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57화 (57/200)

제57화

“그래, 북쪽에서 여기까지 왔단 말이지. 거의 대륙을 종단한 셈이로구먼. 마차를 타고도 몇 달은 걸릴 거리였을 텐데, 참 멀리도 왔구먼.”

“하하. 실력 있는 장인 분들을 찾아 돌아다니다 보니 어째 그렇게 됐습니다.”

드워프들의 축제는 빠르게 시작됐다.

안주라고는 이 광산 어디서 길렀는지 모를 돼지 몇 마리를 잡아다 통째로 굽는 게 전부였으니, 사실상 앉을 수 있는 자리하고 독한 술로 가득 찬 오크통 몇 개만 옮기면 끝이었다.

“하긴 그만한 물건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하겠나. 하다못해 그 요상한 금속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게 아니고서야 어디 오리하르콘이라도 구해와야 할걸세.”

“음.”

오리하르콘인가.

그에 대해선 나도 용사 시절에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거 같았다.

제국의 황제가 차고 다니는 검에 박힌 보석 같은 게 바로 오리하르콘이라 했던가.

단단함은 감히 그 아다만티움에 비할 바 못 되지만, 마력을 받아들이는 성질만큼은 단연 으뜸이더랬지.

같은 실력이라 하더라도, 오리하르콘으로 만든 무기라면 제 역량을 한층 뛰어넘는 수준의 검기를 부릴 수 있다는 듯했다.

물론 그만큼 워낙에 귀한 터라 그 소재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드워프들이 몇 가지고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혹시 가지고 있으십니까?”

“으응? 오리하르콘을 말인가? 으하하! 그럴 리가 있겠나. 만일 그랬으면 이미 뭐든 만들어서 써먹고 있었을 걸세. 그런 재료가 앞에 있는데 고이 모셔두고만 있을 드워프는 이 세상에 없다고?”

장로는 혹시나 싶은 내 질문에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그 두꺼운 손바닥으로 내 등을 팡팡 내리쳤다.

이상하군.

그의 말대로라면 그때 그런 얘기가 돌았을 리가 없는데.

“크흐. 그래도 확실히 궁금하긴 하구먼. 오리하르콘이라. 그런 걸 한 번 다뤄보는 것도 내 평생의 소원 중 하나였는데 말이야. 그래서 그런데 손님, 혹시 그 단검 한 번 나한테 완전히 맡겨볼 생각 없나?”

“하하… 그건 좀, 곤란할 거 같습니다.”

“으하핫! 장난일세, 장난.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걸 함부로 녹여보겠나. 설령 그러더라도 제대로 제련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먼. 그 작은 단검에 도리어 내 망치가 부서질 정도였는데 말이야.”

나는 족히 1리터는 될 법한 커다란 잔에 가득 담긴 맥주를 연거푸 들이켜며 실없는 장난을 치는 그를 보며, 속으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거 어쩌면 그 몇 개 가지고 있다던 오리하르콘들이, 전부 연합이 결성된 이후에 캐내어 보관하던 것들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드워프들이 희귀한 재료를 보면 곧장 못 참고 제련하고 싶어하는 성격을 가졌다고 한들, 연합을 위해 써먹어야 할 물건을 함부로 빼돌릴 수는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전쟁 통엔 채굴량 또한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테니, 광산 깊숙이 묻혀있던 것들이 쏟아지는 광물들 사이에 하나둘씩 섞여 나왔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전선에 나가 있는 수십 수백만 병사들의 장비들을 충당하려면 하루에 족히 수천, 수만 톤은 퍼 날랐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혹시 언젠가 그런 광물들을 구하게 된다면, 꼭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렇다는 건 개중에 가장 커다란 규모를 자랑했던 이 광산에, 오리하르콘이 묻혀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운이 좋으면 여길 떠나기 전에 저 안쪽에서 하나쯤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게 정말인가? 으흐흐. 말만이라도 고맙구먼. 기대하고 있겠네. 그리고 만일 정말로 가져온다면, 그땐 내가 공짜로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줌세.”

나는 듣기만 해도 설렌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장로를 보며,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오, 이 형씨 정말 잘 마시는구만! 벌써 열 잔째야, 열 잔째!”

“수인들도 우리 못지않게 터프하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이거 정말로 이쪽에서 먼저 쓰러질지도 모르겠어.”

난 수십 명의 드워프들 사이에 둘러싸여 대작을 벌이고 있는 발라크를 보고선, 조용히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저쪽은 잘하고 있군.

아마 오늘이 지나고 나면 그들과 꽤 친해져 있을 거 같았다.

본래 드워프들의 마음을 열고 광산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못해도 닷새 정도는 생각해두고 있었지만.

저 정도면 사흘이면 족히 그만큼 친분을 쌓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저 덩치 큰 수인족이 아까 손님을 보고 형님이라고 부르던데. 진짜 형제는 아닐 테고, 어쩌다 만나게 된 겐가? 그렇지 않아도 요새 인간하고 수인하고 둘이 썩 사이가 안 좋다고 들었는데 말일세.”

“북쪽에서 그 일이 터지기 훨씬 전부터 호형호제하며 지냈습니다. 같은 스승님을 두고 있었거든요.”

나는 장로의 질문에 이럴 때를 대비해 마차에서 미리 입을 맞춘 대로 말을 넘기고선, 저 멀리 수레가 달릴 수 있도록 레일을 깔아놓은 길을 살폈다.

저쪽인가.

“크으.”

“벌써 일어나는 겐가?”

