랐던 공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허억, 후욱….”
“허허. 오늘도 고생 많았네.”
꼭두새벽부터 지금, 날이 저무는 순간까지.
하루 종일 마흐제브의 검을 받아내며 바닥을 구른 나는,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간신히 공터를 나섰다.
어제 점심시간을 한참 넘겨서 올라갔을 때도 온몸이 쑤실 정도였는데, 오늘은 오죽하겠는가.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나마 중간 중간 능력치가 올랐다는 메시지를 봤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도중에 포기하고 나왔으리라.
“자네, 괜찮나? 정 힘들면 조금 쉬었다 감세.”
“하하… 그래도 걸어 다닐 정도는 됩니다.”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살피는 노인을 보며, 어색한 미소와 함께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오늘도 가능한 들어가자마자 푹 쉬어야 것 같았다.
내일도, 어쩌면 모래도 또 나와야할 터였으니까.
“마흐제브 님!”
그렇게 어느덧 산을 모두 내려와 도시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우리는 저 멀리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경비대장을 보고선, 잠시 자리에 멈춰 섰다.
“허억, 헉… 마흐제브 님, 어서….”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한가. 자, 일단 숨부터 좀 고르고 다시 말해보게.”
“후욱… 예, 예.”
혹시 마왕군이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기라도 한 걸까.
아니, 그랬더라면 오히려 방금 전까지 산에 올라가 있던 우리가 못 봤을 리 없었다.
그럼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까지 급하게 마흐제브를 찾는 거지.
난 노인의 말대로 우선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도시로 오셔야 될 거 같습니다.”
“혹시 안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겐가?”
“그게… 오늘 낮에 3황자님께서 도착하셔서 말입니다. 조금 전에 마흐제브 님께서 먼저 도착해있으시다는 얘기를 들으시고선,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다 하셨습니다.”
“으응? 황자님께서 이 늙은이를 말인가?”
3황자?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딱 떠오르는 재수 없는 얼굴에,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그 빌어먹을 놈이 지금 벨라노르에 와있다고?
“으음. 혹시 자네도….”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그럼 이 늙은이는 먼저 가볼 테니, 자네는 이만 들어가서 푹 쉬게나. 내일 또 같은 시간에 보세.”
난 내게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말고 경비대장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마흐제브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아하니 처음엔 나도 같이 데려가려다가, 금방 마음을 바꾼 모양이었다.
하긴 지금 어떻게든 나를 설득해서 제자로 데려오고 싶을 텐데, 굳이 그런 개차반 앞에 세우고 싶진 않았겠지.
특히 귀족도 아니고 일개 용병 출신 상인인 가젤을 말이다.
“빈센트 프리드리히….”
나는 조용히 그 망할 놈이 이곳에 와있다는 소식에, 입술을 꾹 물었다.
빈센트는 비록 3황자지만 첩인 황비가 아닌 황후의 소생으로, 황태자인 제 형에 이어 황제의 사랑을 끔찍이도 받는 녀석이었다.
다만 그것뿐이었다면 마흐제브가 굳이 나를 두고 가지도 않았겠지.
아니, 오히려 어떻게든 데려가려고 했으리라.
아무리 내가 철벽을 치더라도, 차마 황태자의 부탁까지 거절하는 불경을 저지르리라 생각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빈센트는 제 형제인 2황자마저도 남작가 출생인 황비의 자식이라며, 하찮은 핏줄이라고 멸시할 정도로 극심한 혈통주의자였다.
그런 놈 앞에 가문의 성도 없는 밑바닥 용병 출신을 데려다 놨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노릇이었다.
“씹어 죽일 놈.”
난 녀석의 모습을 떠올리며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 차라리 평민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놈도 그리 멍청하진 않은지라, 한창 계속된 전쟁으로 민초들의 불만이 극에 달한 시기에 그들을 대놓고 무시하진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이방인들은 아니었다.
녀석은 우리를 언제든 다시 채워 넣을 수 있는 소모품 그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꼴에 황자라고 군략에 재능이 있었던 놈은 공을 세우기 위함이랍시고 최전선에 나가, 지휘관으로서 이방인들을 그야말로 고기방패처럼 갈아 넣었다.
