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일단은 안에 있는 첫째를 잡는 게 우선이다! 굳이 무리해서 놈들을 상대하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 최대한 시간을 끄는 데 집중하도록!”
카앙-!
두 무리가 부딪히며, 쇳소리와 비명 그리고 사방으로 튀는 혈흔이 복도를 가득 메웠다.
“빨리 이곳을 정리하고 곧장 밖으로 나간 공작의 뒤를 치러간다! 구심점을 잃으면 저들도 결국… 컥!”
푹-
[난전 속에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기습으로 쓰러트렸습니다.]
[민첩이 ‘1’ 증가합니다.]
“이 역적 놈들이… 그간의 은혜도 모르고 감히 누구에게 칼을 겨누는 게냐!”
“닥쳐라! 먼저 선대 공작님을 배신하고 주전파에 들러붙은 간악한 무리들이, 지금 누가 누구보고 역적이라는 거냐!”
“이놈!”
서걱-
“아아악!”
시퍼런 검기를 두른 알바크의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숙부 쪽에 가담한 기사들의 사지가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런 그의 압도적인 무위와 활약에도, 흘러가는 전황은 썩 좋지 못했다.
알프레드에게 얘기를 듣고서 급하게 도착한 알바크가 이끌고 온 기사들의 수는 기껏해야 서른 명 남짓.
그마저도 위에서 공작을 따라 늑대인간들을 상대하러 나간 이들을 빼면, 채 열 명이 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사전에 어느 정도 준비를 마치고서 계획적으로 일을 벌인 녀석들의 수는, 자그마치 그 다섯 배.
“루이스, 어째서냐. 네가 이렇게 형제들의 피를 묻혀가면서까지 공작위에 오른다 한들, 가문의 어르신들과 식솔들에게 제대로 인정이나 받을 거 같으냐? 기껏해야 그 능구렁이 같은 숙부의 앞에서 허울만 좋은 광대 노릇이나 하게 될 뿐이다!”
“흐흐. 바로 그 허울만 좋은 광대 노릇이라도 좋다는 거다, 알렌! 단지 가문의 장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공작위를 눈앞에 두고 살아온 넌, 절대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거다!”
물론 모두가 기사는 아니고 대부분 병사들로 이루어진 터라, 단순히 놈들을 처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녀석들이 지금, 기껏해야 세 명의 호위를 끼고서 버티고 있는 첫째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거였다.
그나마 그 넷이 방 안에 들어가 있어 문을 사이에 두고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있었지만, 그것도 결국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루이스, 이 어리석은… 크윽!”
“도, 도련님!”
나는 기어코 우리가 길을 열기 전에 놈들에게 붙잡혀버린 첫째를 보고선, 나지막이 혀를 찼다.
하는 수 없나.
“이 역적 놈의 무리들이… 당장 알렌 도련님을 풀어주지 못할까!”
“멈춰라! 거기서 조금만 더 움직이면 곧장 이놈의 목을 베겠다.”
난 알렌의 목을 겨눈 칼날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기사들을 보며, 슬그머니 기척을 죽이고 걸음을 옮겼다.
“루이스 님, 이제 어떡하시겠습니까. 기사단장도 지금 처리해버릴까요?”
“아니. 그랬다간 녀석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우선 이대로 숙부님이 계신 곳으로 간다. 이놈이 붙잡힌 걸 알면 저쪽의 사기가 꺾일 테니, 바깥쪽도 금방 정리할 수 있을 테지.”
나는 알렌을 인질로 잡고서 천천히 돌아 밖으로 향하는 녀석들을 보며, 천장에 달라붙어 녀석을 붙잡고 있는 기사가 아래를 지나가길 기다렸다.
“좋아, 그대로 가만히 있어라. 오고 싶으면 상황이 다 끝난 뒤에나 움직이는 게 좋을 거다. 이 녀석의 목이 날아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크윽….”
좋아, 조금만 더 가까이.
