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55화 (55/200)

제55화

터벅- 터벅-

“음. 생각보다 훨씬 음침하구나. 정말 이런 곳에 누가 살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에릭?”

“그건 걱정하지 마라. 조금만 더 들어가면 나올 테니. 여기 드문드문 털 같은 게 떨어져 있지 않나.”

“형님. 정말 이런 곳으로 누가 오갈 수 있는 겁니까?”

“…넌 좀 참아라, 발라크.”

커다란 동굴 같은 입구를 통해 광산 안으로 들어온 지도 어느덧 10분 째.

나는 슬슬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두 사람을 향해 드워프의 수염으로 보이는 털을 주워 보여주며, 계속해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어갈수록 점차 작아지던 통로는, 어느새 나조차 슬쩍 허리를 숙어야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아져 있었다.

“…생각보다 깊긴 하군.”

용사 시절, 이곳에 몇 번 들렀을 때는 이렇게 후미지지 않았었는데.

하긴 그때는 이미 드워프란 드워프들은 죄다 이곳에 모인 데다, 방금 전 지나온 절벽 입구에서부터 성벽이 쌓여있었을 정도로 도시가 번창해있었으니.

아직 마왕군의 침공이 알려지지도 않은 지금에는, 이리 낙후되어있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연합을 결성하기 전의 드워프들은, 대부분 이렇게 발견하기도 힘든 광산 깊은 곳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고들 하니까.

아무래도 머릿수가 많은 인간이나 강력한 정령술을 부리는 엘프, 호전적이고 강한 전사들이 많은 수인들과는 달리.

다른 종족과 부딪치며 영역싸움을 벌일 재간은 없는 탓이겠지.

애초에 종족 전체가 하나하나 전부 장인들로 이루어져 있는 터라 저들끼리도 마찰이 심해, 점처럼 여기저기 흩어져서 부족 단위로 살고 있기도 했으니까.

물론 그거야 수인도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그쪽은 힘의 섭리에 의해 대족장 아래로 여러 부족이 모여 있기라도 했었다.

“슬슬 저 멀리 공동이 보이는군.”

그렇게 이젠 어느덧 기어 다녀야 싶을 정도로 좁아진 통로를 지나기를 또 몇 분.

나는 머지않은 곳에 출구처럼 확 넓어지는 공간을 보며, 조금 속도를 높여 길을 빠져나왔다.

“허억, 헉… 드, 드디어 이 좁은 곳에서 나갈 수 있는 겁니까?”

“음… 고생했다.”

난 바로 뒤에서 힘겹게 따라붙으며 땀에 푹 젖은 발라크의 모습에,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하긴 나도 그렇게 답답할 정도였는데, 나보다 훨씬 덩치가 큰 녀석은 오죽했을까.

“마셔라.”

“후욱, 훅… 가, 감사합니다. 형님.”

먼저 통로를 빠져나와 그의 손을 붙잡고 밖으로 꺼낸 나는, 거칠어진 숨을 훅훅 내쉬며 바닥에 널브러진 놈에게 수통을 건네주었다.

“음. 안쪽은 생각보다 넓구나. 저 앞에 건물 같은 것도 보이고 말이다.”

“그래, 도착이다.”

나는 밖으로 나와 주변을 휙휙 둘러보는 카렌을 보며, 천천히 꽤 그럴싸한 모습의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들 마차에서 얘기해줬던 건 다 기억하고 있겠지?”

“그 드워프란 놈들한테 주의해야할 점 말이냐? 흥. 본녀가 그런 괴팍한 놈들의 기분이나 맞춰줘야 한다니. 하지만 큰 공적을 세우기 위함이니 어쩔 수 없겠구나. 그래야 아버지께서도 분명 기뻐해주실 테니 말이다.”

“놈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되도록 그들이 만든 물건들을 칭찬해줄 것. 그리고 혹시나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하면 절대로 빼지 말 것. 맞습니까?”

좋아, 잘 기억하고 있군.

