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50화 (50/200)

제50화

“앉아라.”

마룡왕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나를 보고선, 탁자 앞에 놓인 의자를 향해 턱짓했다.

곧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천천히 내 건너편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잠깐 사이에 꽤나 기특한 일을 벌였더군.”

“귀찮은 건 미리미리 치워놓자는 주의라서 말입니다.”

“…훌륭하군.”

“과찬이십니다.”

나는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를 향해 덤덤히 대답을 마치고선, 가만히 어깨를 으쓱였다.

“그만한 일을 해줬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지. 그래, 무얼 원하나. 표면적으로는 자네 가문 내에서의 일이니만큼 저번처럼 공개적으로 훈장을 내려줄 수는 없겠지만, 마왕이 아닌 용족 카르카쉬 레비아탄으로서 들어줄 수 있는 일이라면 괜찮겠지.”

…마왕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포상이라.

애매하군.

그 말은 적어도 부대와 관련된 포상은 내려줄 수 없다는 거겠지.

가능하면 독립부대의 권한을 더 보장해줬으면 했는데.

이를테면 상급 부대의 소집명령이 떨어지더라도 굳이 그에 응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음….”

생각해보니까 아주 불가능한 얘기도 아니었다.

같은 마왕군이기는 해도 유독 명령을 안 들어먹기로 유명한 데가 하나 있었으니까.

사로잡은 포로를 멋대로 풀어줘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 오로지 강하기만 하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용서받는 최악의 부대.

“혹 지금 여기서 정하기 어렵다면, 출발하기 전에 어느 때나 찾아와서 얘기해도 좋다.”

나는 지그시 나를 바라보며 어서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마룡왕의 모습에, 곧 짧은 고민을 마치고서 답을 내놓았다.

“제 독립부대가 투마왕님의 휘하부대로 들어갈 수 있도록 힘써주십시오.”

“…음?”

그는 그런 내 부탁이 의외였는지, 잠시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뱀파이어인 자네를 악투스, 그놈의 휘하에 넣어달란 말이지.”

“따로 직책이나 물질적인 포상을 바라는 게 아니니, 그 정도는 가능하시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애초에 타종족의 부대로 넘어가는 것쯤이야 스카우터들을 통해 들어가는 아이들도 여럿 있으니,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고. 체르페슈, 그놈이 많이 서운해 하기는 하겠지만 딱히 큰 문제는 없겠지.”

다행히 분위기를 보아하니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인 것 같았다.

좋아, 이거면 됐어.

물론 따로 장비 같은 걸 챙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마음 놓고 독립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거였다.

그래야만 용사 시절 보고 들은 지식들을 활용해, 빌어먹을 연합 놈들을 더욱 거세게 몰아붙일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좋다. 원하는 대로 악투스 놈의 아래로 들어갈 수 있게끔 해주지. 녀석도 내심 바라고 있는 눈치였으니 거절하지는 않을 거다. 다만….”

“…예?”

“으음, 아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보도록.”

나는 끝에 무언가 꺼림칙한 부분을 남기고 나를 내보내는 마룡왕을 보며, 찝찝함과 함께 그의 집무실을 나섰다.

“어째 나를 보는 게 굉장히 안쓰러워하는 눈빛이었는데….”

…뭐 큰일은 아니겠지.

난 이내 걱정을 털어내며, 배정된 방을 향해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 * *

“…안타깝군. 굳이 사서 고생을 자처하다니.”

마왕은 금방 자리를 비운 젊은 뱀파이어를 떠올리며, 불쌍하다는 듯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자진해서 그 지독한 전투광의 아래로 들어가려하다니.

정신이 훼까닥 돌아버린 게 아니고서야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런 그의 성정을 아는 녀석이라고 해봐야 같은 세대를 거치고 자란 이들 중에서도 그와 부딪히고 살아남은 몇몇 뿐이니, 당연히 모르고 저지른 실수겠지만 말이다.