난 거의 가까워진 녀석을 보고선 슬슬 단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다, 단장님! 차라리 지금 여기서 둘째라도 잡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놈들을 그냥 보냈다가는 정말로….”
“…그럴 수는 없다. 기사 된 자로서 함부로 모시는 분의 목숨을 걸고 그리 저울질할 수는 없는 노릇. 일단은 녀석들을 보낸 뒤에 곧장 뒤따라가서 다시 알렌 님을 구할 기회를 보는 게다.”
“무얼 그리들 속삭이는 거냐. 혹시라도 괜한 생각 품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아까 말했던 대로… 응? 뭐야, 그러고 보니 셋째 놈은 어디….”
탁-
“잡았다.”
나는 목표가 막 아래를 지나가는 순간 천장에 박아 넣고서 버티고 있던 단검을 빼내며, 녀석의 위로 뛰어들었다.
쩌억-!
“컥….”
시퍼런 검기를 품은 날이 투구를 뚫고 정수리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겹겹이 쌓인 포위망을 뚫고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기습으로 쓰러트렸습니다.]
[민첩이 ‘1’ 증가합니다.]
[레벨이 증가합니다.]
“…에릭?”
“오, 오오! 에릭 도련님!”
나는 맥없이 앞으로 쓰러지는 시체로부터 첫째를 빼내며, 곧장 녀석을 이끌고 알바크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제, 젠장! 잡아! 아니, 두 놈 다 죽여 버려!”
“…음. 알렌, 혼자서 나갈 수 있겠지?”
“그래. 헌데 에릭, 너 형한테 말투가….”
카앙-!
“이런 빌어먹을! 어떻게 거기서….”
“잔소리는 나중에 하고 어서 가라!”
난 사방에서 날아드는 칼날에 숨을 집어삼키며, 붙잡고 있던 첫째를 놓고 대신 검을 받아냈다.
“알바크!”
“알렌 도련님, 무사하십니까!”
“나는 괜찮다. 하지만 나 때문에 에릭이….”
서걱-
“아아아악! 파, 팔… 내 팔이!”
“부상자는 빠져! 제기랄… 이렇게 된 이상 셋째라도 여기서 처리한다!”
후웅-
나는 내 머리 위와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칼날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벌써 퇴로가 막혔나.
난 이윽고 첫째를 보내고서 다급히 공격을 피하느라 불안정한 자세로 땅을 짚은 나를 향해 내질러오는 병사들의 검을 보며, 입술을 꾹 물었다.
카앙-!
카가각-
“큿….”
“알렌 도련님, 일단 안전한 곳으로 피해계시지요. 다들 에릭 도련님을 구하고 곧장 공작님을 도우러 간다!”
“아니, 나도 돕겠다. 형이 돼서 꼴사납게 이대로 동생에게 도움만 받고 도망칠 수는 없지.”
서걱-
“아아아악!”
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녀석들 밖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아까 잘라서 떨어지는 팔을 주워들었다.
푹- 푸욱-
“어, 어어?
“이런 젠장! 검이….”
서걱-
주워든 팔로 한쪽에서 오는 공격을 모두 받아낸 나는, 묘기 같은 움직임을 부려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동시에 세 방향에서 잡아당기느라 쉬이 빠지지 않는 무기를 보고선 당황하는 녀석들의 목을 베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후욱, 후우….”
“어, 어떻게…?”
“괴, 괴물… 분명 저번에 수련장에 봤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 뭣들 하는 거야! 당장 저 반푼이를 잡아! 죽여 버리라고!”
나는 그 귀신같은 모습에 덜컥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질 치는 병사들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정도면 이쪽은 다 끝난 거 같군.
“젠장,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직접…”
“루이스 도련님.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거 같군요.”
“뭐, 뭣? 벌써… 이런 빌어먹을!”
난 녀석들이 내 쪽에 정신이 팔린 사이 금방 놈들을 정리하고 들어온 알바크를 보며, 달아오른 숨을 내쉬고 단검에 묻은 피를 털었다.
“에릭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음. 그보다 빨리 마저 마무리하고 아버지를 도우러 가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다들 이 간악한 역적무리들을 모두 처리하라!”