난 뚝 부러지는 발라크의 대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이며, 노파심에 마지막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음. 그리고 다시 한 번 경고하지만, 절대로 그들 앞에서 난쟁이라는 말은 꺼내지 말도록. 그랬다간 도망치다 저 좁은 통로에 끼어서, 엉덩이에 구멍이 여럿 더 생길지도 모르니 말이야.”

“윽… 어, 엉덩이에 말이냐. 음, 주의하겠다.”

이 정도면 혹시라도 실수하지는 않겠지.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카렌의 모습을 끝으로, 어느덧 자그마한 도시를 둘러싸고 쳐진 울타리 앞에 도착해 걸음을 멈췄다.

“거기 누구냐! 행색을 보아하니 인간이랑… 수인?”

“거참 이상하구만. 꼬리만 있는 수인은 들어봤어도, 뿔만 나 있는 수인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본 거 같은데.”

그래도 어째 이런 곳에 경비를 서기는 서는지, 곧 땅딸막한 드워프 둘이 우리를 발견하고선 슬금슬금 울타리 뒤에서 걸어 나왔다.

“아무튼, 여긴 어떻게 알고 들어왔지? 거기 덩치 큰 형씨를 데리고 꾸역꾸역 저 앞에 있는 통로를 지난 걸 보면 우연히 찾은 건 아닌 모양인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선 그들은,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유심히 우리를 살폈다.

그러고는 곧 번뜩이는 창날을 들이밀며, 슬며시 손을 들어 뒤쪽에 무어라 신호를 보냈다.

아무래도 혹시 모를 상황을 염두에 두고, 다른 사람들을 부른 게 아닐까 싶었다.

“밖에서 우연히 솜씨 좋은 드워프 장인 분을 만나, 그분께 이곳에 대한 얘기를 듣고 어렵게 찾아왔습니다.”

“뭐? 동족한테 얘기를 듣고 왔다고? 이봐, 우리 부족 중에 지금 밖에 나가있는 애가 있었나?”

“작년에 산토스 녀석이 인간 놈들 술을 한 번 마셔보고 싶다고 한 보름 정도 나갔다 오긴 했는데… 아! 그러고 보니 한 명 있잖나. 7년 전에 자기가 꼭 최고의 술을 빚고 말겠다면서, 대륙에 있는 모든 술을 한 입씩 다 마셔보고 오겠다던 그놈 말이야.”

“소고스 그 멍청이 말이야? 으음… 아무리 그래도 그 자식이 인간한테 여기를 알려줬을 거 같진 않은데.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이 녀석들이 지금 여기 있는 게 더 말이 안 되고….”

나는 대충 넌지시 떡밥을 뿌리고선, 저들끼리 보기 좋게 알아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러다 어느 정도 얘기가 무르익었을 때쯤.

난 용사 시절 가능한 더 좋은 장비를 구하기 위해, 저 까탈스러운 드워프들을 상대로 써먹었던 비장의 수를 꺼내들었다.

“저… 두 분이서 말씀을 나누고 계신데 죄송하지만, 혹시 그 창 좀 구경해볼 수 있겠습니까?”

“응? 뭐, 뭐야! 이 자식, 무슨 속셈이야. 아직 너흴 어떻게 할지 결정이 안 났으니까, 거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아… 그게, 너무 탐이 나서 말입니다. 그 예리하게 서 있는 창날 하며, 직선으로 아릅답게 쭉 뻗은 창대까지. 보아하니 보통 무기가 아닌 거 같은데. 혹시 어느 장인 분께서 만드신 건지 좀 알 수 있겠습니까?”

“자, 장인? 크흠.”

나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경계심을 놓지 않나 단박에 표정이 풀어지는 그를 보며, 속으로 씨익 미소를 지었다.

날 때부터 다른 종족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대단한 손재주를 타고난 그들은, 그만큼 자기가 직접 만든 물건들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상당한 편이었다.

특히 드워프들만 있는 마을에는 따로 대장간이 없다는 말이 있다고들 했던가.

