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허억, 헉….”
빌어먹을, 도대체 추적자가 몇이나 붙은 건지.
나는 끝없이 쫓아오던 기사들과 암살자들의 행렬을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째 놈들의 눈을 속이고 중간에 추적을 뿌리치기는 했지만, 덕분에 영지로 돌아오는 길을 크게 빙 돌아야만 했다.
“제길….”
더구나 그마저도 여정이 그리 순탄치 않았다.
도대체 사람을 얼마나 푼 건지, 온 마을 근처에 복면을 쓴 녀석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안전히 가문의 영지로 돌아오는 데만 자그마치 한 달을 날려야만 했다.
일직선으로 쭉 달리면 밤 새서 이틀 만에 닿을 수 있는 거리를 말이다.
“정지!”
하지만 그 고생도 오늘로 끝이었다.
결국 이렇게 저택이 있는 도시에 무사히 도착했으니까.
물론 이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모두 끝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대놓고 내 목을 노리지는 못할 터였다.
끽해봐야 사고를 가장해서 무언가 일을 치르려고 한다던가, 밤중에 몰래 내 방으로 암살자를 보내는 게 전부겠지.
어쨌거나 우리 가문은 숙부를 위시로 한 온건파보다는, 가능한 나를 지키려들 주전파의 입김이 더 강한 곳이었으니 말이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자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후드를 벗고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물건을 제시하도록.”
난 아직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앞을 가로막는 성문의 경비들을 보고선, 나지막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론 지금 내가 워낙에 거지꼴을 하고 있는 터라, 그들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한동안 계속 쫓겨 다니느라 한시도 제대로 쉬질 못해서 그런지, 한껏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 괜히 그런 거 같았다.
“아, 아! 에, 에릭 공자님!”
“죄, 죄송합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수고하도록.”
나는 혹시나 찍힌 건 아닐까 불안한 눈빛으로 이쪽을 살피는 그들을 뒤로하고, 곧장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 에릭 도련님! 돌아오셨습니까.”
“알프레드.”
금방 대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들을 지나 집사장을 마주친 나는, 무언가 전할 말이 있는 듯한 그를 보고선 잠시 자리에 멈춰 섰다.
“일전에 공작님이 도련님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집무실로 올라오시라 하셨었습니다.”
“…지금은 조금 피곤한데. 혹시 내가 나중에 따로 찾아봬도 괜찮겠나?”
“확실히 지금 차림새도 그렇고 얼굴에 피곤이 가득하시군요. 그럼 공작님께 한 번 그리 여쭤볼 테니, 우선은 욕탕부터 들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음. 부탁하지.”
첨벙-
“후….”
곧장 따뜻하게 덥혀진 탕에 들어간 나는, 녹아내리는 피로에 몸을 축 늘어트리며 욕탕 안까지 들고 들어온 서류뭉치를 살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눈을 감고 싶었지만, 그래도 이거까진 처리하고 들어가 쉬는 게 낫겠지.
[에릭 가이오스]
[뱀파이어]
[레벨 : 43]
[힘 : 122] [민첩 : 116][체력 : 118][마력 : 78]
난 자그마치 한 달 동안 씻지 못해 더러워진 몸을 닦으며, 슬쩍 상태창을 열어보고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나름 고생한 보람은 있군.”
한껏 몸을 담그고 있었더니 어느 정도 가신 피로에 정신을 차린 나는, 슬며시 몸을 일으켜 종이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아, 도련님. 공작님께서 원하신다면 나중에 보셔도 된다고….”
“아니, 됐다. 지금 가도록 하지.”
“예, 그러면 곧바로 모시겠습니다.”
난 마침 말을 전하기 위해 욕탕 앞에 와있던 알프레드를 보고선, 그와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공작님, 에릭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 오거라.”
끼익-
알프레드가 열어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선 나는, 탁자 앞에 놓인 의자를 당겨 앉고선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내려놓았다.
“생각보다 오래 자리를 비웠더구나. 덕분에 괜한 소문을 가라앉히느라 진땀을 흘렸다.”
“저쪽에서 도통 놓아주지 않으려고 해서 말입니다. 그래도 그만큼 확실한 걸 가져왔습니다.”
나는 그동안 추적을 피해 도망치며 간간히 읽었던 서류의 내용을 떠올렸다.
소집 날 거사를 치르기 위해 들여온 늑대인간들의 수.
그리고 기사단과 병사들 사이에 심어둔 인원들에 대한 정보.
마지막으로 결행 날 눈을 돌리기 위해 조금씩 들여놓은 물건들을 임시로 보관할 장소까지.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숙부와 둘째를 잡아다 목을 매달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한 증거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놀랍군. 설마 뒤에서 몰래 이런 일을 벌이고 있었을 줄이야. 알프레드!”
가만히 서류를 모두 읽은 그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장을 불렀다.
“여기 적힌 것들이 모두 사실인지 지금 당장 사람을 풀어 조사해오도록. 그리고 혹여나 놈들이 도망칠 수도 있으니, 알바크에게 그에 대한 대비도 해놓으라 전하도록.”
“예, 공작님.”
난 공작의 명에 곧장 방을 나서는 알프레드를 슬쩍 보고선, 다시금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지금 아예 성문을 닫아버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됐다. 아무리 네 덕에 계획이 다 탄로 났다고는 해도, 저들이 그리 쉽게 포기하고 도망치지는 않을 거다. 여기 적혀있는 대로라면 이미 많이도 넘어갔어. 기사단에 숨어든 녀석들하고 도시에 들어온 늑대인간 용병들을 합치면, 당장에 들고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 온전히 가문을 먹어치우기 위해 때를 노리고 너희들을 처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지, 수틀리면 지금이라도 칼을 빼어 들려고 들 거다.”
