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54화 (54/200)

제54화

“으음.”

포탈을 통과해 드디어 다시 중간계 땅을 밟은 나는, 저번과 달리 말짱한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웨에엑!”

“으하하! 이 자식 이거, 큰소리 뻥뻥 치더니 완전히 뻗었구만!”

기절해선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이들부터, 어지러움을 못 이기고 그 자리에서 속을 게워내고 있는 녀석들까지.

난 혼란스러운 인파 사이를 빠르게 훑으며, 카렌과 발라크를 찾았다.

“형님, 이쪽입니다!”

“음. 따라와라.”

금방 멀지 않은 곳에서 두 사람을 발견한 나는, 곧장 그들을 이끌고 자리를 벗어났다.

이제 곧 마왕군이 움직이며 그들에 대한 소문이 대륙 전역에 퍼지기 전에,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가뜩이나 들어가기 힘든 곳에 그 손재주 좋은 땅딸보들이 성벽을 쌓아 올리기 시작하면, 저번처럼 남쪽에 또 난공불락의 요새가 만들어질 터였으니까.

“에릭, 이쪽이 아니다. 마왕님들은 저기에….”

“괜찮다. 우린 도착하자마자 따로 움직일 거라고 미리 보고해놨으니까. 그보다 조금 서두르지.”

나는 마왕들이 모여 있는 곳을 가리키며 내 눈치를 살피는 카렌을 보고선, 걱정 말라는 눈빛과 함께 빠르게 언덕을 내려왔다.

“그런데 형님. 저희 지금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저번에 엘프들을 찾으러 마을에 들렀을 때, 대륙 남쪽에 드워프라는 종족이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듣자하니 다들 손재주가 좋고 금속을 다루는데 일가견이 있다고 하더군.”

“중간계의 녀석들이 좋은 장비를 구할 수 없게끔 장인들을 먼저 치겠다는 얘기구나. 과연,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헌데 이렇게 셋이서만 가도 괜찮은 건가? 차라리 아버지나 투마왕님께 말씀드려 증원을 요청해보는 건….”

“아니, 그건 됐다. 지금 놈들이랑 전쟁을 하러 가는 게 아니니까.”

지금은 그저 드워프들 사이에 몰래 숨어들어, 혹시라도 놈들이 그곳에 성벽을 치지 못하도록 대비하러 가는 것뿐이었다.

훗날 전선 아래쪽에서 단 한 번도 자리를 내주지 않으며, 지겹게도 마왕군을 괴롭히게 될 드워프들의 성채.

아렌델.

전쟁이 지속되는 수년 동안 매일같이 무리해서 광물을 캐냈는데도, 끝까지 광맥이 마를 생각을 안 하던 거대한 광산.

머잖아 그를 둘러싸고 세워질 난쟁이들의 도시는, 가능하면 어떻게든 미리 손을 써놓을 필요가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저 멀리 끝이 안 보이는 커다란 숲에, 그 옆에 붙어있는 작은 도시 하나라.”

나는 우선 지금 우리가 어디쯤에 떨어졌는지 파악하기 위해, 주변 풍경을 슥 눈에 담았다.

딱히 뭐 대단한 특징은 보이지 않는군.

아무래도 눈앞의 도시에 한 번 들어갔다 와볼 필요가 있을 거 같았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금방 다녀올 테니까.”

“예, 형님.”

“음. 조심히 갔다 오도록.”

숲 초입에 두 사람을 남겨두고 성문 앞으로 걸음을 옮긴 나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품에서 용병패를 꺼내었다.

E급 용병 가젤.

비록 카렌을 구할 때 지명수배가 걸려버린 이름이긴 했지만, 벌써 일 년 가까이 지난 일이니만큼 지금쯤이면 대충 잊혔을 가능성이 높았다.

애초에 얼굴도 제대로 그려져 있지 않았던 데다가, 가젤이라는 이름이 어디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고.

아마 진즉에 수십 수백 명의 가젤들의 항의로 다 떨어져 나갔겠지.

“정지. 신원을 밝히십시오.”

나는 숲에 붙어있는 도시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아 금방 돌아온 차례를 보고선, 앞을 가로막은 경비에게 용병패를 꺼내 보였다.

“아, 용병이셨군요. 확인되셨습니다. 들어가십시오. 다음!”

난 예상대로 별문제 없이 길을 터주는 그들을 지나, 곧장 아무 술집이나 찾아 가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딸랑-

“어서 옵쇼.”

나는 아직 해가 떠 있는 시간대라 그런지 텅 비어있는 테이블들을 지나, 곧바로 주인장으로 보이는 사내 앞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여기 맥주 하나만 주시오.”

“예, 맥주 하나. 안주는 필요 없습니까?”

“음. 그보다 바쁘지 않다면 뭐 좀 물어볼까 하는데.”

“아, 예.”

쿵-

“여기서 코젤… 그러니까 제국 남쪽으로 가려면 마차로 얼마나 걸리는지 알 수 있겠소?”

난 주문하기가 무섭게 금방 따라 내온 맥주를 들고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코젤? 아, 그 드워프들이랑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작은 도시 말입니까? 으음… 제가 알기론 큰 도시를 서너 개 정도 건너야 될 테니, 적어도 보름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싶군요.”

보름이라.

생각보다 그렇게 엄청 멀리 떨어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애초에 전에도 마왕군의 본대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게 대륙 동쪽이라 했으니, 완전히 남쪽 끝이나 서쪽에 치우친 곳으로 가는 게 아닌 이상에야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보다 행색을 보아하니 용병이신 거 같은데. 왜 굳이 남쪽을 찾으시는 겁니까? 듣자 하니 요새 북쪽이랑 서쪽에 일이 그렇게 많다던데.”

