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과연. 이런 느낌이었나.”
나는 손바닥 위에 몽글몽글 떠오른 핏방울을 보며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혈마법.
악마족들의 가계 마법처럼, 오로지 뱀파이어들에게만 허락된 능력.
그중에서도 정말 소수의, 상당한 경지에 오른 자들만이 익힐 수 있다는 신묘한 기술.
“썩 나쁘지 않군.”
난 지난 숙부와 둘째의 처형 이후.
가문에 남아있던 온건파의 잔재들을 모두 숙청한 뒤, 그들의 계획을 밝혀내고 역적을 처단한 공으로 공작에게 하사받은 물건을 떠올렸다.
끈적거리는 시뻘건 액체가 들어있던 작은 플라스크.
수백 년 전, 우리 가문의 초대 가주이자 당대의 마왕이었던 자가 남긴 유산이라고 했던가.
[위대한 선조의 피를 섭취했습니다.]
[본디 지금의 능력으로는 닿을 수 없는 경지의 힘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부터 미숙하게나마 자신의 피를 조종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 안에 있던 액체를 마시자 떠올랐던 메시지를 되새기며, 씨익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직은 내 몸의 피를 손끝으로 뽑아내고 그를 날카롭게 다듬어 쏘아내는 것 정도가 한계였지만, 쓰면 쓸수록 점점 익숙해질 테니 상관없었다.
언젠간 과거 용사 시절 전장에서 봤던 것처럼, 정말로 마법이라 부를 수 있을 법한 기술들을 다룰 수 있게 될 테니까.
“에릭 도련님. 슬슬 시간입니다.”
“음. 벌써 그렇게 됐나.”
난 문밖에서 들려온 알프레드의 목소리에, 곧장 다루고 있던 피를 닦아내고서 준비를 마쳤다.
원래대로라면 나도 가문의 일원이니만큼 모두와 같이 떠나야 함이 맞겠지만, 먼저 가서 따로 받을 게 있는 터라 혼자 조금 더 일찍 마왕성으로 향하게 됐다.
가문에 반기를 든 숙부와 둘째를 처리한 포상은 받았지만, 주전파의 젊은 영웅으로서 온건파의 주축 중 하나를 무너트린 공은 아직 남아있었으니까.
“그럼 먼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
“그래, 고생하도록.”
“에릭 도련님, 저희들도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나는 저택 앞에 미리 준비되어있던 마차에 올라, 가족들과 기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도시를 떠났다.
중간계 침공까지 앞으로 보름.
난 곧 전장에서 마주치게 될 빌어먹을 연합 놈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전에도 전쟁 초기에는 마왕군이 파죽지세로 녀석들을 밀어버리고 있었다 했던가.
이번에는 그보다 더한 악몽을 맞이하게 될 거다.
그때 연합이 어디에서 어떻게 마왕군을 막아내고 전환점을 맞이했었는지, 내가 그들에게서 들어 전부 꿰차고 있었으니까.
* * *
“에릭 도련님, 슬슬 도착입니다.”
“음.”
나는 중간에 포탈까지 이용해가며 드디어 열흘 만에 도착한 마룡왕의 성을 보고선, 꾸벅꾸벅 몰려오던 피곤을 내쫓았다.
“정지. 실례지만 어디서 오신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 그 가이오스 가문의….”
“에릭 가이오스다.”
난 벌써부터 간간히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 인원들을 확인하고 있는 경비를 보며,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에릭… 에릭 가이오스? 아! 죄,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그, 가져오신 짐은….”
“음. 마차 안에 있으니 좀 부탁하겠네.”
“예, 알겠습니다! 그럼 곧 배정되신 방에 전부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거기! 멍하니 있지 말고 빨리 와서 도와!”
나는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사람을 부르는 그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전에는 어딜 가든 반푼이라며 무시당하기 일쑤였는데.
주전파의 높으신 분들이 그렇게 나를 밀어주려고 애쓴 효과가 슬슬 나타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고, 곧장 지내실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난 잔뜩 긴장한 채로 나를 안내하는 앳된 시종을 보며,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생각보다 위로 많이 올라가는군. 전에 하루 묵었을 때는 이렇게 높지 않았던 거 같은데 말이야.”
“예, 예? 그, 그게….”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딱히 무얼 탓하려는 게 아니니까. 그냥 좀 궁금해서 그러네.”
“아… 예! 제, 제가 듣기로는 군에서 맡게 되실 직책이 높으실수록 위층에 있는 방을 배정해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음, 그렇군.”
나는 그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어느덧 앞에 멈춰선 방을 바라봤다.
5층이라.
이 마왕성이 10층까지 있는 걸 생각해보면, 첫 시작으로는 썩 나쁘지 않은 거 같았다.
설마하니 모든 층에 다 객실이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편히 쉬십시오!”
“그래, 고생하도록.”
나는 안내를 마치고서 다시 아래로 뛰어 내려가는 시종을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침대에 몸을 뉘였다.
푹신하군.
분명 도착하면 금방 사람을 보낼 테니 그동안 방에서 편히 쉬고 있으랬지.
난 내 공을 치하하기 위해 마왕성으로 부른 편지에 적혀있던 내용을 떠올리며, 슬며시 눈을 감고 잠시 기다렸다.
똑똑-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중간에 짐을 가지고 올라온 시종들이 한 차례 방을 정리하고 나간 후, 노곤함에 막 잠이 쏟아지려고 할 때쯤.
귀를 간질이는 노크 소리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끼익-
“오랜만이구나, 에릭.”
“…카렌?”
나는 당연히 집사나 마룡왕의 오른팔인 쟈칼이 올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간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에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공주님께서 이리 직접 맞으러 오실 줄이야.