“으으….”
“히, 히익… 자, 잘못했….”
나는 알바크의 명령에 금방 겁에 질린 녀석들을 포박하고 상황을 정리하는 기사들을 보고선, 잠시 벽에 등을 기댄 채 창을 통해 밖을 내려다봤다.
생각보다 숙부가 불러들인 늑대인간들의 수준이 높은 모양인지, 아니면 일부가 아직도 잡히지 않은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빠진 탓인지.
난 예상보다 더 고전하고 있는 이쪽 병사들을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거 잘하면 여기서 레벨 좀 많이 올릴 수 있겠는데.
“도련님.”
“아, 끝났나? 빠르군. 그럼 바로 출발하지.”
나는 생각 외로 별다른 저항이 없었는지 금방 일을 끝내고 돌아온 알바크를 보고선, 곧장 저택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크으으… 에릭, 이 빌어먹을 반푼이 자식이!”
이윽고 난 뿌득뿌득 이를 갈며 뒤에서 나를 노려보는 루이스의 눈빛을 즐기며, 금방 저 앞에 보이기 시작한 역적무리를 향해 달려 나갔다.
* * *
“망할 반푼이 자식… 네놈만 아니었어도!”
나는 결국 반란에 실패하고 붙잡혀 처형대 위에 무릎 꿇은 숙부와 둘째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계획을 갈아엎고 급작스럽게 내란을 일으킨 것치고는 생각보다 분전한 그들이었지만, 둘째가 사로잡힌 것을 확인하자마자 빠르게 무너지고 말았다.
고용된 늑대인간들에게 무얼 약속했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이 그 모습을 보기가 무섭게 곧장 항복한 탓이었다.
아마도 원래 계획했던 대로 둘째가 공작위에 올라야만 받을 수 있었던 것인 거겠지.
“수고했다, 에릭. 알바크에게 네 공이 가장 크다고 들었다.”
“과찬이십니다.”
“이는 꼭 후한 보상을 내리도록 하마.”
난 공작의 치하를 받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후한 보상이라.
과연 얼마나 대단한 걸 내려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
마왕성에서 받았던 것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공작이니만큼 볼품없는 걸 내리지는 않을 터였다.
“카른.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나.”
“…흥. 제 아비와 형을 배신하고 공작위를 찬탈한 배신자에게 해줄 말은 없다.”
“그렇군. 그럼 이만 죽어라.”
서걱-
나는 공작이 휘두른 칼날에 힘없이 툭 떨어지는 숙부의 머리를 보며, 후련함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간 이놈을 쳐내겠다고 고생하며 묵은 체증이 한 번에 쑥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에릭. 받아라.”
“예?”
난 이후 옆에서 또 다른 칼을 건네는 공작을 보며,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본래대로라면 알렌이 해야 함이 맞겠지만, 너에게 맡기겠다고 하더구나. 이만 마무리하거라.”
“…알겠습니다.”
“크으… 에릭, 에릭! 이 씹어 죽일 반푼이 녀석!”
나는 건네받은 칼을 쥐고서, 천천히 머리 잃은 숙부의 시체 옆에 무릎 꿇은 루이스의 오른쪽에 섰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나?”
“이 빌어먹을 자식! 저주하마. 내 죽어서라도 꼭 네게 복수하리라!”
복수라.
그래, 복수 좋지.
“음. 응원하마.”
서걱-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쓰러트렸습니다.]
[힘이 ‘1’ 증가합니다.]
[민첩이 ‘1’ 증가합니다.]
[체력이 ‘1’ 증가합니다.]
[마력이 ‘1’ 증가합니다.]
[레벨이 증가합니다.]
난 떨어지는 둘째의 머리를 보며, 검에 묻은 피를 슥슥 닦고선 옆에 있던 기사에게 돌려주었다.
운이 좋다면 이 녀석도 나처럼 다른 몸으로 깨어나, 또 한 번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물론 그래 봐야 나한테 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