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에릭. 이제 곧 출정식이 시작될 텐데, 괜찮겠나?”
“음. 걱정하지 마라. 그전에 끝날 테니.”
“하지만… 아직 투마왕님에게 맞은 상처들이 남아있지 않느냐.”
나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살피는 카렌을 향해 괜찮다며 손을 들어 올린 뒤,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다들 싸움구경을 위해 흥미로운 표정으로 슬쩍 자리를 비켜 공간을 만들어준 터라, 움직이는데 크게 걸리적거리는 건 없을 거 같았다.
“…형님, 상처라니 어떻게 된 겁니까.”
“신경 쓸 거 없다. 크게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니까.”
난 카렌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내 몸을 살피는 발라크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정말로 만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녀석을 상대하는 데는 충분할 터였다.
아무리 그간 강자들을 찾아다니며 가파른 성장을 마쳤다고 한들, 그래 봐야 아직 애송이.
수년 동안 적진과 최전선을 오가며 활동했던 내 눈에는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더구나 능력치의 차이는 오히려 전보다 더 좁혀진 상태.
“흐흐. 그렇습니까? 그럼 전력으로 가겠습니다.”
나는 서서히 상체를 숙이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자세를 잡는 녀석을 보고선, 허벅지의 단검에 손을 올리려다 흠칫 멈춰 섰다.
굳이 무기까지 들 필요는 없겠지.
그 편이 놈을 굴복시키기엔 더 효과적일 테고 말이다.
“흐읍!”
“오오, 빠르구만! 과연 소문이 마냥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어중이떠중이들은 제대로 반응도 못하겠어. 어려 보이는데 제법이군.”
짧은 기합과 함께 녀석이 바닥을 박찼다.
일순간 사라진 것처럼 보일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 놈은, 미끄러지듯 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음.”
생각보다 훨씬 빠르군.
이 정도면 능력치로 봤을 때, 적어도 민첩이 100은 넘을 거 같았다.
저 덩치에 이렇게 날랜 움직임을 보일 정도면, 힘과 체력은 못해도 150에 다다랐을 거라 봐도 되겠지.
여신의 저주인 상태창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그 짧은 시간 만에 이렇게까지 강해질 정도의 재능이라.
아무래도 내가 그를 조금 과소평가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확실히, 큰소리칠 만하구나. 하지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재능의 이야기.
녀석과 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경험의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재능이라고 하면 나 또한 절대 그에게 뒤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높았으면 높았겠지.
똑같이 상태창을 가지고 있던 수많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고작 몇 년도 돼서 당당하게 용사의 자리를 꿰찼을 정도였으니까.
턱-
“큭….”
“주먹을 휘두르는데 군더더기가 너무 많아.”
가볍게 손을 뻗어 그의 주먹을 잡아챈 나는, 그대로 놈의 품으로 파고들어 손을 휘둘렀다.
노리는 곳은 오른쪽 옆구리 위.
퍼억-
“어윽!”
적당히 힘을 준 주먹에 얻어맞은 녀석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며, 옅은 신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끄윽, 으….”
“뭐,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저 작은 주먹에 한 대 얻어맞았을 뿐인데… 저렇게까지 괴로워한다고?”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고통에 무릎을 꿇은 발라크를 내려다보며, 용사 시절 지겹게도 봐왔던 수많은 시체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연합이든 마왕군이든, 용으로 변한 용족이나 가고일이 아니라면 모두 놀라울 정도로 내장의 위치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에, 에릭! 방금 그건 대체 뭐였나? 이 몸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딱히 그 공격에 마력을 싣지도 않았을 텐데….”
“음. 그냥 평범하게 급소를 때렸을 뿐이다.”
리버 블로우.
작은 충격에도 쉽게 파열될 만큼 약한 장기인 간을 얻어맞는 충격은, 모진 고문에도 신음 한 번 흘리지 않는 숙련된 첩자들조차 절로 새된 비명을 내지르게 만들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줄줄이 기밀을 읊어댈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포로들을 늘어놓고 정보를 캐낼 때 가끔 써먹는 기술이긴 했다.
별로 힘들이지도 않은 주먹에 픽픽 쓰러지고 고통스러워하는 동료의 모습을 보면, 다들 덜컥 겁부터 집어먹기 마련이었으니까.
“후욱, 후우… 크아아아!”
“…대단하군. 이렇게 빨리 정신을 차릴 줄은 몰랐는데.”
나는 금세 일어나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발라크를 보며, 진심으로 작게 감탄을 흘렸다.
내장을 얻어맞는 고통.
그것도 다른 장기들과는 달리 근육 하나 없이 물렁한 부위인 간에 틀어박히는 생소한 종류의 아픔은, 처음 맞아보는 사람이 쉽사리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혹시나 언젠가 당해본 적이 있는 건 아닐까도 싶었지만, 살면서 우연찮게 몇 번 정도 맞아봤을지는 몰라도 이렇게 직접 노려진 적이 있을 리 없었다.
마법과 날붙이가 심심찮게 돌아다니는 이 세상에서, 누가 굳이 이런 번거로운 짓을 벌인단 말인가.
“축하한다, 발라크. 합격이다! 이 정도면 데리고 다녀도 괜찮겠어.”
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거칠게 휘둘러오는 주먹을 향해 마찬가지로 팔을 내뻗었다.
힘 대 힘.
원한다면 그냥 적당히 피하고 더 쉽게 끝을 낼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무식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이렇게 구경꾼들이 많이 몰려있는 좋은 자리에서, 굳이 굴러들어온 기회를 걷어찰 필요는 없었다.
