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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63화 (63/200)

제63화

“에릭,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건가.”

광산을 무너트리고 밖으로 나온 지도 어느덧 열흘 가까이 지났다.

며칠을 마차 안에 가만히 박혀있자니 슬슬 몸이 찌뿌둥했는지, 카렌이 볼멘소리를 내며 슬쩍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재촉하지 마라. 그렇지 않아도 다 도착했으니까.”

“드, 드디어 도착인가? 알았다.”

나는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도시를 가리키며, 환한 표정으로 다시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지간히도 갑갑했나보군.

“형님. 생각보다 줄이 긴데, 이거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못 들어갈 거야 없지. 물론 안에 묵을만한 곳이 남아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거야 웃돈을 얹어주면 알아서 자리가 생길 테니 걱정하지 마라.”

난 성문 앞에 길게 늘어져있는 줄을 보며, 뒤에서 느긋하게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틀 전에 잠깐 들렀던 도시에서 전해들은 소문에 의하면, 돌연변이 수인족들의 군세가 제국 동부를 거의 함락시켰다는 모양이었다.

그중 절반은 일주일도 전에 북쪽으로 향했지만, 나머지는 남아있는 도시들을 하나씩 무너트리며 중앙으로 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속도를 봤을 때, 앞으로 마왕군이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나흘 정도.

혹여나 강행군으로 하루쯤 일찍 도착한다하더라도, 사흘이면 충분히 밑 작업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마침 이 마차에 좋은 패가 실어져있었으니까.

“다음!”

나는 마왕군의 침공으로 인해 빡빡해진 검사 속에서도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온 차례에, 천천히 말을 몰아 경비병 앞에 섰다.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벨트람에서부터 올라오는 길입니다.”

“벨트람? 서쪽에 있는 국경에 붙은 도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것 봐라.

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미끼를 던지는 그를 보며, 속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겉으로는 모르는 척 너스레를 떨고 있지만, 실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확실히, 어디서 대충 지명만 주워듣고 수작을 부리려는 멍청이들을 걸러내기엔 안성맞춤인 질문이었다.

“아뇨. 서쪽이 아니라 남쪽 국경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사유는?”

경비는 내 똑 부러진 대답에 천천히 고개를 주억이고선, 곧장 다음 질문을 건넸다.

“요새 돌연변이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동쪽에서 기승을 부린다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불안해죽겠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도시 근처에 있던 산까지 무너져 내리지 뭡니까. 도통 마음 놓고 살 수가 있어야지요.”

“…산이 무너졌다고요?”

“예.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알겁니다.”

나는 산이 무너졌다는 소리에 황당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가만히 어깨를 으쓱였다.

“으음, 알겠습니다. 헌데 그 마차는….”

“아. 이건 팔려고 가져온 물건들입니다. 타지에서 먹고 살려면 가진 거라도 내놔야지 않겠습니까. 하하.”

“한 번 안을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끼이익-

난 어느 정도 경계가 누그러진 얼굴로 마차 뒤쪽을 열어보는 경비를 보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어디 보자. 갑옷에 도끼, 검, 창. 무기상이셨습니까?”

“예. 대장간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신분패만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짐칸을 한 번 슥 살피고선, 무기만 몇 개 들어보고는 다시 문을 닫았다.

나는 딱히 수상한 걸 발견하지는 못한 듯 자연스레 신분패를 요구하는 경비를 보며, 품에서 용병패를 꺼내들었다.

“E급 용병 가젤… 용병? 방금 전에 무기상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하. 요새 워낙 먹고 살기가 빠듯해서 부업으로 조금 뛰고 있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확인되셨습니다. 들어가십시오.”

난 드디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창대가 비켜선 것을 보며, 마차를 몰아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카렌, 발라크. 이제 그만하고 나와도 좋다.”

“정말인가? 후우.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

나는 적당히 사람이 없는 골목 앞에 마차를 세우고선, 주변을 슥슥 살피며 조심스레 짐칸을 열었다.

