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음. 이쯤이 딱 좋겠구먼.”
검귀를 따라 성문을 나서, 남쪽에 있는 산을 오르기를 한 시간 남짓.
나는 드디어 넓은 공터를 발견해 걸음을 멈춘 그를 보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뭐부터 하면 되겠습니까?”
“우선 자네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알아봐야겠지. 그래야 뭘 가르쳐주든 말든 하지 않겠나.”
난 노인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그에게서 돌려받은 검을 뽑았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허허.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꽤 자신 있는 모양이구먼. 광장에서는 좀 더 겸손했던 거 같은데 말일세. 허나 이리 당돌한 것도 나쁘진 않지.”
검귀는 껄껄 웃으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건….”
나는 검집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황금빛 검신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참 아름답지 않나. 이 늙은이도 처음 이걸 받았을 때 어찌나 설레던지.”
그는 잔뜩 추억에 젖은 얼굴로 천천히 제 무기를 훑었다.
오리하르콘.
이젠 내게도 꽤나 익숙한 그 진귀한 광석을 통짜로 써먹은 듯한 장검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할 만큼 휘황찬란한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그때 자네가 말했던 대로라네. 내 결코 그 무기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네만, 확실히 이 녀석에 비하면 한참 모자랄 걸세. 다만 그럼에도 그 검을 사려고 했던 건 이 늙은이가 쓰기 위함이 아니라, 혹 귀한 인연을 만났을 때를 대비해 챙겨두려고 했던 걸세. 요놈은 사정이 있어서 함부로 남한테 줄 수가 없거든.”
그야 그렇겠지.
황제에게 하사받은 검을 어찌 남에게 줄 수 있겠는가.
그랬다가는 아무리 그가 전대 그랜드 마스터였다고 한들, 목이 날아가는 꼴을 면치 못하리라.
“…확실히. 그 정도면 사정이 없더라도 남에게 물려주기는 아깝겠군요.”
“오호. 뭔가 알아보겠나? 아까도 그렇고 참 눈썰미가 좋구먼. 뭣 모르는 놈팽이들은 이를 장식용으로 보고 늙은이를 놀리기도 하는데 말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검귀를 놀리다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목숨이 두어 개쯤은 달려 있는 모양이군.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황제의 검에도 손잡이에 장식으로만 박혀있던 오리하르콘을 통짜로 써먹다니.
그렇게 아랫사람을 챙길 줄 아는 양반이 어째서 용사들에게는 그리 지원을 아꼈는가.
뿌득-
빌어먹을 놈.
난 그 뻔뻔하고 느끼한 황제의 면상을 떠올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기다려라.
곧 찾아가 그 무거운 궁둥이를 왕좌에서 끌어내려줄 테니.
“허어. 검기를… 그것도 이미 완숙에 다다른 경지구먼. 보아하니 이제 겨우 스물이나 됐을까 싶은데 말이야.”
“올해로 열아홉입니다.”
“…열아홉? 허허. 그래, 자신감엔 다 이유가 있었구먼. 분명 기대해도 좋다고 했었지? 확실히, 기대이상일세.”
나는 내 검에서 피어오르는 시퍼런 검기를 보고선 나지막이 감탄을 내뱉는 노인을 보며, 적당히 나이를 속여 불렀다.
평범하게 완성된 검사보다는, 젊은 나이임에도 상당한 경지에 오른 신동을 연기하는 편이 그의 호감을 사는데 더 유리할 테니 말이다.
“검술도, 실망하진 않으실 겁니다.”
난 마치 아이처럼 즐거워 보이는 눈으로 나를 훑는 검귀를 보며,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후웅-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닥을 박찼다.
순식간에 검 끝이 노인의 목 앞에 다다랐다.
카앙-
“훌륭하구먼. 군더더기가 전혀 없어.”
시퍼런 검기가 그의 주름진 목을 꿰뚫기 직전.
거친 쇳소리와 함께 검이 튕겨져 나왔다.
황금색 검신에는 일말의 마력조차 담겨있지 않았지만, 그 기세는 마치 태산과 같았다.
논밭의 농부조차 커다란 바위를 허공을 베듯 가를 수 있게 해주는 검기를, 단순히 검술과 신체능력만으로 받아내는 경지.
아무리 저 검이 보통은 아니라고 해도, 나름 전력으로 내지른 검을 저리 흠집하나 없이 쳐낸 것은 그야말로 귀신같은 솜씨였다.
과거 용사 시절의 나조차 끝물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문턱에서 넘겨볼 수만 있었던 경지를, 노인은 이미 수십 년 전에 달했던 것이리라.
“으음.”
난 저릿한 손을 힐끔 내려다보며 침음을 흘렸다.
차이가 나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이야.
“자, 다시 들어와 보게나.”
나는 흐뭇한 얼굴로 검을 내리는 그를 보며, 입술을 꾹 물었다.
그렇게나 여유가 넘치는 건가.
아무리 정면으로 맞붙는 것도 검술도 모두 내 특기는 아니라지만, 이대로 평범하게 끝낼 수는 없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합격점은 넘은 모양이었지만, 사나흘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럴싸한 신뢰를 쌓기 위해선 여기서 가능한 점수를 많이 벌어놓아야 했다.
