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아. 예, 어르신. 금화 스무 개만 주십시오.”
뒤늦게 정신을 다잡은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가격을 불렀다.
보통 어느 정도 실력 있는 대장장이가 만든 철검이 은화 두 개쯤 한다고 생각하면, 고작 검 하나에 금화 스무 개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하지만 이건 한 드워프가 본인이 평생 동안 만든 장비들 중에, 가장 으뜸이라 여기고서 목숨이 위험한 와중에도 기어코 챙겨 나온 물건이었다.
같은 드워프라면 모를까, 그보다 한참 손재주가 떨어지는 인간들 사이에선 몇 년에 하나는 나올까 싶은 걸작이었다.
“그, 금화 스무 개 말인가. 으음….”
마흐제브 또한 그를 아는 듯, 조금 당황한 기색은 있어도 절대 그 가격이 비싸다는 눈치를 보이진 않았다.
다만 당장에 그만한 돈은 없는 모양인지, 아쉬운 표정으로 검을 내려다보며 무언가 고민하듯 입을 뻥끗거렸다.
하긴 아무리 한때 제국의 그랜드 마스터였다고는 한들, 숲에 들어가 은거를 시작한지도 벌써 수십 년은 됐을 노인이 무슨 돈을 그렇게 가지고 있겠는가.
“혹시 조금 깎아줄 수 없겠나? 아니, 내 지금 돈을 빌려올 테니 잠깐만 팔지 말고 기다려주게.”
그는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며 부탁을 늘어놓았다.
이대로 그냥 간다면 머지않아 물건이 팔리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거겠지.
곧 있을 전쟁에 대비해 곳곳에서 모여든 기사단이 하나둘씩 거리에 얼굴을 내비치고 있으니, 누군가는 금방 이 검의 가치를 알아보고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만한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훌륭한 검을 위해 금화 스무 개 정도는 기꺼이 내놓을 터였다.
보통 그쯤 되면 주머니 사정이 가벼울 일은 없었으니까.
“음. 하지만….”
“해가 떨어지기 전에 금방 다녀올 테니… 응? 어떻게 안 되겠나?”
나는 생각보다 더 간절한 검귀의 모습을 보며, 의아함에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비록 그가 은퇴한지 시간이 오래 지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랜드 마스터는 그랜드 마스터였다.
노인이 현역이었을 적에, 제국에서 지원을 아끼지는 않았을 텐데.
당장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만 해도 이보다 배는 좋은 것일 터였다.
제아무리 드워프의 것이 좋다고는 해도, 황제가 직접 하사하는 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족히 수만은 될 제국의 장인들이 수십 수백 년 동안 쏟아낸 물건 중에, 그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을 리가 있나.
“으음….”
혹시 모르니 예비용으로라도 하나 챙겨놓으려는 심산인가?
아니, 어쩌면 훗날 재능 있는 후학에게 내리기 위해 미리 준비해놓으려는 걸지도 몰랐다.
용사 시절, 그가 언젠가는 제대로 된 제자를 받아 또 한 번 훌륭하게 키워보는 것이 소원이라 떠드는 것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아마 현 그랜드 마스터이자 그의 첫 제자였던 가제프만으로는 성에 안 찼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한 번 성공한 적이 있었기에 맛이 들렸던 걸지도.
다만 그만한 재목이 어디 구하기 쉬운 게 아니니, 시작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던 거겠지.
“내 꼭 좀 부탁함세.”
어떻게 한담.
생각해보면 딱히 안 될 것도 없었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이곳 벨라노르의 요직들과 다리를 이어줄 수 있을만한 사람과 친분을 터놓는 것이었으니까.
난 눈앞의 노인을 가만히 살피며, 천천히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보았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전대 그랜드 마스터인 그라면, 충분히 그 역할을 해내줄 수 있을 터였다.
아니, 오히려 당장 돈이 없는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준다면 마음의 빚까지 얹어놓을 수 있었다.
그러면 자연스레 뒷일도 쉬워질 터.
문제는 괜히 여기서 안면을 텄다가 나중에 귀찮을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좋습니다.”
나는 한참의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리고서, 미소와 함께 검을 집어 들었다.
그와의 친분으로 인해 훗날 손해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면, 그전에 싹을 잘라내면 그만이었다.
마침 검귀는 이곳에서 마룡왕과 싸우다 팔 한쪽이 잘리는 큰 부상을 입게 될 예정이었다.
이거 잘만하면 여기서 아예 죽여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그게 정말인가? 허허. 고맙네, 주인장. 그럼 지금 바로 다녀올 테니,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아뇨. 그냥 드리겠습니다.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으응?”
난 마흐제브에게 검을 내밀며, 조용히 그의 허리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허리에 차고 계신 그 검, 척 보기에도 훌륭한 물건이군요. 검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관리를 잘하더라도 세월의 흔적을 완전히 피해가기란 어려운 법.”
나는 과하지 않게 광이 나있으면서도 곳곳에 헤진 부분이 보이는 검집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만한 검을 그리 오랫동안 다뤄 오셨다는 건, 어르신께서 상당한 실력자시라는 얘기겠지요.”
“으흠, 잘 모르겠구먼. 어디서 받은 물건일지도 모르지 않나.”
노인네가, 모르는 척 하기는.