“이번에도 무사히 통과하셨군요. 형님.”

“음. 나야 이전에 만들어둔 패가 있으니 말이다. 그보다 카렌, 고생 많았다.”

“흥. 하찮은 인간 놈들의 눈을 속이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본녀의 마법을 무어로 보는 거냐.”

난 드워프들에게서 가져온 장비밖에 없던 짐칸 구석을 일렁이며 모습을 드러내는 두 사람을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환영 마법.

지정된 곳에 사용자가 보여주고 싶은 광경을 대신 드러내주는, 일종의 눈속임과 같은 기술이었다.

비록 도중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어 자주 쓰이진 않는 마법이었지만, 단순히 눈으로 한 번 슥 훑고 마는 경비들을 속여 넘기는 데는 그거로도 충분했다.

“일단 후드는 계속 쓰고 있도록.”

“예, 형님.”

나는 이윽고 로브의 후드 부분을 눌러쓰고 짐칸에서 내리는 둘을 보며, 짐을 모두 챙기고서 근처에 마차를 맡겼다.

“에릭, 본녀는 이제부터 뭘 하면 되는 거냐?”

“딱히 없다. 당장은 말이지.”

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우선 방을 잡으러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로브로 몸을 가리고 있다고 한들, 두 사람은 너무 눈에 띄었다.

특히 2m가 넘는 발라크의 덩치는, 그렇지 않아도 로브 때문에 어딘가 수상해 보이는데 사람들의 이목까지 확실하게 끌고 있었다.

괜히 이러다 정체가 들통 나기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질 테니, 일단은 둘을 숙소에 두고 오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어차피 마왕군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들이 무언가 할 일은 없었으니까.

딸랑-

나는 거리를 걷다 여관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그리로 들어갔다.

“음. 별로 깨끗해보이진 않는구나. 에릭, 정말로 여기서 지낼 건가?”

난 벽지 곳곳에 핀 곰팡이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카렌의 모습에,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괜히 이런 수상한 차림으로 비싼 숙소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그런 곳일수록 괜히 이상한 손님을 들였다가 문제가 터지면 앞으로 장사하기가 곤란해지니, 신분이 확실한 사람만을 받는 법이었으니까.

“남은 방 있습니까?”

“없수. 요즘 같은 때에 방이 남아있을 리가 있나.”

그야 그렇겠지.

나는 무심한 대답과 함께 턱이 빠져라 하품을 늘어놓는 주인장을 보며, 품에서 은화를 하나 꺼내들었다.

툭-

“웃돈을 얹어드리겠습니다. 나흘 치 방 하나만 내주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선객이 있는데 마구잡이로 내쫓을 수는 없지 않겠수.”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은화를 보고선 흠칫 몸을 떨었다.

침을 꼴깍 삼키면서 은근슬쩍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 아무래도 더 달라고 시위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런 싸구려 숙소 따위, 하루에 동화 열 개면 차고 넘칠 텐데.

그래도 괜히 소란을 피우고 싶지는 않았기에, 난 한숨을 푹 내쉬며 은화를 하나 더 올렸다.

“이 이상 욕심 부리지 마십시오.”

“크흠. 조금만 기다리쇼. 금방 방 하나 내어드릴 테니.”

난 멋쩍은 얼굴로 은화를 가져가며 짤랑이는 주머니를 들고 객실로 향하는 그를 보고선, 나지막이 고개를 내저었다.

보아하니 대충 방값을 두 배를 쳐주고선 손님을 내보내려는 모양이었다.

그런 주제에 은화를 하나 더 받아먹다니.

뭐 상관없나.

어차피 머잖아 죽거나 마왕군에 붙잡힐 테니.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쫓아내는 게 어디 있습니까!”

“거 미안하게 됐다니까. 아무튼 돈도 더 쳐줬으니까 다른데 알아보쇼.”

“그러니까 이런 때에 남는 방이… 주인장! 주인장!”

