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흐응… 그럼 어디 얘기 좀 들어볼까?”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흥미로운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릴리아나를 보며, 속으로 조용히 웃음을 터트렸다.
자기 또한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은 주제에 애써 여유를 부리는 모습이, 퍽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꽤나 우스웠다.
뭣 모르는 초짜를 상대로는 이렇게 강짜를 부리는 것이 제 몫을 챙기는데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대강 그녀의 사정을 모두 파악하고 온 내 입장에선 그저 잡아먹어달라고 주둥이에 머리를 들이미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잡설은 집어치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네 어미, 아스모데우스 공작부인의 처소를 뒤지는데 조금 도움을 줬으면 좋겠군.”
하지만 굳이 시간을 들여서 주도권을 가져오려고 하지는 않았다.
방금 전에 마법사들이 저택을 나섰으니만큼, 화재가 모두 진압되고 소란이 잦아들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터였다.
여기서 그녀에게 조금은 몫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확실하게 증거를 찾고 무사히 몸을 빼낼 시간을 버는 게 우선이었다.
“어머… 취향 참 독특하네. 그런 성격 나쁜 아줌마한테 관심이 있었을 줄이야. 그런데 그런 걸 왜 같은 가문 사람인 나한테 부탁하는 걸까. 내가 여기서 홀라당 일러바치면 어쩌려고.”
“이미 다 알고 왔으니까 쓸데없이 재볼 생각하지 말도록. 위로 올라가고 싶은 거잖나. 온건파의 주축 중 하나인 가문에 남아선 결코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말이야.”
나는 천천히 다리를 꼬며 매혹적인 미소와 함께 날름 입술을 핥는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본 채로,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네 동아줄이 되어주마. 만족할 만큼 공적을 떼어주도록 하지. 제 가문을 배신하고 팔아넘기는 것만큼 출신을 뒤집을 수 있는 게 또 어디 있겠나. 원하던 대로, 오로지 네 실력만으로 가치를 증명하고 올라설 수 있을 거다.”
이미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확실시된 지금, 주전파가 권력을 쥐고 있는 상태에서 온건파인 가문의 손을 들어봐야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만일 일이 잘 풀려서 전세가 뒤엎어진다고 해도, 이미 가문에 미운털이 박힌 릴리아나의 입장에서 그 가운데에 서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음 같아선 가문이고 뭐고 당장이라도 빠져나가고 싶었겠지.
다만 그렇지 않아도 아슬아슬한 선을 밟고 있는데 여기서 자칫 또 일을 벌였다간 그때는 정말 목이 날아가고 말 테니, 여기서 얌전히 붙잡혀있었던 거리라.
“흐응… 그렇게 여자 뒤꽁무니나 캐고 다니는 남자는 별로 인기 없는데. 뭐, 좋아. 확실히 이건 튕기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인 제안이긴 하네.”
하지만 이만하면 충분히 걸어볼 만했다.
혹여나 내게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녀는 모르쇠로 나오면 되는 거였으니까.
그저 어떻게 공작부인의 처소를 털 수 있는지, 그 방법만 알려주면 끝이었다.
리스크는 적고 혹 성공한다면 얻을 수 있는 건 많았다.
나는 천천히 내가 내민 손을 맞잡는 그녀를 보며, 씨익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설마 나중에 가서 한입으로 두말할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명예는 무슨.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푼이로 땅을 기고 있었으면서.”
릴리아나는 내 대답에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슬쩍 나를 흘기며, 한숨을 푹 내쉬고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능구렁이 같은 아줌마 방을 뒤져보고 싶다고 했지? 무리야. 최근 얼마나 대단한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혹시라도 꼬리가 밟힐까 사람이 조심스러워져선 항상 호위를 다섯이나 끌고 다니고 있으니까. 저택을 나설 때나 손님을 맞을 때는 물론이고, 자러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 지금 밖이 조금 소란스럽기는 해도, 그 큰 엉덩이만큼이나 워낙에 발이 무거운 사람이라 그대로 방 안에 틀어박혀 있을 확률이 높아.”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젓는 그녀를 보고선, 꽤 난처한 상황에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설마하니 공작부인이나 되는 사람이 어중이떠중이들을 호위로 두고 있지는 않을 테고.
못해도 아까 숙소에서 봤던 놈들보다는 한 수 위겠지.
그런 녀석들이 다섯이나 착 달라붙어 있다니.
아무리 나라도 바깥의 소란이 다 수그러들기 전에 놈들을 정리하고 공작부인의 처소를 터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당신이 원하는 건 그 여자의 목이 아니라, 그 방에 숨기고 있을만한 무언가를 찾는 거잖아?”
“음, 그렇지.”
“그럼 애초에 털어야할 곳부터 틀렸어. 그 아줌마는 중요한 건 모두 다 금고에 박아 넣고 보관하고 있으니까. 어디서 누구한테 정보를 듣고 혼자 이렇게 몰래 들어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가문의 직계들밖에 모르는 이야기야. 나도 아주 어릴 때 한 번 본 게 전부고. 어때,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금고라.
하마터면 괜히 위험만 무릅쓰고 헛수고를 치를 뻔했군.
그나저나 괜찮은 건가.
가문의 직계들만 아는 얘기라면 무조건 자기도 의심을 살 수밖에 없을 텐데.
난 상당히 의외라는 표정으로 가만히 릴리아나를 바라보았다.
“그쪽에서 양보해준 만큼 이쪽도 성의를 다해야겠지. 우리가 어디 한 번 보고 말 사이는 아니잖아? 내 동아줄이 되어주려면 자주 마주쳐야 될 텐데 말이야.”