나는 우려스러운 말투로 조심스레 입을 여는 그를 보고선,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이미 아까 성문을 지난 순간부터 숙부 또한 내가 멀쩡히 살아서 들어왔다는 걸 전해 들었을 테니, 그들 또한 지금 대책을 세우고 있을 터.
공작의 말마따나 어차피 여기 적힌 대로 일을 벌이기 위한 준비는 진즉에 끝마쳐놓은 상태니, 명분을 잃고 주변에 욕을 좀 먹더라도 억지로 가문을 먹어치우려고 들지도 몰랐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 봐야 허무하게 목이 날아갈 뿐일 테니까.
콰앙-!
“고, 공작님! 어서 피신하십시오! 카른, 카른이… 아아악!”
아니나 다를까.
아무래도 저쪽에서 먼저 선수를 친 모양이었다.
숙부가 온건파 내에서도 그리 조심성이 깊기로 유명하다더니.
보아하니 이미 내가 아스모데우스 공작의 금고를 털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 순간부터, 내가 멀쩡히 살아서 이곳에 왔을 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를 마쳐놓은 모양이었다.
“쉬기는 글렀군.”
난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며, 공작과 함께 천천히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카발, 주전파에 형제와 아비를 팔아넘긴 배신자 녀석! 죽어라!”
“음.”
쩌억-!
“컥….”
문을 열기가 무섭게 검을 휘두르며 달려오던 병사의 머리가 찌그러지며 바닥을 굴렀다.
“정찰대에서 우수한 전공을 세웠다던 그 실력, 기대해도 괜찮겠지?”
“예, 아버지.”
나는 주먹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어느새 저택을 점거한 기사들을 향해 달려드는 공작을 보고선, 그의 반대편으로 뛰었다.
“여기 에릭이다! 셋째 공자도 살려서 보내지 마….”
서걱-
“시끄럽군. 피곤하니까 금방 끝내도록 하지.”
난 갑옷째로 상체가 잘려나가 피를 내뿜는 기사의 시체를 옆으로 치우며, 아직 득시글거리는 역적들을 바라보았다.
밖에서도 쇠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시커먼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아하니, 온건파가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어째 이기더라도 남는 게 있으려나 모르겠군.
“비록 대련이지만 수석기사들까지 몇 번 이겼던 녀석이다. 이전의 반푼이라 생각하지 말고, 다들 한꺼번에 덤벼라!”
“죽어!”
후웅-
나는 사방에서 날카롭게 날아드는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하나씩 천천히 급소를 노리며 단검을 휘둘렀다.
푹-
“컥….”
[자신보다 강한 상대들의 협공을 막아내고 역으로 쓰러트렸습니다.]
[민첩이 ‘1’ 증가합니다.]
[체력이 ‘1’ 증가합니다.]
[레벨이 증가합니다.]
난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신형과 함께 떠오르는 기분 좋은 메시지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또 둘러싸이기 전에 먼저 놈들을 향해 치고 나갔다.
“어, 어어?”
“다, 당황하지 마라! 오히려 안으로 들어와 준 만큼… 컥!”
[다수의 적을 상대로 압도적인 위용을 보이고 그들을 쓰러트렸습니다.]
[힘이 ‘1’ 증가합니다.]
[민첩이 ‘2’ 증가합니다.]
한 명, 두 명, 세 명.
1분 남짓도 되지 않는 시간에 자그마치 열이 넘는 적을 쓰러트린 나는, 잠시 벽에 붙어 숨을 고르며 아직도 한참 남은 적들을 바라보았다.
젠장, 많아도 너무 많군.
이럴 때마다 차라리 도적이 아니라 마법을 배웠으면 어떨까 싶단 말이지.
“녀석이 지쳐있는 지금이 기회다! 빨리 달려들어!”
“칫….”
빌어먹을, 숨 돌릴 시간도 안 주는군.
나는 고작 5초도 쉬지 못하고 제 동료들의 시체를 밟으며 뛰어오는 놈들을 향해, 다시금 단검을 들어 올렸다.
카앙-!
“공작님! 에릭 도련님! 무사하십니까!”
“기, 기사단장? 이런 제길, 어떻게 벌써… 컥!”
하지만 다행히도 타이밍 좋게 아래쪽에서 들리는 알바크의 목소리에, 나는 더욱 힘껏 단검을 휘두르며 당황한 적들을 베어 나갔다.
“도련님!”
“난 괜찮아.”
“알바크. 이쪽은 됐으니 알렌을 찾아서 도와주도록. 그리고 나머지는 슬슬 치고 들어올 늑대인간들을 상대하러 간다!”
어떻게 이쪽은 잘 막았지만 바깥의 전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다만 알프레드가 그 짧은 새에 참 열심히도 돌아다닌 모양인지, 생각보다 기사들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에릭. 넌 알바크를 따라서 네 형을 도와주러 가거라.”
“예, 아버지.”
나는 공작의 명을 받고선, 벌써 저 멀리 계단을 타고 내려간 알바크를 뒤따라갔다.
“크윽… 조금만 더 버텨라! 어떻게든 지원이 올 때까지 알렌 도련님만큼은 지켜야 한다! 이 빌어먹을 놈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알렌 도련님!”
“알바크!”
“이런 젠장, 벌써 왔나! 다들 서둘러!”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째를 둘러싸고 검을 겨누고 있는 둘째 무리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