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달칵-
“에릭!”
“형님!”
“음?”
쿠키를 비롯해 한 아름 빵을 안고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문을 열기가 무섭게 애가 탄 목소리로 나를 찾는 카렌과 발라크를 보고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대체 왜 이리 늦은 건가! 하마터면 배가 등에 달라붙는 줄 알았잖느냐!”
난 꼬르륵거리는 배를 붙잡고 소리치는 카렌을 보며,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아하니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방 안에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정말 밥도 안 먹고 있던 모양이었다.
“미안하군. 거기까진 생각 못 했다. 내일부턴 여관 주인한테 시간 맞춰서 방 앞에 음식을 내놓으라고 얘기해놓겠다.”
어찌나 배가 고팠는지.
요즘 들어 둥글둥글해지던 공주님의 눈매가 다시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럼에도 내 부탁을 생각해 여태껏 얌전히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습에, 기특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알았다. 치, 그렇게 나오면 더 뭐라 할 수도 없지 않느냐.”
나는 무어라 더 얘기를 꺼내려다 우물거리며 입을 닫는 그녀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녀석, 귀엽긴.
“그런데 손에 든 그건 무어냐.”
“음? 아, 이거 말인가.”
난 코를 킁킁거리며 홀린 듯 내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찾는 카렌을 보고선, 조용히 앞으로 내밀었다.
보통 이렇게 포장해주는 곳은 몇 없는데.
나름 비싼 가게라 그런지 따로 봉투에 담아준 덕에, 그 고고한 마왕 따님의 이런 모습까지 보게 되는군.
평범하게 빵 째로 들고 왔다면 그냥 슥 가져가서 먹고 말았겠지.
“흐으, 맛있는 냄새가 나는구나. 혹시 먹을 건가?”
나는 금세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봉투를 채가는 그녀를 보며,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옆에서 가만히 구경하고 있던 발라크도, 결국 달달한 냄새에 이기지 못하고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왔다.
부스럭-
“이건… 빵이로구나! 흐음, 이 달달한 냄새. 맛있겠구나.”
카렌은 안에 있던 빵을 하나씩 살피며, 꿀꺽 침을 삼키고선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에릭, 혹시 하나만 먹어도 되겠느냐?”
“다 먹어라. 원래 너희들 주려고 사온 거였으니까.”
“그, 그게 정말인가? 전부 다….”
“형님….”
난 먹을 거 하나로 감동에 찬 눈빛을 보내는 둘을 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
뭘 이런 걸로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건지.
“음.”
그러고 보니 도시에 도착하기 전, 마차를 타고 이동하느라 제대로 끼니를 챙겨본 지도 사흘 정도 됐던가.
하긴 오늘 아침에만 해도 별 맛대가리 없는 건량과 딱딱한 육포로 때웠으니, 조금 식긴 했어도 아직 따뜻한 빵이 반가울 법했다.
바삭-
나는 봉투 바닥에 남은 쿠키를 꺼내먹으며, 허겁지겁 빵을 욱여넣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흐읍! 마, 맛있구나! 맨날 딱딱하다 못해 이가 나갈 것 같은 밀빵만 침으로 불려 먹다가, 폭신폭신하고 달달한 걸 먹으니 이제야 좀 사는 거 같구나.”
“형님. 괜찮으시다면 혹시 내일도 사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맛난지 양 볼 가득 다람쥐처럼 빵빵하게 채워 넣고는 행복한 표정으로 우물거리는 모습을 보자니, 나도 절로 입 꼬리가 솟았다.
“그래, 마음껏 사다 주마.”
“감사합니다, 형님!”
달달하군.
나는 금방 쿠키를 먹어 치우고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곧 마왕군이 도착하면 때를 봐서 성문을 열 생각이다.”
“우움?”
양손에 하나씩 빵을 들고 번갈아 먹어 치우고 있던 둘은, 눈을 깜빡이며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혼자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저희도 같이….”
“성문을 열러 가는 가는 것은 나 혼자다. 둘은 그전에 시선을 좀 끌어줬으면 좋겠군. 카렌, 도시 곳곳에 불을 질러줄 수 있겠나?”
오늘 대충 살펴본 전력을 생각해보면, 동문 경비대 하나쯤은 홀로 처리하고 성문을 올려버리는데 문제없을 거 같았다.
하지만 마왕군이 몰려오면 반대쪽에서 서문을 지키던 인원들 또한 일부 동문으로 빠지게 될 터.
그렇게 되면 어찌 문은 열더라도, 모든 이의 시선을 피해 무사히 도망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니 일을 치르기 전에, 가능한 안쪽에 남은 병력들의 눈을 돌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이 몸은 상관없다만, 에릭. 너는 괜찮겠느냐? 아까 보니 밖에 인간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꽉 들어찼던데 말이다.”
“상관없다. 어차피 놈들은 다 도시 밖으로 나가서 싸울 녀석들이니까.”
“음? 그걸 어떻게 확신하느냐. 아무리 하찮은 족속들이더라도 다들 생각이 있을 텐데. 굳이 저 성벽을 버리고 나갈 이유가 없지 않느냐.”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이는 카렌을 보며, 나지막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상황이 받쳐준다면 당연히 성문 안에서 농성을 벌이는 것이 좋겠지.
하지만 그녀가 낮에 본 것과는 달리,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기사단과 마법병단. 그리고 병사들이 계속해서 줄지어 도착할 터였다.
아무리 이곳 벨라노르가 제국의 중앙과 동부를 잇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한들, 족히 수십만은 될 병력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양옆으로 산세가 험하고 높은 산맥이 늘어져 있는데, 굳이 안에 틀어박혀 있을 필요가 없었다.
