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으음.”
창을 통해 들어오는 옅은 불빛에 잠에서 깬 나는, 숙취에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최전선에서 수년을 구르며 자연스럽게 알코올과도 친구가 된 몸뚱이가 아닌, 끽해야 와인이나 조금 홀짝거려본 몸이라 그런가.
생각 외로 머리가 꽤 지끈거렸다.
“벌써 아침인가.”
광산 안쪽이라 따로 볕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시간이 되면 여기저기 횃불을 놓는 것으로 밤낮을 구분하는 모양이었다.
끼익-
“일어나라, 에릭! 장로 난쟁… 아니, 드워프가 늦으면 아침은 없다고… 아. 잘 잤나?”
“그럭저럭.”
나는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카렌을 보며, 천천히 그녀를 따라 거실로 나섰다.
어제 그렇게 취했으면서 정작 숙취는 없는 건가.
아니, 오히려 그리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숙취에 시달리는 이 몸뚱이가 더 신기한 걸지도 모르겠군.
“그나저나 카렌, 괜찮나?”
“음? 뭐가 말이냐.”
“어제 말이다. 혹시 기억 안 나나?”
“으흠, 부끄럽게도 그렇다. 분명 잔을 건네받은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말이지. 아. 그러고 보니 에릭, 네가 본녀를 방까지 옮겨줬다고 들었다. 정말 고맙구나.”
“…알았다.”
아무래도 어제 부린 그 추태는 전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잘된 일이었다.
괜히 기억하고 있어봐야 구석에 머리나 박고 자책하기밖에 더하겠는가.
난 거실 안쪽에 붙은 식탁에서 흘러나오는 고소한 냄새에 침을 꼴깍이며, 빈 의자를 당겨 앉았다.
“형님, 일어나셨습니까.”
“음.”
나는 그렇게 술을 마셔놓고 숙취 하나 없이 멀쩡해 보이는 발라크를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막 카렌을 엎고 자리를 비울 때까지는 괜찮아 보이긴 했어도, 혹시 이후로 뻗어버리진 않았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상태를 보아하니 오늘부터 바로 움직여도 좋을 거 같았다.
“손님, 잠자리는 괜찮았나?”
“예. 덕분에 잘 잤습니다.”
“허허. 그거 다행이구먼. 어제 들어갈 땐 말짱한 것 같았는데 영 일어나지를 못해서 밤새 뭔 일이라도 있었나 했지. 아, 배고플 텐데 어서 들게. 우리 여편네가 다른 건 몰라도 이 빵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굽는단 말이야.”
“누가 만들어줬는지는 몰라도, 화덕이 워낙에 좋아야지.”
“으하하! 그런가?”
나는 금슬이 참 좋아 보이는 장로 부부의 모습에, 피식 웃음 흘리며 빵을 집었다.
“어때요? 입맛에 좀 맞아요?”
“예. 맛있네요. 사모님 손맛이 장난 아닌데요?”
“어머, 사모님은 무슨. 호호.”
쫄깃하고 고소한 풍미에 금방 접시를 비운 나는, 창을 통해 슬쩍 바깥을 살폈다.
“다들 아침부터 많이 바빠 보이네요.”
“응? 아, 저거 말이구먼. 듣자 하니 애들이 어제 새로 큰 광맥을 발견했다는 모양이야. 보통은 이렇게까지 일찍 나가진 않는데, 다들 궁금해서 좀이 쑤셨나보구먼. 혹시 아나? 거기서 뭐 희귀한 광물이 나올지. 이를테면 어제 말한 오리하르콘이라던가. 으하핫!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일세.”
“하하. 그래도 또 모르지요. 정말 그 오리하르콘을 보게 될지. 아, 사모님. 아침 잘 먹었습니다.”
난 어제 그 레일이 깔린 통로를 향해 줄지어가는 드워프들을 보고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 그들이 파놓은 길을 따라 광산 안쪽으로 들어가려면 지금이 바로 적기였다.
“어이, 거기! 남는 곡괭이 좀 있으면 더 가져와! 혹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아, 형씨!”
“아, 칼라브 씨!”
드워프들 무리 사이에서 금방 어제 보초를 서고 있던 경비를 찾은 나는, 반가울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어젠 좀 많이 아쉬웠수. 형씨랑 아주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셔보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쪽 아가씨가 아주 뻗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하하. 다음에 같이 마시지요. 어디 날이 어제 하나뿐이겠습니까?”
“흐흐. 그건 그렇지.”
“아, 저기 있구만! 글쎄 저 덩치 형씨가 안토스를 아주 보내버렸다니까?”
“뭐? 그게 정말인가? 그 주당 안토스가….”
그렇게 칼라브 옆에 서서 몇 마디 얘기를 나누고 있자, 금세 드워프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쏠렸다.
“이봐, 덩치 형씨. 그러니까 이름이 발… 발람….”
“발라크다.”
“아, 그래. 발라크! 흐흐. 아침부터 밖에는 웬일인가? 우리 일하는 것 구경은 별로 재미없을 텐데.”
발라크 녀석, 인기 많구만.
나는 단숨에 저보다 머리 서넛은 작은 드워프 사이에 둘러싸인 그를 보며, 슬쩍 눈짓을 보냈다.
“일이라. 그거 궁금한데. 혹시 나도 한 번 가볼 수 있나?”
“으응? 일하는데 말인가? 뭐, 안 될 건 없지만….”
“어제 그렇게 맛있는 술도 잔뜩 받았는데, 그냥 얹혀 사는 건 영 마음이 불편해서 말이다. 가능하면 일손을 좀 도와주고 싶은데.”
“으하하! 그래? 그런 거라면야 대환영이지! 으음, 하지만 자네가 워낙에 덩치가 커서 불편하지는 않을까 걱정이구만.”