“예. 이만한 물건은 제국 어디를 가서도 쉬이 구하기 힘들겠지요. 아! 그러고 보니 옆에 계신 분이 들고 계신 것도 만만치 않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꼭 두 분의 무기를 만드신 장인 분을 한 번 만나 뵙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으하하! 하긴, 이 창이 워낙에 잘 뽑히긴 했지.”

“이거 이 친구 무기 보는 눈이 있구만! 그래, 이런 건 어디 다른 데서 보기 힘들지. 아니, 불가능하지!”

그런 만큼 드워프들이 들고 있는 장비는 대부분 본인이 직접 만든 것일 확률이 높았다.

장인으로서의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종족에게 있어 저들이 만든 물건에 대한 진심 어린 감탄과 찬사는, 그들의 마음을 단박에 활짝 열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래,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지. 혹시 창 말고 검도 좋아하나?”

“거 보니까 허벅지에 단검을 차고 있는 거 같은데. 일단 들어와서 우리 집에 한 번 가보자고. 그렇지 않아도 내가 저번에 만들어둔 게 있는데….”

“그, 그럼 그게 두 분이서 직접 만드신 거란 말입니까? 정말 영광입니다!”

나는 단번에 풀어져선 자연스레 내 허리에 팔을 감으며 울타리 안쪽으로 향하는 둘을 보고선, 뒤에 있는 카렌과 발라크를 향해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형님….”

“으음,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어렵구나.”

두 사람은 그런 내 모습이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는 듯, 안쓰러운 표정으로 훑으며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계획을 위해 상대방의 적의를 풀고 가까이 다가가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지금은 저런 반응을 보일지 몰라도, 결국 둘 모두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나처럼 행동해야 할 터였다.

만일 그것 말고 드워프들의 경계를 누그러트릴 만한 방법이 있다면…

역시 그들과의 술 대작에서 승리하는 것뿐이겠지.

물론 제 손재주만큼이나 주량도 좋은 이 술고래들을 상대로 그를 이긴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안토스, 칼라브! 침입자가 나타났다더니, 왜 너희들이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게냐! 그리고 뒤에 녀석들은… 응?”

“아, 족장! 그게 말이요. 이거 조금 얘기를 나눠보니까 그렇게 나쁜 놈들은 아닌 거 같더라고.”

“그래. 이 무기의 진가를 알아보는 녀석이 못된 사람일 리가 없지. 안 그런가, 친구?”

족장?

두 드워프를 따라 그들의 도시 안으로 들어선 나는, 저마다 개성 있는 갑옷을 챙겨 입은 무리를 이끌고 나온 풍성한 수염의 사내를 보고선 슬쩍 입술을 핥았다.

그래, 이놈이 족장이란 말이지.

“이런 멍청한 놈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외지인을 함부로 도시에 들이는 녀석들이 어디 있느냐!”

“아니, 그래도….”

“아. 죄송합니다. 이거 괜히 저 때문에… 그, 거기 멋들어진 수염을 가지신 분께서 불편하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음? 에, 에릭!”

“쉿.”

나는 나가겠다는 소리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크게 뜨는 카렌을 보며, 조용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말이 나가겠다는 거지, 설마 진짜로 그러겠는가.

전혀 걱정할 필요 없었다.

“나, 나 말인가? 으흠. 하긴 내 수염이 좀 잘생기긴 했지. 내가 왕년엔 말이야….”

지금 실시간으로 그 족장의 표정이 풀려가고 있었으니까.

“저, 족장님….”

“아! 이거 본의 아니게 손님 앞에서 추태를 보였구만. 그래, 여기까진 무슨 일로 찾아왔나? 다른 종족이 드나들기엔 길이 좀 많이 험했을 텐데 말이야.”

난 단번에 호칭이 외지인에서 손님으로 돌변하는 것을 보며, 속으로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마왕군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서 그런가.

쉬워도 너무 쉽군.

나는 이윽고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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