“후후. 뭘 그리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나. 빨리 따라와라. 아버지께서 부르신다.”
전에는 어디까지나 같은 정찰대원의 입장으로만 만나서 몰랐는데, 평소에는 이런 옷을 입고 다니는 건가.
주렁주렁하게 달린 화려한 장식은 없지만, 척 보기에도 기품이 묻어나오는 고풍스러운 드레스.
드러난 목선과 얇은 팔목에 걸린, 꽤 값이 나가 보이는 장신구까지.
누가 마왕의 딸 아니랄까 봐 한껏 차려입은 모습이, 평소와 달리 퍽 눈길을 끌었다.
“음.”
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려 위층으로 향하는 그녀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척 보기에도 풍기는 모양새가 제법 날카로워진 것이, 녀석 또한 반년 동안 마냥 놀고먹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간 꽤 노력 좀 한 모양이군. 겉으로 흘러나오는 마력이 많이 짙어졌어.”
“음! 지난 공적으로 아버지께서 드디어 본녀를 어느 정도 인정해주셔서 말이다. 덕분에 조금이지만 직접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다.”
“과연. 그럼 이제 잘못 떨어지더라도 다시 인간에게 노예로 붙잡히는 일은… 읍.”
“뭐, 뭣! 그게 무슨 소리냐! 조용히, 조용히 해라!”
나는 추억의 이야기에 깜짝 놀라 다급히 손을 뻗어 내 입을 틀어막는 카렌을 보며, 속으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놀리는 맛이 있는 건 여전하구만.
“그, 그건 비밀로 해달라고 하지 않았더냐!”
난 이윽고 슬쩍 눈치를 살피고선 조용히 귓가에 얘기를 속삭이는 그녀를 보며, 가만히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딱히 그런 적은 없었던 거 같군.”
“그럼 이제부터라도 비밀이다! 그, 그런 추태가 혹여 아버지의 귀에 들어갔다간… 으, 그것만큼은 안 된다. 분명 본녀에게 많이 실망하실 거란 말이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미 돌아온 그날 아이시스가 다 보고해버린 거 같던데.
하지만 나는 굳이 이 말을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러기엔 지금 부끄러워하고 있는 그녀의 반응이 워낙 재미있었으니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그래, 앞으로 그 일은 비밀로 하도록 하마.”
“후우… 고맙구나. 그, 혹시 무언가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봐라. 비밀을 지켜주는 답례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가능하면 꼭 들어주도록 하겠다.”
음? 원하는 거라…
마왕의 딸이 뭐든 부탁을 들어주겠다니.
이거 생각지도 않게 언젠가 한 번 써먹을 만한 패를 손에 넣은 거 같았다.
과연, 착하게 살면 복이 온다더니.
그게 바로 이런 건가.
“그보다 에릭. 너도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강해진 거 같구나. 특히 마력이, 전에는 이리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으흠!”
“…뭐?”
마력이 느껴진다고?
나는 말꼬리를 늘이다 살며시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하는 그녀를 보고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왜, 왜 그러나 에릭.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이상하군.
아무리 요즘 혈마법을 다루는 연습 때문에 항상 마력을 돌리고 다녔다고는 한들, 누군가 척 보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막 흘리고 다니지는 않았을 텐데.
마력에 민감한 마법사들을 대비해 그 잔재를 감추는 건, 기척을 지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적의 기본 중 기본특기였다.
하물며 용사 시절 마왕들의 눈마저 속이고 다녔던 나를 상대로 마력을 뚜렷하게 느꼈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는 건가.”
“에릭, 방금 뭐라고 했나? 소리가 너무 작아서 못 들었다.”
하긴 처음 그녀를 다시 봤을 때 느꼈던 반년간의 성장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만한 재능을 가졌다고 봐도 딱히 이상할 게 없었다.
게다가 전에도 노예사냥꾼들한테 꼼짝없이 붙잡힐 정도로 미숙했던 녀석이, 고작 몇 년 새에 미치광이 붉은 용이라 불리며 연합의 재앙이 됐던 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랬다.
“별 거 아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슬며시 상태창을 불러내 살펴봤다.
[에릭 가이오스]
[뱀파이어]
[레벨 : 47]
[힘 : 129] [민첩 : 125]
[체력 : 125][마력 : 83]
확실히 반년 전에 이곳을 떠났을 때랑 비교하면 말도 안 될 정도로 성장하긴 했다.
특히 마력은 그녀가 깜짝 놀랐을 만큼, 지난번에 비해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있었다.
저번에 숙부와 둘째를 위시로 한 온건파들을 모두 쳐낸 뒤,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이들의 시체를 조금 빼돌려 흡혈한 덕이었다.
“자, 그럼 이제 도착했으니 난 이만 내려가 보겠다.”
“음? 같이 들어가지 않는 거냐?”
“무얼. 본녀는 그저 너를 데려오라는 얘기만 들었을 뿐이다. 혹시 언제라도 나한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성에 있는 아무 시종을 잡아다가 내게 얘기를 전하도록 해라. 바쁘지만 않다면 곧장 도우러갈 테니 말이다.”
난 어느새 도착한 집무실 앞에 나를 두고 돌아가는 카렌을 보며,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른 시종들도 있을 텐데 굳이 공주님이 직접 데리러 오기에 꽤 한가한 줄 알았더니, 그런 건 또 아니었나 보군.
똑똑-
나는 곧 계단 아래로 사라진 카렌을 보고선, 고개를 돌려 문을 두드렸다.
“누군가.”
“에릭 가이오스입니다.”
“…들어와라.”
끼익-
난 금방 안쪽에서 들려온 허락에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과연 이번에는 또 어떤 포상을 내리려나.
나는 기대감에 가슴을 부풀리며, 천천히 탁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