유리한 고지에 먼저 자리를 잡고 줄기차게 마법을 날리기만 해도, 손쉽게 승리를 가져갈 수 있을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라.”
“으음.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무언가 믿을만한 구석이 있는 거겠지. 헌데 그럼 신호는 어떻게 줄 생각인가. 본녀가 아무 때나 마법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나.”
“그것도 어떻게 할지 다 생각해뒀다.”
난 카렌의 말에 구석에 놓인 짐을 뒤져, 불투명한 수정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마계에서 출발하기 전에 아이시스한테 받았던 물건이다. 성문을 여는 건 특공대가 근처에 도착했을 때다. 신호는 그들이 줄 테니, 시선만 확실하게 끌어주도록.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특공대? 에릭, 설마 몰래 성을 먹어버릴 생각인가?”
“음. 어차피 전력은 밖에서 마왕군을 맞이하고 있을 테니, 성 안에는 최소한의 인원만 남아있을 터. 혹여나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더라도, 성문이 열렸고 안쪽에서 싸움이 일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기를 깎아 먹을 수 있을 거다.”
굳이 작전을 성공시킬 필요도 없었다.
제국군 전체에 잠깐의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원래도 전력이 모자라서 이곳 벨라노르를 넘지 못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단순히 전력으로만 따지면 마왕군이 한 수 위다.
그저 군량이 먼저 떨어지기 전에 뚫지 못했을 뿐.
약간의 틈만 있다면, 알아서 제국군을 분쇄해버릴 터였다.
우웅-
나는 곧바로 수정구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뿌옇게 일어나있던 안쪽이 확 맑아지며, 이내 막사 내부로 보이는 풍경을 비췄다.
[…에릭?]
“아이시스, 오랜만이군.”
[응, 오랜만.]
난 이윽고 옆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앳된 얼굴을 보며, 반가움에 미소를 지었다.
“그쪽은 요즘 어떤가. 지낼 만한가?”
[문제없어. 에릭은?]
“음. 이쪽도 문제없다.”
신수가 훤하니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아직까진 어디 하나 막히는 곳 없이 가는 족족 도시를 함락시키고 다녔을 테니, 크게 불편하거나 지칠 일은 없었으리라.
[그런데, 무슨 일?]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부탁?]
나는 부탁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아이시스를 보며, 천천히 방금 카렌과 발라크에게 했던 얘기를 꺼냈다.
북쪽으로 가지 않고 대륙 중앙으로 향한 절반 중에 분명 악마족도 끼어있었을 터.
가만히 내 말을 경청하던 그녀는, 곧 고개를 조용히 주억였다.
[그러니까 에릭, 지금 그 도시 안쪽에 있는 거?]
“음. 그렇다. 성문은 내가 열어줄 테니, 되도록 소수정예로 부대를 편성해서 보내주면 좋겠군.”
[응. 부탁, 들어주기로 했으니까. 지금 위쪽에 물어볼게.]
난 이윽고 자리를 비운 아이시스를 보며, 잠시 수정구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형님, 마왕님들께서 과연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지금껏 별문제 없이 다른 도시들을 쉽게 함락시키면서 왔는데 말입니다.”
“여태까지 그래왔다고 해서 더 나은 방법을 강구하지 마란 법은 없다.”
“음. 그렇지만 에릭, 이 작전은 얘기가 좀 다르지 않나. 자칫하면 도시 안으로 먼저 들어갈 인원들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마왕님들도 괜한 리스크를 지고 싶어 하진 않을 거다.”
나는 혹여나 위에서 거절당할까 걱정하는 두 사람을 보며, 안심하라는 듯 씨익 미소를 짓고선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에 거절당하더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막상 전투가 시작되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테니까.”
게다가 애초에 그럴 일도 없었다.
자그마치 안쪽에서 성문을 열어줄 수 있는 패가 있는데, 무엇하러 무작정 전면전을 강구하겠는가.
적어도 내가 용사 시절 겪었던 마왕군의 계책들을 생각해보면, 그들은 절대 그렇게 무식하지 않았다.
더구나 검귀가 지금 이곳에 와있다는 것부터, 이미 수천 명으로 이루어진 가고일 정찰대가 그 하나에게 몰살당한 사건이 일어난 뒤라는 얘기였다.
인간들 중에서도 만만치 않은 상대가 몇 섞여 있으리라는 걸, 그쪽도 충분히 알고 있을 테지.
“게다가 지금 오고 있는 마왕군을 이끌고 있는 게 마룡왕님이시라고 하더군. 정 뭣하면 카렌, 네가 부탁하면 되지 않겠나.”
“뭐, 뭣? 본녀가 부탁한다고 해서 그게 바뀔 리가 있겠느냐! 아버지께선 일에 사감을 넣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글쎄.
마냥 꼭 그렇지도 않을 거 같은데.
[에릭.]
“음. 어떻게 됐나.”
난 바닥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빠르게 수정구를 집어 들었다.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표정을 보아하니, 예상대로 일이 잘 풀린 모양이었다.
[1000명 정도. 그 이상은 눈에 띌 수 있으니 안 된다고 했어.]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정예병으로 그만큼이면 충분하다.”
[응. 그런데 성문은 어떻게 열어줄 거야?]
“카렌한테 수정구를 맡겨놓을 테니, 성문 근처에 오면 이걸로 신호를 보내도록. 그럼 금방 열어주겠다.”
[알았어.]
“음. 고생해라.”
나는 이만 다시 뿌옇게 변한 수정구를 카렌에게 건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때가 되면 잘 부탁하마.”
“음. 그건 걱정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