그는 고작 반년 만에 반푼이 딱지를 떼고서 혁혁한 공을 세워 돌아온 재능 있는 후학의 선택에 명복을 빌며, 탁상에 놓인 수정구를 어루만졌다.

“…악투스, 나다.”

-오! 카르카쉬, 네가 먼저 내게 연락을 다하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만. 간만에 몸이 근질근질해지기라도 한 건가?

수정구를 통해 집무실 안에 울려 퍼지는 걸걸한 목소리에,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마룡왕은 절로 좁혀진 미간을 꾹꾹 누르며, 빨리 이야기를 마치기 위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뱀파이어 꼬마가 네 아래로 들어가고 싶다더군.”

-뭐? 그게 정말이냐? 으하하! 녀석, 다른 음침한 흡혈귀들이랑은 달리 제법 강단이 있는 놈이었구만! 좋아. 지금 어디에 있나? 마침 전쟁준비다 뭐다 하는 것 때문에 뻐근하던 참이었는데 잘됐어.

또 시작이군.

그는 목소리만 들어도 꽤나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친우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무 험하게 굴리지는 마라. 재능이 있는 아이다. 지난 반년 만에 또 몰라보게 성장해왔더군. 전에 조금은 남아있었던 애송이 티도 그새 완전히 벗어던졌어. 죽지만 않는다면 언젠간 우리 옆에 설 수도 있을 거 같더군.”

-…그 정도냐? 네 입에서 재능이라는 단어가 나오다니, 이거 놀랍군. 쟈칼, 그 아이를 키울 때도 될 성싶다고만 했지 그 말은 나오지 않았던 거 같은데 말이야. 흐흐, 어쨌든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욱 기대가 되는구만!

…경고를 해준다는 게 그만 불을 지펴버리고 말았나.

마룡왕은 이 이상 무슨 말을 하더라도 들리지 않을 만큼 흥분한 친우의 모습에, 나지막이 고개를 저으며 수정구를 쓸어내렸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입 꼬리가 삐죽 솟은 입가로 웃음을 흘리며, 높게 쌓인 서류들 아래 홀로 빼놓은 종이를 들어올렸다.

“특이사항 없음이라….”

그는 쟈칼이 조사해온 에릭 가이오스의 정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지며, 다시금 펜을 들어올렸다.

“그 재능이 진짜란 말이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의심 가는 구석이나 행적은 보이지 않았다.

적당히 굴리면 조금은 믿고 맡겨도 되겠어.

마왕은 최근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자신의 딸을 떠올리며, 속으로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 * *

“여기가 식당이다. 4층부터 쓸 수 있다고 했으니, 에릭 너도 마음 편히 이곳에서 식사하면 된다.”

“음.”

마룡왕의 집무실에서 나와 잠시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나는, 저녁때가 돼서 찾아온 카렌을 따라 4층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이 스테이크도 한 번 먹어봐라. 우리 요리사들이 갈비찜도 물론 기가 막히지만, 대체적으로 고기요리는 다 잘하는 편이다.”

저번처럼 뷔페식으로 들어선 음식들을 둘러보며 접시를 조금씩 채워나가던 나는, 카렌의 추천을 따라 마지막으로 큼직한 고기 한 덩이를 올리고서 자리로 돌아왔다.

“어때, 괜찮나?”

“맛있군.”

“으흠. 맛있다니 다행이구나!”

확실히 용족이라고 하면 대식가.

특히 고기를 좋아한다는 이미지가 붙어있는 만큼, 무얼 집어오든 육류만큼은 확실히 훌륭한 맛을 내는 거 같았다.

질기지 않고 부드러운 육질에 한입 베어 물때마다 입 안 가득 흘러나오는 육즙.

거기에 코끝까지 가득 메우는 진하고 고소한 육향에, 먹는 내내 절로 입가에 웃음꽃이 필 정도였다.

“그보다 에릭, 아버지랑 일은 잘 마쳤나?”