“음? 북쪽이야 수인족 때문에 그렇다 쳐도, 서쪽은 무슨 일이 있나?”

“저도 손님들한테서 전해 들은 얘기라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엘프들이랑 무슨 문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오히려 북쪽보다 일거리가 많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허어… 그렇단 말이지.”

이거 가기 전에 엘프들 움직임이 영 수상쩍은 걸 보긴 했어도, 정말 무슨 일이 터질 줄은 몰랐는데.

나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금방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얘기 들려줘서 고맙소.”

가능하면 드워프들 쪽 일을 빨리 끝내고서, 서쪽에 한 번 들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끼익-

“스, 습격이다! 밖에, 밖에 뭔지 모르겠지만 무장한 놈들이 언덕을 내려와 이쪽으로….”

“젠장! 일단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은 다 성벽으로 모여!”

벌써 시작인가.

난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란에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성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내가 잠깐 주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새 다들 정비를 마치고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수, 수가 너무 많습니다!”

“일단 성문을 걸어 잠그고, 저들이 근처에 오면 무슨 일인지 대화를 하도록 한다. 어디서 온 놈들인지는 몰라도, 선전포고도 없이 갑자기 영지전을 붙으러 온 건 아닐 테니까. 물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사람을 보내서 주변 영지에 도움을….”

그래도 빈손으로 그냥 나가긴 그러니까, 기왕 안에 들어와 있는 김에 작은 공적 하나쯤은 세우고 가는 것도 괜찮겠지.

나는 성벽 앞에 급히 모인 병사들을 향해 무어라 연설을 늘어놓고 있는 기사를 보며, 슬쩍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서걱-

“…대, 대장님?”

슬그머니 그의 뒤로 돌아가 머리를 잘라낸 나는, 갑옷으로 막혀있는 어깨 대신 드러난 절단면에 이를 콱 박아넣었다.

꿀꺽-

“흐음….”

대장이라더니, 능력치는 오르지 않는 건가.

하긴 국경에서 좀 떨어져 있는 이 작은 도시에, 기사라고 해봐야 뭐 얼마나 강한 놈이 붙어있었겠어.

“히, 히이익!”

“뭐, 뭐야 방금….”

“잡아! 저 녀석 잡아!”

나는 삐쩍 마른 시체를 툭 밀어 바닥에 넘어트린 뒤에야 정신을 차린 병사들을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성벽 앞으로 다가갔다.

“이 자식, 감히 대장님을… 컥!”

“어디 보자… 이건가?”

난 갑작스러운 상관의 죽음에 당황해선 우왕좌왕하는 다른 녀석들과 달리 곧바로 내게 달려든 병사의 목을 콱 쥐며, 성벽을 여닫는 장치로 보이는 레버를 향해 팔을 뻗었다.

“켁, 켁….”

“저, 저 자식 설마… 안 돼! 다들 빨리 막아!”

“음. 이미 너무 늦었어.”

끼기긱-

크그그극-

나는 뻑뻑한 레버를 당기기가 무섭게 덜컹거리며 올라가기 시작한 성문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 * *

덜컹-

“에릭,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냐?”

“거의 다 왔다. 오늘 내로 도착한다고 했으니, 적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내릴 수 있을 거다.”

작은 선물과 함께 도시에서 나와 카렌과 발라크를 데리고 근처 마을에서 마차를 구한 나는, 웃돈을 쥐여 주고 열흘 동안 쉼 없이 달려 금방 남쪽 국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 손님! 도착했습니다.”

“음. 수고했네. 자, 이건 잔금일세.”

후드를 꾹 눌러써 정체를 가린 뒤 마차에서 내린 나는, 마부에게 돈을 쥐여 주고선 눈앞에 보이는 도시를 쭉 지나쳤다.

“음? 에릭, 저 안으로 들어가는 거 아니었나?”

“저긴 그냥 국경에 붙은 도시일 뿐이다. 지금 가고 있는 곳은 드워프들이 숨어 사는 장소고 말이야.”

빠른 걸음으로 도시 옆에 있던 산을 올라 슬그머니 국경을 건넌 나는, 능선 아래를 살피며 우리의 목적지를 찾았다.

“에릭, 아까부터 이 절벽에서 뭘 그렇게 찾고 있는 거냐.”

“조금만 기다려봐라. 분명 이쪽에 길이… 아, 저기 있군.”

“예? 어디 말입니까, 형님?”

“…지금 설마 이 가파른 절벽 아래를 가리키고 있는 거냐?”

깎아 내지른 절벽 아래.

사람 하나가 벽에 딱 붙어서 간신히 지날 수 있는 구불구불한 길을 발견한 나는, 곧장 일행들을 데리고서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후두둑-

“에, 에릭. 정말로 이쪽 길이 맞는 거냐?”

“조용히 하고 집중해서 따라와라. 괜히 그러다 떨어져도 난 모른다.”

“혀, 형님….”

살짝만 삐끗해도 족히 100미터는 되어 보이는 절벽 아래로 떨어질 좁은 길목에 올라선 나는, 조금씩 조금씩 신중하게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후둑- 빠각!

“흐, 흐어어억! 혀, 형님!”

턱-

“…조심 좀 해라, 발라크.”

거 천천히 집중해서 오라니까.

“도착이다.”

“허억, 헉….”

“주, 죽을… 죽을 뻔했다!”

그렇게 절벽을 지나기를 수십 분.

나는 드디어 거대한 광산 입구를 눈앞에 둘 수 있었다.

중간에 발라크가 유독 큰 덩치 때문에 발이 빠진 사고가 있긴 했지만, 다행히 늦지 않게 손을 뻗어 붙잡은 덕에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바로 들어가지.”

난 그 커다랗고 어두운 광산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이제 슬슬 양념을 시작해볼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