발록들이 강자를 숭상하는 건 맞지만, 모두 똑같이 여기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육체의 힘.
그들이 여러 종류의 강함 중에서 가장 커다란 가치로 여기는 것을, 지금 이곳에서 톡톡히 보여줄 생각이었다.
우리 독립부대의 평판을 더욱 올리기 위해서. 그리고 훗날 내 복수를 위해, 그들이 내게 가질 호의를 이용하기 위해서.
쩌엉-!
“뭐, 뭐야?”
“방금 뭔 소리야? 저쪽에서 난 거 같은데….”
“발록 놈들 있는 곳이잖아. 또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나 보지.”
두 주먹이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으….”
“음….”
나는 뼈가 찌르르 울리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억지로 더욱 힘을 주어 거세게 밀어붙였다.
순수한 육체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 만큼 마력을 쓰지 않는 이 싸움에서, 내가 발라크에 비해 앞서고 있는 것은 고작해야 민첩뿐.
힘도 체력도 하다못해 체격도 그에 비해 한참이나 밀렸지만, 방금 전에 리버 블로우로 그를 때려눕혔던 건 그때 그 순간만을 위해 그랬던 게 아니었다.
뿌득- 뿌드득-
“그윽… 어, 어떻게….”
난 점차 발라크를 밀어내기 시작한 주먹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빨리 정신을 차리고 덤벼들었다고 한들, 벌써 그 충격이 다 가셨을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억지로 일어섰으니만큼 더더욱 몸 상태가 아직 정상이 아닐 터였다.
투웅-
“고생했다.”
나는 기어코 버티지 못하고 튕겨 나간 그의 팔을 보며, 훤히 드러난 상체에 그대로 주먹을 박아 넣었다.
쩌억-!
“컥….”
가슴을 제대로 얻어맞은 녀석의 몸뚱이가, 짧은 비명과 함께 서서히 뒤로 무너져 내렸다.
쿠웅-
이윽고 주변에 흙먼지를 날리며 바닥에 쓰러진 놈은, 그저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불그스름한 마계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세, 세상에….”
“뱀파이어가, 맨주먹으로 발록을….”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바보처럼 입을 쩍 벌리고만 있는 병사들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선 아직도 얼얼한 주먹을 털었다.
“대, 대단하구만! 갑자기 주먹에 주먹으로 맞붙었을 땐, 그냥 미친 건가 싶었는데 말이야.”
“악투스 님한테 한 방 먹였다는 게 사실이었나 보군. 저 앞에 쓰러진 놈도 보통내기는 아니던데. 에릭 가이오스라고 했던가….”
난 뒤늦게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탄성에, 조그마한 목소리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누워있는 발라크를 불렀다.
“발라크. 그만 누워있고 슬슬 일어나서 내 뒤에 서도록.”
“혀, 형님….”
나는 전보다 더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벌떡 일어나 뒤쪽에 서는 녀석을 보며, 씨익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세 명인가.
부대라고 하기엔 터무니없이 적긴 해도, 몰래 움직이기엔 딱 적당한 숫자로군.
“거기, 다들 조용히 하도록!”
이제 곧 시작인가.
난 여태껏 앞에서 가만히 서 있다, 슬슬 인원들을 통제하기 시작하는 장군들을 보고선 저 멀리 보이는 단상을 올려다봤다.
“다들 이렇게 많이 모여 줘서 고맙군.”
곧 어느새 저기로 갔는지 모를 투마왕을 포함해, 일곱 마왕들이 모두 모습을 보였다.
“굳이 길게 말하지 않겠다.”
그중 가운데에 선 마룡왕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싸워라. 그리고 쟁취하라. 쌓아 올린 공적만큼, 상응하는 포상이 내릴 것이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
누군가 긴장한 몸을 푸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그럼, 지금부터 침공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와아아아아!”
“포탈, 포탈을 열어라!”
나는 짧은 연설이 끝을 맺음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함성을 보며, 단상 옆으로 모습을 드러낸 포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에릭.”
“형님!”
“음. 우리도 출발하지.”
나는 포탈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병사들 사이에 끼어, 마찬가지로 걸음을 옮겼다.
누가 전투광 발록들 아니랄까 봐, 우리가 첫 번째인가.
그 다음은 늑대인간, 악마족 그리고…
“…릴리아나.”
“왜 그러나 에릭, 그쪽에 누구 있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저 뒤쪽에 보이는 서큐버스 무리들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있는 익숙한 얼굴을 보고선, 지그시 고개를 저었다.
어찌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던 만큼, 원하는 대로 공적을 좀 나눠주긴 했는데.
아직 같은 아스모데우스 가문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는 걸 보아하니, 뭐가 조금 모자란 모양이었다.
“음?”
…괜한 걱정이었나.
난 시선을 돌리기 직전,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주변을 훑는 녀석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뭔가 꿍꿍이가 남아 일부러 그들 사이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됐으면 좋겠군.
어찌 됐든 크게 보면 한 배를 탄 사이니까 말이야.
“자, 다들 뛰어들어간다! 도착하면 조금 어지러울 수도 있겠지만, 토하는 놈은 없으리라 믿는다.”
“으하하! 여기 그렇게 나약한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너 말이야, 너! 네가 제일 걱정이다!”
나는 슬슬 하나씩 포탈을 통과하기 시작한 병사들을 보며, 시커멓게 일렁이는 공간 너머로 천천히 발을 디뎠다.
기다려라, 빌어먹을 연합의 버러지들아.
내 곧 찾아가서 친히 그 더러운 낯짝을 찢어 발겨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