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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52화 (52/200)

제52화

“허억, 헉….”

“으하하! 점점 실력이 일취월장하는군! 아무리 봐주고 있었다고는 해도, 마지막에 이렇게 한 방 먹게 될 줄이야. 훌륭하구만, 훌륭해!”

투마왕을 만나 매일 수련장에서 그와 맞붙기를 나흘 째.

드디어 내일 중간계 침공을 위한 출정식을 앞두고 그에게서 해방된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벽에 등을 기대었다.

[믿을 수 없는 업적!]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적에게 회심의 일격을 적중시키셨습니다.]

[민첩이 ‘5’ 증가합니다.]

오늘도 어째 무사히 넘겼나.

나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훑으며,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난 나흘간 피로가 축적된 탓인지 첫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격한 통증이 몰려왔지만, 그간 받은 보상들을 생각하면 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떠올리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에릭, 괜찮나?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호, 혹시 너무 맞아서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덕분에 카렌에게 괜한 오해를 사긴 했지만, 그거야 나중에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그보다는 능력치가 많이 올랐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였으니까.

[에릭 가이오스]

[뱀파이어]

[레벨 : 47]

[힘 : 133] [민첩 : 134]

[체력 : 130][마력 : 100]

고작 나흘 남짓한 시간 만에 자그마치 도합 30.

그중에서도 홀로 두 자릿수에 머물러 있던 마력을 세 자릿수로 끌어올린 건, 확실히 괄목할만한 성과였다.

이 정도면 가문의 수석기사들과 대련이 아니라 전장에서 정면으로 맞붙는다 하더라도, 가볍게 승리를 점쳐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하. 뭐야, 그 소문이 정말 사실이었잖아?”

“음?”

그렇게 투마왕이 떠난 자리에서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고 있던 나는, 입구에서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슬쩍 눈을 돌렸다.

“그 반푼이 흡혈귀가 위대하신 마왕님들의 마음에 쏙 들었다더니. 용족 공주님을 아주 연인처럼 끼고 다니는군. 다들 위에서 부대편성 때문에 바삐 돌아다니고 있는 이 시점에 말이야.”

나는 은회색 꼬리를 살랑이며 천천히 수련장 안으로 들어오는 늑대인간을 보고선, 무심히 시선을 거두었다.

셀레스트인가.

정찰대 시절 엘프들을 찾아 돌아다니다 잠깐 부딪힌 적이 있는 녀석이었다.

“여, 연인? 무례하다! 하찮은 것, 갑자기 들이닥쳐선 이게 무슨….”

“흥. 어느 시종을 붙잡고 물어봐도 다들 저 모기자식 옆에 있을 거라는데. 그게 연인이 아니면 뭐겠어. 그보다 너… 지금 날 무시하는 거냐!”

난 꼬리를 바짝 세우며 으르렁거리는 그녀를 보고선, 나지막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뜩이나 피곤해죽겠는데 이상한 게 달라붙었군.

“미안하지만 특별한 용건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냥 돌아가 주겠나? 지난 정찰대에서 변변찮은 전공하나 못 세운 녀석이랑 한가롭게 잡담을 나누고 있을 만큼, 값싼 몸은 아니라서 말이야.”

“그, 그건 네가 인간이랑 수인 녀석들을 싸움붙이는 바람에 계획이 다 엎어진 탓이잖아!”

음. 그러고 보니 그랬던가.

하지만 그건 딱히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런 변수 하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기회를 날려버린 그들의 잘못일 뿐.

“…됐다. 이제 와서 이런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보다 아이시스, 그 녀석이 널 찾고 있더군. 조금 바빠 보이던데,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야.”

…아이시스가?

나는 혼자 씩씩거리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용건을 내뱉는 그녀를 보고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걸 전해주려고 굳이 날 찾아 돌아다닌 건가? 뭐, 어찌됐든 고맙군. 수고했다.”

“그냥 우연찮게 마주쳐서 부탁받았을 뿐이다. 전에 조금은 공적을 나눠받은 은혜가 있으니까 말이야. 그보다 지금 뭐하는 거냐! 함부로 남의 머리를 쓰다듬지 마라!”

“음. 그렇군.”

은혜를 입었으니 갚는다, 이건가.

난 굳이 그럴 필요 없었는데도 기특하게 움직여준 셀레스트를 보며, 폭신폭신해 보이는 머리를 살살 쓸어내렸다.

…생각보다 감촉이 부드럽군.

나는 신경질적으로 쳐내지는 바람에 얼얼한 손바닥을 털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면 되지?”

“흥. 그건 네가 알아서 찾아보시지. 그리고 너, 저번에 운 좋게 공적 좀 쌓았다고 해서 그렇게 우쭐거리지 마라. 이번 전쟁에서 금방 내가 뛰어넘어버릴 테니까 말이야.”

난 끝까지 이를 드러내며 다른 곳으로 향하는 그녀를 보고선,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아이시스를 찾아 움직였다.

“참 예의 없는 계집이었다! 멋대로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이상한 소리나 해대고 말이야. 부탁받은 게 있으면 용건만 얘기하면 됐을 것을.”

나는 툴툴대는 카렌을 향해 적당히 고개를 주억이며, 시종 하나를 붙잡아 아이시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여긴가.”

그녀 또한 정찰대장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덕인지, 나와 같은 5층에 방을 배정받은 모양이었다.

“음. 여기가 맞는 거 같구나. 그럼 에릭, 난 이만 가보겠다.”

“으음.”

똑똑-

“누구?”

“나다, 에릭. 할 말이 있다고 하던데.”

“…응. 들어와.”

끼익-

“오랜만이군.”