“뭘 그런 걸 가지고 걱정하고 있나. 까짓 거 조금 파서 편하게 넓혀주면 되지. 자, 올 거면 빨리 오게. 형씨, 당신도 갈 거요?”
“아, 예. 그러지요.”
난 이윽고 자연스레 나한테도 의견을 묻어오는 칼라브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좋아, 완벽하군.
“잘했다, 발라크.”
“헤헤. 아닙니다, 형님.”
나는 훌륭하게 역할을 완수한 발라크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며, 금방 드워프들을 따라 선로 앞에 다다랐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면, 곧 먼저 타고 간 쪽에서 수레를 다시 돌려보내줄 거요. 아, 마침 저기 오는구만.”
드르르륵-
나는 저 멀리 길게 깔린 선로를 따라 들어오는 철수레를 보며, 옆에 준비되어 있는 곡괭이를 들었다.
끼이이익-
“자, 타쇼.”
과연 드워프들이 만든 물건답게 끝에 다다라 알아서 멈추는 수레를 보며, 곧장 그 안에 몸을 실었다.
“음. 혹시 많이 좁진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넓어서 다행이구나.”
“…카렌, 조금만 앞으로 가봐라.”
“윽… 넓다는 말을 취소다.”
한 번에 옮길 때 꽤 여럿이서 이동하는 모양인지, 그들을 기준으로 맞춰 만들었을 텐데도 자리가 꽤 넉넉했다.
물론 이마저도 발라크가 올라서니 갑자기 훅 좁아지는 느낌이었지만 말이다.
“으하하! 이거 뭐 네 명밖에 안 탔는데 이렇게 꽉 찬 적은 처음이구만. 원래는 열 명이서도 거뜬한데 말이야. 어쨌든 이제 출발할 테니 다들 손잡이 꽉 잡고 있으라고.”
드르륵-
이윽고 남는 자리에 올라탄 칼라브가 짤막한 팔을 뻗어 옆에 올라와 있는 레버를 앞으로 당기고, 동시에 천천히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들 혹시 모르니까 고개는 숙이고 있으쇼. 난 괜찮은데, 형씨들하고 아가씨는 잘못하면 모가지가 꺾일 수 있으니까.”
쿠구구구-
나는 그의 말마따나 슬쩍 고개를 숙이고선, 금세 가속도를 받아 빠르게 질주하는 수레를 내려다봤다.
계속 이러고 있자니 목이 조금 뻐근해지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천장에 부딪혀서 머리가 날아가는 것보다는 조금 불편한 게 나았으니까.
“자, 이제 거의 다 왔수.”
끼기기긱-
난 머지않아 금방 목적지에 도착해 속도를 줄이는 수레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으음… 굉장하군.”
“척 보기에도 뭐가 많구나.”
“과연, 밖에 장인들뿐만 아니라 이렇게 광물이 풍부한 광맥까지. 이런 곳이 있는 줄 모르고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간, 형님 말씀대로 나중에 꽤 큰 방해가 됐겠습니다.”
나는 벽 곳곳에 빼곡하게 들어찬 수많은 원석들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많다 많다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러니 마왕군에게 다른 광산들을 빼앗겨도 차질 없이 계속 장비를 공급할 수 있었던 거겠지.
“흐흐. 이거 아주 다들 넋이 나갔구만.”
“여기가 그 새로 발견했다는 광맥입니까?”
“응? 그 얘기는 또 어디서 들었수. 아, 장로가 말해줬나 보구만. 뭐, 그렇지. 어제 갑자기 원래 있던 광맥의 벽이 허물어져서 말이야. 그랬더니 이런 노다지가 떡하니 튀어나오더구만. 자, 다들 가져온 곡괭이 들고 따라오쇼.”
난 근처에서 열심히 곡괭이를 휘두르며 원석을 캐내고 있는 드워프들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는 칼라브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열심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음, 역시 이렇게 그냥 봐선 지반이 약한 곳을 찾기 힘들겠군.
“칼라브. 저희 지금 어디까지 들어가는 겁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쇼, 형씨. 아무리 그래도 초짜한테 아무 자리나 내줄 수는 없지. 잘못 건드리면 광산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부분이 있거든. 우리야 매일 이러고 다니니까 대충 봐도 그런 곳은 피할 수 있지만, 형씨들은 아니잖나. 그러니까 지금 안전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는 거지.”
“과연, 그렇군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는 마침 타이밍 좋게 나온 이야기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어디 한 번 떠볼까.
“혹시 가능하면 가시면서 조금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뭘 말이요? 약한 부분 말하는 거요?”
“예.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데려다주신 곳에서 파다가 갑자기 그런 데가 나오면 잘못 건드릴 수도 있으니까요.”
“으음… 그것도 그렇구만. 좋수. 그럼 대충 짚어줄 테니까, 가서 참고하쇼.”
난 가만히 내 말을 듣고서는 나지막이 고개를 주억이는 칼라브를 보며, 걸어가는 중간 중간 그가 짚어주는 곳을 눈에 담았다.
“뭐 대충 이 정도만 알아두쇼. 게다가 막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요. 혹시 몰라서 가르쳐주긴 했지만, 어지간해선 거기서 약한 부분이 나오진 않을 테니까. 거기가 이번 광맥에서 가장 두꺼운 부분이거든. 자, 도착했수. 여기요.”
“음.”
나는 계속 얘기를 듣다보니 그새 도착한 목적지를 보며, 천천히 곡괭이를 들어올렸다.
“나중에 시간 되면 데리러 올 테니까, 그때까지 마음껏 캐보쇼.”
“예. 조금 있다 보겠습니다.”
난 곧 우리를 두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는 그를 보며, 가만히 그가 짚어줬던 장소들을 머릿속에 되뇌었다.
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