쿵-

“후우… 제기랄. 나가라면 그냥 나갈 것이지. 거 드럽게 뻐팅기는구만. 자, 여깄수. 2층 맨 끝 방이요.”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만들어낸 그를 보며, 열쇠를 받아 카렌에게 건넸다.

“먼저 들어가서 편히 쉬고 있도록.”

“음. 헌데 에릭, 혼자 어딜 갔다 오려는 건가.”

“따로 준비할 일이 있다. 발라크, 짐 좀 부탁하지.”

“예, 형님.”

난 내 몫으로 들고 있던 장비들을 세 개 정도 빼고서 발라크에게 맡긴 뒤, 곧바로 여관을 빠져나왔다.

“관문 벨라노르.”

나는 사람이 북적이는 광장에 자리를 잡고선,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던 마왕군을 처음으로 패퇴시킨 도시의 풍경을 슥 둘러봤다.

북쪽과 남쪽으로 붙어있는 험한 산지와 높은 성벽은, 대륙 중앙으로 향하는 길목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었다.

동쪽에서 수도를 향해 밀고 들어오려면, 일부러 험준한 산지를 건너 돌아가지 않는 이상에야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만 했다.

“저, 저기 봐! 기사님들이야!”

“이걸로 벌써 기사단만 네 개째구먼. 세상에… 진짜 동쪽에서 큰일이 나긴 한 모양이야.”

당연히 제국 또한 그를 알고 있기에, 돌연변이 수인족들에게 동쪽이 무너졌단 소식을 듣자마자 빠르게 이리로 군을 모았다.

그리고 곧 벌어진 치열한 접전 끝에, 수많은 희생을 빌어 기어코 마왕군의 기세를 한풀 꺾어낼 수 있었다.

만일 그때 제국이 이곳에서 마왕군을 쳐내지 못했더라면, 연합을 결성하기도 전에 수도까지 밀려온 적을 막지 못하고 멸망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또한 그 말은 즉, 여기를 무너트릴 수만 있다면 그 빌어먹을 황가의 자식들을 빠르게 끌어내릴 수 있다는 얘기였다.

“흐흐흐.”

나는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계획을 위해 주섬주섬 좌판을 열었다.

이번에 있을 싸움은 규모가 규모이니만큼, 나 혼자 무력으로 어찌 해볼 것이 아니었다.

노리는 것은 대충 시선을 끌고 지난번처럼 성문을 열어버리는 것.

그를 위해선 일단 이 도시에 녹아들 필요가 있었다.

“뭐야, 좌판인가. 처음 보는 얼굴이네. 밖에서 왔어요?”

“예. 오늘 들어왔습니다.”

“뭘 파시는 거예요? 검? 무슨 갑옷도 있네. 무슨 좌판에서 이런 걸 판대.”

난 챙겨온 장비들을 늘어놓고선, 어서 누군가 미끼를 물기만을 기다렸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마다 호기심에 한 번씩 시선을 주긴 했지만, 이내 곧바로 관심을 끊고 다시 길을 가기 일쑤였다.

뭐 당연한 일이었다.

드워프들이 만드는 것들은 대부분 겉보기엔 투박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런 걸 좌판 위에서 팔고 있으니, 보통 제대로 된 물건으로 보진 않겠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진짜배기들은 이 물건들의 가치를 알아보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만한 실력자라면 못해도 기사, 그중에서도 수석기사라 불릴 정도는 될 터.

내가 노리는 건 그들을 통해 만날 수 있는 벨라노르의 요직들이었다.

“허어. 기이하도다. 어찌 길바닥에서 이리 귀한 물건을 팔고 있단 말인가.”

걸렸다.

나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혹 실례가 안 된다면 거기 있는 검이 얼만지 알 수 있겠소?”

그리고 노인과 눈을 마주친 순간.

난 저도 모르게 굳어가는 표정을 푸느라 진땀을 빼야만했다.

“주인장?”

검귀 마흐제브.

나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은퇴한 제국의 그랜드마스터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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