혹 함정이나 매복이 있을 만한 곳이면 망설임 없이 창끝으로 그들을 밀어 넣었고, 전선이 붕괴될 조짐이 보이자 몰래 보급되는 장비에 드워프들이 만든 폭약을 섞어 우리를 속였다.
심지어 어찌 운 좋게 살아 돌아오더라도, 곧바로 더 위험한 사지로 보내버리기 일쑤였다.
그나마 나는 녀석이 맡은 전선에 보내졌을 적엔 이미 용사로 추앙받고 있던 터라 소모품처럼 다뤄지진 않았지만, 아직도 그 벌레 보듯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금색 눈동자는 잊을 수 없었다.
“제 발로 내 아가리에 들어왔구나. 흐흐.”
나는 씨익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핥았다.
어쨌든 그놈이 지금 이곳에 와있다는 건, 곧 있을 전투에도 참여한다는 뜻일 터.
만일 여기서 무언가 공을 세웠더라면, 그 제 자랑하기 좋아하는 녀석이 소문을 내지 않았을 리 없었다.
헌데 용사 시절에 딱히 그가 벨라노르에서 활약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으니, 아마 후방이나 도시 안으로 빠져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더구나 지금은 마왕군의 기세가 최고로 치솟아있을 때니, 제국에서도 어지간하면 황자에게 위험부담을 지우려 하고 하진 않았을 터.
“…한 번 조사해봐야겠는데.”
만일 녀석이 안에 남는다면, 단순이 녀석을 인질로 잡는 것만으로도 도시를 더 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다.
물론 호위병들이 붙어있긴 하겠지만, 황자의 호위라고 해봐야 밖으로 나가 싸울 기사단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황제나 황태자라면 모를까, 끽해봐야 수석기사 서넛 정도 붙어있는 게 전부겠지.
그 정도라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기습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일단 보고는 해놓는 게 좋겠지.”
난 돌아가면 수정구를 통해 아이시스를 찾으리라 생각하며, 멀찍이 마흐제브를 쫓았다.
“저긴가.”
나는 도시 중앙에 있는 영주성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보며,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가능하면 아예 숨어 들어가서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엿듣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지금도 문으로 기사와 마법사들이 들락날락하고 있는 걸 보면, 마흐제브를 제외하고도 마왕군을 막아설 실력자들이 여럿 머물고 있을 테니까.
나중에, 그들이 마왕군에 맞서 모두 자리를 비웠을 때를 노려도 늦지 않았다.
딸랑-
“어서 오십… 어머, 손님. 또 오셨네요?”
“예. 어제 먹어보니까 너무 맛있더라고요.”
“호호.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난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 중간에 잠시 빵집을 찾아 들어갔다.
오늘은 나오기 전에 주인장한테 식사 시간이 되면 문 앞에 음식을 놓아 달라 얘기를 해놓긴 했지만, 어제 발라크가 또 사와 달라고 했었으니까.
마차에서부터 시작해서 다른 도시에 들를 때도 그렇고, 열흘이 넘는 시간을 가만히 앉아서 보내고 있으니 많이 심심할 테지.
그렇다고 그 둘을 밖에 돌아다니게 할 수도 없으니, 이런 거라도 원하는 게 있으면 가능한 들어줄 생각이었다.
앞으로 계속 써먹어야 할 전력인데, 괜히 불만이 쌓이면 나중에 작전이 어긋날 수도 있으니까.
“어디 보자.”
나는 매대에 쫙 깔린 빵들을 훑으며, 일단 종류별로 하나씩 전부 집었다.
그러고 보니 카렌이 쿠키도 먹고 싶다고 했던가.
어제는 몇 개 안 돼서 내가 금방 다 먹어버린지라, 많이 아쉬워했었지.
“계산해주세요.”
“이걸 다요? 오늘은 댁에 손님이 많이 오시나 보네요.”
“하하. 뭐, 그렇지요.”
“다해서 은화 스무 개에요. 원래 동화도 여든 개 있는데, 큰 손님이시니까 그건 빼 드렸어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나는 종이봉투 네 개에 꽉꽉 들어찬 빵을 보며, 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여기, 거스름돈입니다.”
짤그랑-
“그럼 번창하십시오.”
“네, 안녕히 가세요. 손님.”
난 은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받아들고선, 천천히 가게를 나왔다.
“음.”
맛있는 냄새.
나는 양손 가득 빵을 들고서 발라크와 카렌이 기다리고 있을 여관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