원래 첫인상이 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이었으니까.
후웅-
시퍼런 검기가 잔상을 남기며 노인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전의 찌르기가 속도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면, 이번엔 한계까지 마력을 쥐어짠 공격이었다.
이게 내 실력을 보기 위한 지도대련이 아닌 진짜 싸움이었다면 악수였겠지만, 지금 그는 가만히 서서 내 검을 받아내야 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피하자면 그냥 뒤로 슬쩍 움직여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신을 제자리에서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사실만 해도, 눈앞의 노인에게는 충분히 놀랄만한 것이었으니까.
카앙-!
하지만 그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검을 쳐낸 노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검귀는 짐짓 동그래진 눈으로 제 검에 실린 마력을 훑었다.
“…이거 믿을 수가 없구먼.”
전력을 다해 무식하게 밀어붙인 일격은, 그조차 검기를 일으키지 않고서는 쉬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용히 날 바라보는 노인의 시선에 경악이 비쳤다.
아무리 제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한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나, 그 또한 한때 그랜드 마스터였다.
제국 최강.
이 넓은 땅덩이를 가진 제국 안에 그를 당해낼 자가 없었기에,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이명이었다.
이후로도 검을 완전히 놓지는 않았을 테니, 비록 몸은 쇠약해졌을지언정 검술은 그때보다 더욱 깊어졌을 터.
그런 자신에게서 실력으로 검기를 본 것이었다.
당연히 놀라자빠질 수밖에 없겠지.
“흐읍!”
나는 속으로 씨익 미소를 지으며, 튕겨져 나간 검이 그리는 궤적 그대로 몸을 돌렸다.
쐐애액-
방금 그 일격이 막히면서 눈에 띄게 흐릿해진 검기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반대쪽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후웅-
노인은 지금껏 아슬아슬하게 검이 닿기 직전에야 움직였던 것과는 달리, 먼저 쳐내기 위해 팔을 움직였다.
아무래도 어느 정도 내 실력을 인정해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수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툭-
두 검이 허공에서 서로 부딪히기 직전.
난 손잡이를 놓으며 그에게 달라붙었다.
“뭣….”
부웅-
그리고 허공을 가른 노인의 검을 보고선, 황급히 뒤로 팔을 뻗어 떨어지는 검을 낚아챘다.
후웅-
이어지는 올려 베기.
나는 깔끔하게 허공을 가른 검을 천천히 집어넣었다.
서걱-
동시에 노인의 옷깃이 베이며, 그의 가슴팍에 새빨간 실선이 그였다.
[믿을 수 없는 업적!]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적에게 회심의 일격을 적중시키셨습니다.]
[힘이 ‘1’ 증가합니다.]
[민첩이 ‘2’ 증가합니다.]
[체력이 ‘1’ 증가합니다.]
“아! 괜찮으십니까?”
난 눈앞에 주르륵 떠오른 메시지들을 잠시 옆으로 치우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손을 뻗었다.
“괜찮네.”
그는 본래 서있던 자리에서 세 발짝 정도 물러나있었다.
순간이나마 검기를 쓴 걸로도 모자라, 제자리에서 발을 떼기까지.
이 정도면 호감을 사기엔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칠 거 같았다.
“…알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무언가 고민하는 그를 보고선, 잠시 뒤로 물러났다.
“음.”
난 시큰거리는 손목을 붙잡으며 거친 숨을 훅 내쉬었다.
아무래도 아까 전력을 다한 일격이 막혔을 적에 조금 무리가 간 모양이었다.
그래도 입 꼬리는 알게 모르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손목이 조금 나간 것에 비하면 훨씬 값진 보상을 얻었으니까.
[에릭 가이오스]
[뱀파이어]
[레벨 : 48]
[힘 : 135][민첩 : 138][체력 : 132][마력 : 101]
나는 벌써 도합 500을 넘은 능력치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전쟁 통에 남들의 눈을 속이고, 몰래 마법병단 하나를 쓸어 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물론 조금 준비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말이다.
일이 다 끝났을 땐 또 얼마나 강해져있을지 기대되는군.
“…그보다 자네.”
가만히 상태창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곧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 노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방금 그거, 어디서 배운 겐가.”
그는 심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어딘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건 본디 그의 하나뿐인 제자였던 가제프가, 처음으로 자신을 꺾고 그랜드 마스터의 자리를 물려받았을 적에 보였던 움직임이었으니까.
“배우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으음… 아니네. 그럴 리가 없지. 그 아이가 제자를 받았더라면 소문이 나지 않았을 리 없으니.”
난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하며, 속으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걸 배웠다고 해야 할까.
용사 시절, 가제프 그 빌어먹을 자식이 딱 한 번 술에 취했을 적에 몇 번이나 재연하는 꼴이 웃겨서 기억하고 있던 것이었다.
항상 말없이 고개만 까딱이며 사지로 이방인들을 몰아넣던 놈이, 제 무용담이랍시고 웬일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합격입니까?”
나는 아픈 손목을 꾹꾹 누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허허.”
그리고 환한 웃음과 함께 내 어깨에 팔을 올리는 노인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네, 혹시 내 제자 한 번 해볼 생각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