난 슬쩍 튕기면서도 꽤나 흥미로운 눈빛으로 이쪽을 살피는 그를 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하. 그런 대단한 무기를 누가 함부로 남에게 주겠습니까. 하물며 돈을 주고 사셨다 하더라도 말이 안 되는 얘기지요. 그랬다면 지금 고작 금화 스무 개가 없으시진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주인장의 얘기대로라면 이 늙은이가 굳이 그 검을 살 이유가 없지 않나. 더 좋은 물건을 가지고 있는데 말일세.”
“그거야 혹시 모르지요. 누구한테 선물이라도 하시려는 걸지 말입니다.”
“오호. 과연….”
나는 퍽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탄성을 내뱉는 노인을 보며,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일단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나.
“그럼 젊은이의 말이 맞다 치고, 어디 무슨 부탁인지 한 번 들어나 봄세.”
검귀는 결국 마지못해 져주는 척, 조심스레 귀를 기울였다.
언뜻 무뚝뚝해 보이는 입가에, 결국 참지 못하고 희미하게 새어나온 미소가 보였다.
살짝 휘어진 눈매를 보아하니 지금 이 상황이 퍽 즐거운 것 같았다.
숲 생활이 여간 지루했던 게 아닌 모양이군.
“어르신께 가르침을 청하고자 합니다.”
“…가르침이라니, 검술 말인가?”
난 내 부탁에 곤란하다는 듯 되묻는 노인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크게 바라지 않겠습니다. 한 사흘 정도만 짚어주시지요.”
“으음.”
잠시 고민에 잠긴 그는, 슬쩍 내 몸을 훑어보더니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거 단순히 물건만 내다 파는 줄 알았더니, 날붙이 좀 잡아본 모양이로구먼.”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한때 용병으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헌데 왜 굳이 금화 스물이나 되는 돈을 포기하면서까지 내게 검을 배우려는 겐가. 요새 바깥이 조금 시끄럽기는 해도, 그 정도면 어디 멀리 숨어서 전란이 피해갈 때까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어르신께 가르침을 청하는 겁니다. 아무리 숨어 산다 한들 세상사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를 노릇이니, 제 몸 하나 건수할 실력을 갖추어야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그래, 그 말도 맞구먼. 좋네, 주인장 뜻대로 해줌세. 다만 조건이 하나 있네.”
검귀는 내 당돌한 대답에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아까 받았던 검을 다시 돌려주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래 뵈도 이 늙은이가 눈이 꽤 높아서 말일세. 일단은 가르쳐주겠지만, 만약 자네가 따라오지 못한다면 거기서 바로 끝내버릴 걸세. 물론 그 검은 그대로 받아갈 테고 말이야. 어떤가, 이래도 하겠는가?”
한 마디로 내가 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만한 재목인지 한 번 시험해보겠다는 건가.
말은 간단했지만, 전대 그랜드 마스터의 마음에 드는 일이 그리 쉬울 리가 없었다.
현 제국의 그랜드 마스터인 가제프조차도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에 걸쳤다 했으니,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물론이지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옆에 두고 키울 제자를 고를 때의 이야기였다.
잠시 검술을 봐주는 정도의 기준이라면, 나로서도 충분히 통과할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내가 주로 다루는 것이 단검이라고는 한들, 다른 무기를 아예 쓸 줄 모르는 건 아니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활이나 창 같은 것에 비하면 검은 내게도 꽤나 익숙한 무기였다.
게다가 용사 시절의 경험과 지금 내 능력치를 생각하면, 청년 시절의 가제프와 비교하더라도 실력이 크게 모자라지는 않을 터였다.
“좋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함세. 날은 언제가 좋겠는가.”
“지금부터 바로 시작하시지요.”
“허허. 역시 젊은이 혈기가 좋긴 좋구먼. 따라오게나.”
나는 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를 따라, 도시 바깥으로 향했다.
“확인되셨습니다. 들어가십시오. 다음… 아! 한센, 잠깐 자리 좀 맡아주게. 마흐제브 님!”
그렇게 막 성문을 지나려던 찰나.
난 검문을 하던 중 이쪽을 발견하고선 허겁지겁 뛰어오는 경비를 보며, 잠시 발을 멈췄다.
“오, 그래. 또 보는구먼. 그러니까….”
“동문 경비대장 사이몬입니다! 혹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안내병과 마차를 붙여드리겠습니다.”
자신을 경비대장이라 소개한 그는, 절도 있게 꾸벅 허리를 숙이며 마흐제브를 맞이했다.
“허허. 됐네, 됐어. 그냥 요 앞에 잠시 산책이나 다녀오려는 것뿐일세.”
“아, 예! 알겠습니다. 헌데 옆에 계신 분은….”
“가젤이라고 합니다. 부끄럽지만 거리에서 좌판을 열고 장비를 팔고 있습니다.”
성문경비대장이라.
그것도 마왕군과 마주할 동문이란 말이지.
나는 속으로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내 이 친구랑 긴히 나누고픈 얘기가 있어서 말일세. 그럼 이만 가 봐도 되겠나?”
“예, 고생하십시오!”
역시 검귀를 설득하길 잘했군.
이렇게 그와 같이 다니는 것만으로도, 방금 그 경비대장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을 터.
이거 아무래도 생각보다 더 간단하게 준비를 마칠 수 있을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