문 앞에서 카렌과 헤어진 나는, 곧 방 안으로 들어가 반가운 얼굴을 마주했다.

“응. 오랜만.”

새하얀 머리칼의 소녀는 맑은 하늘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조용히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그 모습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건너편 자리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래서, 할 말이란 게 뭐지.”

“…독립부대, 투마왕님 휘하로 들어간다고 들었어.”

“음. 그렇게 됐다. 그편이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발록, 강하면 아무도 뭐라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위험할 때도 서로 도와주지 않아.”

확실히.

나는 아이시스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발록은 강함과 투쟁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며 살아가는 종족이니만큼, 아무리 동료가 위험에 빠졌다고 한들 쉬이 나서지 않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위기란, 달리 말해 강해지기 위한 하나의 기회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마 거기서 도움을 준다는 건, 그 기회를 빼앗는 거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러니까 에릭, 이거.”

“음?”

난 구석에서 무언가를 챙겨 내게 건네는 아이시스를 보며, 그녀의 손에 들린 물건을 내려다봤다.

“…수정구?”

“응.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그걸로 나, 부를 수 있어. 에릭, 주전파의 영웅이니까. 많이는 안 되겠지만, 몇 명 정도는 부대를 나와서 도우러갈 수 있어.”

한 마디로 위험할 때 이걸로 구조요청을 하라는 건가.

“음, 고맙군. 잘 쓰겠다.”

가능하면 이걸 쓰게 될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편이 낫겠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아무리 내가 어느 정도 미래를 알고 연합의 정보를 꿰뚫고 있다고는 해도, 이전과 똑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게 아닌 만큼 중간에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럼 용건은 이걸로 끝인가?”

“…응.”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수정구를 챙겨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썩 괜찮은 선물을 받았군.

“나중에 또 보지.”

* * *

“에릭, 이쪽이다!”

곧 있을 출정식을 앞두고 짐을 챙겨 내려온 나는, 앞서 길을 찾는 카렌을 따라 부대별로 분류된 인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아, 저기 오는구만!”

“저 녀석이….”

“정말로 저 비실비실해 보이는 놈이 악투스 님한테 한 방 먹였단 말이야?”

유달리 덩치들이 가득한 곳을 찾아 금방 악투스의 부대로 들어온 나는, 독립부대답게 그들과 조금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으, 옆은 보고만 있어도 숨이 막히는구나.”

“그보다 카렌, 발라크는 아직 안 온 건가?”

나는 시간이 거의 다됐는데도 출정식은커녕 마왕성에도 아직 얼굴을 비추지 않은 녀석을 떠올리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오, 에릭! 다행히 늦지 않게 먼저 나와 있었군. 어때, 몸은 좀 괜찮나?”

“…예. 조금 쑤시긴 하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닙니다.”

“으하하! 그래, 그래야지!”

“아, 악투스 님! 아직 나가시면 안 됩니다!”

난 다른 마왕들과 홀로 모습을 드러낸 투마왕을 보며, 뒤에서 그를 찾아 열심히 달려오는 인원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저쪽도 참 고생이 많군.

“안 되기는! 이렇게 기쁜 날에 가만히 안쪽에서 앉아있으면 영 좀이 쑤신단 말이야. 이렇게라도 조금씩 움직여줘야지. 그보다 에릭, 정말로 둘이서 괜찮겠나? 아무리 독립부대라고는 해도 수가 너무 적은 거 같은데. 지금이라도 원한다면 내가 몇 명 괜찮은 놈들로 끼워줄 수 있는데, 어떤가?”

“하하… 괜찮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많으면 이목을 끌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아직 한 명 기다리고 있습니다.”

“으하하! 그래? 뭐 그렇다면야 자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그는 내 대답에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저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나저나 이제 정말 시간이 없는데, 발라크 이놈은 과연 출발 전에 오긴 하려나 모르겠군.

“형님!”

그렇게 슬슬 집합장소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파가 거의 다 모여들었을 때쯤.

나는 저 멀리서 큰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사내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발라크.”

“허억, 헉… 형님.”

얼마나 멀리서부터 달려왔는지, 녀석은 도착하자마자 거칠어진 숨을 훅훅 몰아쉬었다.

“음.”

과연 꼭 강해져서 돌아오겠다는 말이 마냥 빈말은 아니었는지, 반년 만에 본 놈은 꽤 그럴싸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그새 덩치도 한층 커진데다가 전에 없던 흉터들도 온몸에 덕지덕지 붙이고 온 것이, 녀석도 적잖이 구르다 온 모양이었다.

“뭐야, 저 녀석 발라크 아니야?”

“발라크라면… 최근에 힘 좀 쓴다던 놈들을 하나씩 찾아가서 때려눕히고 다녔다는 그놈인가?”

“듣자하니 저번에 사천왕 중 한 명이 애지중지하던 제자도 아주 묵사발을 내버렸다는 거 같던데.”

“저 어린놈이 그렇게 강하단 말이야? 흐흐, 이거 한 번 붙어보고 싶은데….”

거기에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그를 한눈에 알아보는 것을 보아하니, 확실히 많이 강해지긴 강해진 것 같았다.

“제법 쓸 만해졌구나.”

“흐흐. 한 번 직접 확인해보시겠습니까?”

“…여기서 말이냐?”

나는 천천히 바닥에 짐을 내려놓으며 주먹을 쥐는 녀석을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뭐야, 싸움인가?”

“싸움이라고? 어디? 마침 기다리느라 심심했는데 잘됐구만!”

…하긴, 반년이나 못 봤으면 슬슬 흡혈로 새겨진 공포를 잊을 때도 됐나.

“그래, 좋다. 어디 한 번 덤벼봐라.”

뭐, 출발하기 전에 다시 기강을 잡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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