“하하. 아무래도 챙겨줘야 할 사람이 생긴 거 같아서요.”

난 잔에 반쯤 남아있던 맥주를 목에 털어놓고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훗날 연합의 장비 보급에 차질을 주고 이곳이 전선 아래쪽을 든든히 떠받드는 천혜의 요새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선, 무조건 이 광산을 무너트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러려면 저 안쪽에 들어가 지반이 약한 부분을 찾아야했다.

동시에 일을 마치고 우린 따로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도 미리 준비해야겠지.

“으응, 맛업서… 이러언 거, 대체 왜 먹는 고야….”

“아이고, 이쪽 아가씨는 벌써 뻗어버렸구만. 거 누가 챙겨야 할 거 같은데… 아! 형씨, 마침 잘 왔구만.”

“…카렌.”

나는 의외로 술에 약한 모양인지, 축제가 시작된 지 30분도 안 돼서 뻗어버린 카렌을 보고선 그녀의 옆에 앉았다.

이 상태로 계속 내버려 뒀다간 술김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가능한 빨리 안쪽으로 옮겨서 재울 필요가 있었다.

“…에리익?”

“그래, 에릭이다.”

“에리익… 에릭! 히히, 에릭이다아….”

난 푼수처럼 실실 웃음을 흘리며 슬그머니 내 쪽으로 팔을 뻗는 그녀의 모습에, 나지막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보다 많이 취했군.

이래서야 앞으로 술이 필요한 곳에는 못 데리고 다닐 거 같았다.

“후후. 에릭이 두 며엉… 아니이, 한 명인가아….”

“…카렌. 이만 들어가지. 너무 취했다.”

나는 무슨 찰흙을 만지듯 내 얼굴을 조물락거리는 카렌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보아하니 여러 잔을 마신 건 아닌 거 같고, 끽해야 한 잔.

그것도 잔에 아직 반이나 남아있는 걸 보아하니 다 마시지도 못한 것 같았다.

그녀가 아예 술을 못 마시는 것도 아니고, 분명 마왕성에서 와인 몇 잔쯤은 마시는 모습을 봤는데.

확실히 드워프들이 담그는 술이 독하기는 독한 모양이었다.

“끄어어억….”

“안토스가 쓰러졌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만. 벌써 열네 잔째야!”

“대단하구만, 형씨! 다음엔 나랑 한 번 해보자고!”

난 저 멀리서 그런 걸 연거푸 열네 잔이나 들이켜고도 아직 얼굴색 하나 안 변한 발라크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정말 술대작으로 드워프를 이겨버릴 줄은 몰랐는데.

저 정도면 사흘이 아니라, 당장 내일 그들을 따라 레일 위에 오를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이거 생각보다 녀석이 열심히 활약해주는군.

“헤헤. 에릭, 따뜻하다….”

“…장로님, 죄송하지만 저희가 오늘 어디서 머무르면 될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응? 허허. 거 젊은 아가씨가 완전히 가버렸구먼. 잠깐만 기다리게. 내가 안내해주겠네. 끙차.”

“감사합니다.”

나는 카렌을 등에 업고선, 천천히 장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원래대로라면 축제가 끝날 때까지 서로 술잔을 부딪치며 드워프들과 더욱 돈독히 친목을 다질 필요가 있었지만, 다행히 발라크가 대신 선전해주고 있으니 조금은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 거 같았다.

“에릭, 앞에 봐라아. 이상한 난쟁… 읍!”

“응? 방금 뭐라고 했나?”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술에 취해서 앞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모양이에요.”

“으하하! 하긴 그러면 눈앞이 말 빙글빙글 돌아가긴 하지.”

…이 빌어먹을 용족 공주님이.

난 순간 뒤에서 튀어나온 위험한 발언에 황급히 카렌의 입을 틀어막고선,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다된 밥에 아주 잿더미를 들이부으려고 하는군.

원래대로라면 적당히 눕혀서 재우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계속 옆에 남아서 그녀를 감시하고 있어야 할 거 같았다.

“자, 여길세. 헌데 이거 참, 천장이 낮아서 괜찮으려나 모르겠구먼.”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밖에 제 아우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얻어 쓰는 입장에서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아무리 그래도 귀한 손님인데 어찌 그냥 두겠나. 내 곧 애들을 시켜서 임시로 하나 만들어줄 테니, 그때까지만 잠시 여기서 지내게나.”

“예, 감사합니다.”

나는 족장의 배려에 꾸벅 고개를 숙이며, 그가 완전히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렸다.

끼익-

“으읍… 푸하!”

“…십년감수했군.”

난 그렇게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들리고 나서야, 천천히 카렌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놓을 수 있었다.

“으… 에릭, 너무하다아!”

나는 술에 취한 와중에도 날카롭게 눈을 뜨며 나를 째려보는 그녀의 모습에, 말없이 한숨을 푹 쉬었다.

참, 너무하긴 누가 너무한 건지.

“맨나알, 맨날 이 몸만 괴롭히구우… 쌀쌀맞게에….”

“그래, 그래. 이만 누워라. 많이 취했다.”

난 혀 꼬인 발음으로 계속 불만을 늘어놓는 카렌을 자리에 눕히며, 구석에 있는 이불까지 가져와 덮어주었다.

“못댄, 못댄 놈… 본녀느은, 너랑 가려구 반년 동안 열시미… 으음….”

나는 다행히 금방 잠에 빠지는 그녀를 보며,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되도록 내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 좋겠군.

괜히 안 잊었다간 또 아침에 한바탕 난리가 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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