…썩 나쁘지 않군.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지어보이며,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서 그 금고는 어디 숨겨져 있는 거지?”
“공작의 집무실. 가장 위층에서 왼쪽 끝 방의 책장 뒤편에 숨겨져 있어. 지금이라면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그쪽 복도를 돌아다니는 경비 두 명을 빼고는 아무도 없을 거야. 그럼 행운을 빌게, 주전파의 젊은 영웅 씨.”
그래, 책장 뒤편이란 말이지.
난 그녀에게서 볼일을 마치고, 곧장 열려있는 창문을 통해 가장 꼭대기 층 창문으로 몸을 옮겼다.
왼쪽 끝 방이라.
달칵-
드르륵-
전에 부시종장의 방에 몰래 들어갔을 때처럼 잠금장치를 간단하게 박살낸 나는, 창문을 열고 집무실 안쪽으로 들어섰다.
“여긴가.”
곧바로 책장을 찾아 그 앞에 선 나는, 슬쩍 힘을 주어 옆으로 밀어봤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 그것을 보며 잠시 팔을 뻗어 옆에 있는 벽을 더듬었다.
“음. 찾았군.”
머지않아 중간에 미세하게 홈이 파여 있는 부분을 찾은 나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그 부분을 꾹 눌렀다.
드르르륵-
“…이런 빌어먹을.”
예상대로 버튼처럼 움푹 들어가며 책장이 옆으로 움직인 거까진 좋았건만, 도대체 왜 이런 장치에 기름칠을 안 해놓는 건지.
나는 책장이 바닥을 긁으면서 나는 요란한 소리에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방금 위쪽에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뭐가 긁히는 소리 같던데….”
다행히 같은 층에서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는 녀석들은 못들은 모양이었지만, 아래층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서둘러야할 거 같았다.
“이게 그 금고인가.”
나는 다이얼로 되어 있는 꽤 고전적인 방식의 금고를 보고선, 슬쩍 단검으로 잠금장치가 걸려있는 틈을 찔러 넣었다.
까앙-!
젠장, 억지로 부수는 건 힘들 거 같군.
굳이 하자면 아주 못할 건 없었지만, 그랬다가는 빼도 박도 못하게 흔적이 남을 터였다.
결국 직접 푸는 수밖에 없나.
드륵- 드르륵- 달칵.
난 금고에 귀를 대고 다이얼을 돌려가며 미세하게 다른 소리가 나는 부분을 찾았다.
과거 용사 시절에 도적으로 활동하면서 이런 것도 많이 따본 적이 있었기에 금고 문을 여는 거야 어려울 것도 없었지만, 문제는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여유롭지 않다는 거였다.
드르르륵- 달칵.
“좋아, 마지막 하나….”
“거기! 아까 이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혹시 못 들었나?”
“예? 그게 무슨….”
…큰일이군.
나는 기어코 아래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온 모양인지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더욱 분주히 손을 움직였다.
“아무래도 공작님의 집무실에서 난 소리 같은데….”
“집무실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이 시간에 안에 누가 있을 리가….”
드르륵-
“그러니까 더더욱 확인해봐야지! 혹시 누가 소란 통에 침입했을지도 모를 노릇이잖나!”
“그, 그게… 알겠습니다! 지금 확인해보겠습니다!”
터벅- 터벅-
난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식은땀을 흘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빌어먹을, 이 문만 연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닌데.
어쩔 수 없나.
흔적이 남더라도 일단은 열고 보는 수밖에.
쩌엉-!
하는 수 없이 마력을 끌어올려 금고의 문을 아예 반으로 갈라버린 나는, 곧장 안쪽을 뒤적이며 증거가 될 만한 물건을 찾았다.
한쪽에 가득 쌓인 금괴와 보석 그리고 무언가 중요해 보이는 문서들을 모아놓은 듯한 서류뭉치… 이거다.
틱-
“젠장….”
끼기기기긱-
나는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황급히 가능한 서류를 모두 챙기고서, 다시 벽에 있던 장치를 눌러 책장을 움직였다.
* * *
덜컥-!
“거, 거기 누구냐!”
저택의 꼭대기 층 복도를 지키고 서 있던 경비는, 막 집무실 앞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문 너머에서 들려온 소음에 칼을 빼 들었다.
“…아무도 없는데 말입니다?”
“으, 으응?”
단번에 문을 휙 열어젖히고선 조심스레 안으로 걸음을 옮긴 그는, 같이 경계를 서고 있던 막내의 말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뭐야, 정말 아무도 없잖아? 하지만 분명 아까 전에….”
“서, 선배님! 여기 이거 좀 보십쇼!”
“응?”
귀신이 곡할 상황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주변을 훑던 그는, 다급히 자신을 부르는 후임의 목소리에 곧장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이건….”
책장 앞에 떨어져 있는 둥그런 무언가.
경비는 뭔가 날카로운 것에 반듯하게 잘린 듯한 금속을 주워들며 눈살을 찌푸렸다.
끼이익-
“…이런 젠장.”
때마침 펄럭이는 커튼을 보며 불안한 마음에 그리로 다가간 그는, 재수 없게도 활짝 열리는 창문을 보고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침입자다! 침입자가 왔다 갔다!”
황급히 문밖으로 나선 그는 저택 전체에 이 사실을 알리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계속 내뱉었다.
하필이면 내가 경계를 서고 있을 때 이런 일이 터지다니.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니고 공작님의 집무실에…
꿀꺽-
아무래도 이번 일은 단순히 감봉으로 끝날 거 같지 않았다.
그는 제발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기를 빌며, 발에 불이 붙도록 저택을 뛰어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