“음. 덕분에 이번에 꾸릴 독립부대를 더욱 편하게 굴릴 수 있게 됐다.”

“그거 잘됐구나. 독립부대….”

아마 따로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자연스럽게 혈마왕의 아래로 들어가게 됐을 테지.

물론 그랬더라도 나름의 배려는 받을 수 있었겠지만, 결국 중요한 일이나 힘 대 힘으로 꽝 부딪혀야 되는 일이 있을 때는 본대에 합류해야했을 터.

하지만 발록들은 단순히 강하기만 하다면야 단독행동을 하더라도 크게 책잡지 않을 정도로 활동이 자유로운 편이니, 딱히 내가 무얼 해도 건드리지 않을 터였다.

“그… 에릭. 혹시 그 독립부대에 마법사도 구해놨나?”

“음? 아니, 아직 전부 공석이다.”

나는 카렌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큼지막한 고기 한 덩이를 전부 먹었더니 기름져진 입 안을 씻어내기 위해 옆에 준비된 음료를 따라 마셨다.

전에 이곳에서 헤어지기 전에 발라크가 강해져서 꼭 들어오겠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확정된 건 아니었으니 전부 공석이라 봐도 되겠지.

“그, 그런가! 후후. 그거 다행이로구나.”

다행이라.

난 내 대답에 화사한 미소를 띠며 눈에 띄게 좋아하는 그녀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참 표정에 숨김이 없군.

그 모습이 알기 쉬워서 웃기기도 하고 퍽 귀엽기도 했다.

마침 가만히 밥만 먹기도 심심한데 조금 놀려볼까.

“으음… 그래서 요새 좀 고민이다. 아무리 독립부대라고는 해도 부대는 부대인데, 혼자서 다닐 수는 없잖나. 누군가 들어올 사람을 구하긴 구해야 될 거 같은데 말이야.”

“그, 그렇지? 으흠.”

근심이 많은 목소리를 연기하며 슬쩍 미끼를 던지자, 아니나 다를까 곧장 입질이 왔다.

“뭐, 에릭 네가 원한다면 본녀가 특별히 들어가 줄 수도….”

“마음 같아선 카렌, 너를 데려가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건 힘들겠지. 마룡왕님의 혈육이니만큼 나보다 더 높은 곳에서 시작할 테니, 상사를 부하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잖나.”

“…뭣? 아, 아니다! 저번 정찰대 때도 그랬듯, 본녀는 특혜 없이 어디까지나 다른 병사과 똑같이….”

“그렇다 해도 독립부대로 활동하면 본대와 많이 떨어지게 되잖나. 그만큼 위험한 일이 많을 테니, 마룡왕께서 쉬이 허락하지 않으실 거다. 카렌, 네 입장에서도 본대를 따라다니며 안전한 곳에서 활약하는 편이 나을 테고.”

“그거라면 문제없다! 이미 아버지께 꼭 네 부대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졸라서 허락을… 헙!”

나는 말하다 말고 놀라서 제 입을 틀어막는 그녀의 모습에, 속으로 간신히 웃음을 참아내고선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음?”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어, 어쨌든 원한다면 그리로 들어갈 수 있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라.”

귀엽기는.

난 슬쩍 내 눈치를 살피다 대충 얼버무리는 녀석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콰앙-!

“으하하! 에릭 가이오스. 에릭 가이오스 어디 있나!”

그렇게 슬슬 카렌을 놀리는 것을 접고서,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던 찰나.

입구 쪽에서 일어난 소란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 악투스 님! 조금 진정하십시오! 굳이 이렇게 직접 나서지 않으셔도 조금만 기다리시면….”

…투마왕?

왜 갑자기 이곳에…

“오! 거기 있었군. 그래, 네가 내 아래로 들어오고 싶어 했다지?”

나는 뒤늦게 자신을 따라와 말리는 부하를 무시하고 내 앞에 선 덩치 큰 발록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뭔가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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