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후….”
[뒷세계의 작은 공포, ‘바라테온 비스무트’를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힘이 ‘1’ 증가합니다.]
[민첩이 ‘3’ 증가합니다.]
[마력이 ‘1’ 증가합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방과 복도에 그득히 쌓인 시체를 훑은 나는, 금세 말라버린 새로운 시체를 바닥에 놓으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참 편리한 몸뚱이로군.”
난 내장이 밖으로 삐져나왔을 정도로 깊게 베인 자상이 그새 거의 다 아물어든 것을 보고선, 만족스러운 미소로 주변을 살폈다.
밤중에 덤벼든 열여덟을 포함해, 소란을 듣고 나온 다른 손님들까지 전부 서른이 넘는 시체가 이 허름한 건물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가만히 방에 있었더라면 잠든 새에 편하게 갈 수 있었을 텐데.
쏴아아-
피에 흠뻑 젖은 몸을 닦기 위해 잠시 욕실 안으로 들어온 나는, 방금 꽤 위험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에 들어온 그 다섯 명을 잡는 거야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능력치가 아직 많이 모자란 터라 순식간에 정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덕분에 싸움이 길어졌고, 같은 층에 있던 투숙객들이 깨서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일이 복잡해질 뻔했다.
그 빌어먹을 놈들.
반쯤 장난으로 다른 손님들이 깨니 마니 얘기하긴 했지만, 설마하니 정말로 아무런 대책도 없었을 줄이야.
물론 그들 딴에는 그 전에 충분히 나를 처리하고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걸 테지만, 설마하니 그 와중에 또 도망치지 않고 나를 노릴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에게 들켜서 소란이 일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져버렸을 텐데.
보는 눈이 있는 만큼 그 짧은 시간 만에 모든 흔적을 지우고 도망칠 수는 없을 테니, 분명 웬 뱀파이어와 복면 쓴 시체들에 대한 얘기가 나돌 터.
그렇게 되면 지금쯤 사라진 내 행방을 열심히 찾고 있을 가문에서, 그 소식을 듣고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헌데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망설임 없이 나를 처리하는 걸 우선으로 택했단 말이지.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저쪽에서 나를 더 위험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끼이익-
나는 어느덧 흉터 하나 남지 않은 매끈한 옆구리를 매만지며, 시체들 사이에서 피가 튀지 않은 멀쩡한 옷을 골라 갈아입었다.
만일 용사시절에 이만한 상처를 입었더라면, 꼼짝없이 며칠은 가만히 누워서 요양을 지냈어야 했을 텐데.
과연 흡혈귀.
대단한 회복력이었다.
콸콸콸-
곧 1층으로 내려와 주방에서 기름을 찾은 나는, 한쪽으로 모은 시체와 건물 전체에 골고루 뿌리고선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치익-
이윽고 기름통 근처에서 찾은 성냥을 긁어 불을 붙인 난, 젖은 바닥 위로 손가락을 튕겼다.
화륵-
“음. 잘 타는군.”
나는 금세 활활 타오르는 건물을 보며, 간밤에 무슨 일인가 모여든 인파 사이로 몸을 숨겼다.
와직-
“아니, 밤중에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대? 다들 무사히 밖으로 나왔대?”
“도대체 경비병들은 언제 오는 거야! 거기, 구경만 하지 말고 빨리 물 가져와, 얼른! 이러다 우리 집도 다 타겠어!”
난 일부러 빈민가 쪽에 자리를 잡은 덕에 소화가 늦는 불길을 보고선, 건물이 폭삭 주저앉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젠장, 왜 하필이면 내가 순찰을 도는 날에 이런 사건이 터지는 거야!”
“그만 투덜대고 빨리 어떻게든 진압해! 이러다 옆 건물에도 번지면 그땐 진짜 단순히 위쪽에 깨지는 걸로 안 끝날 테니까!”
…이거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르겠군.
나는 예상보다 훨씬 잡히지 않는 불길에 혼란에 빠진 도시를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으며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 정도면 저쪽도 마냥 구경만 하고 있지는 못할 테니, 잘하면 소란 통에 일을 끝낼 수 있을 거 같았다.
* * *
“음. 이거 참 귀찮게 됐군.”
금방 저택 앞에 도착해 저번에 넘었던 울타리 근처로 향한 나는, 그새 안쪽을 절묘하게 가리고 있던 넝쿨과 이파리가 정리된 것을 보고선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남긴 흔적이라고 해봐야, 부시종장의 방에 있던 창문의 잠금장치를 부순 것뿐이었는데.
그마저도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아 직접 창문을 여닫지 않는 한 몰랐을 텐데도, 어째 그걸 알고 이곳을 찾아 정리해버린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냥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누군가 몰래 침입할 구석을 다 없애버린 걸지도 몰랐다.
방금 전에 암살자들이 내가 머물고 있던 숙소를 찾아왔던 걸 생각해보면, 이들 또한 숙부에게 무어라 언질을 받았을 테니까.
“어디 보자….”
나는 어느새 더 크게 번졌는지 저 멀리 활활 타오르는 시뻘건 불길을 보고선, 슬쩍 저택 안쪽의 상황을 살폈다.
“도대체 경비병 놈들은 뭘 하는 거야!”
“거기 너, 빨리 마법사들을 깨워와! 빌어먹을… 밤중에 이게 무슨 소란이야!”
아무래도 상황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저택에 있는 인원들도 다들 일어나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뭐가 됐든 자기네들 영지에서 일어난 일이니만큼, 가만히 불이 꺼지기를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어지간한 소란이었다면 밖에 있는 경비병들에게 맡기고 누워있어도 괜찮았겠지만, 지금은 사태가 꽤나 심각하니만큼 저택을 지키는 인원들도 투입시키려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갑작스러운 상황에 우왕좌왕하고 있는 시종들과 기사들을 보아하니, 잘만하면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을 거 같았다.
문제는 저쪽도 당연히 이 소란 통에 내가 들어오리라는 걸 예상하고 있을 거라는 거였다.
가능하면 안쪽에서도 눈을 돌려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찾았다.”
그거야 당연히 진즉에 생각해둔 사람이 있었다.
나는 2층 가장 끝 방에서 창을 열고 무심한 얼굴로 주변을 내려다보고 있는 익숙한 얼굴을 보고선,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릴리아나 아스모데우스.
저번에 저택에서 부시종장이 남긴 쪽지를 찾은 후, 지난 이틀 동안 어쩌면 사건의 열쇠가 될 그녀에 대해 여러모로 조사해본 결과.
녀석 또한 이 몸뚱이의 옛 주인처럼 가문에서 천대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물론 그 이유가 능력이 없어서 가문뿐만 아니라, 보잘 것 없는 길가의 노숙자들에게마저도 무시 받던 이쪽과는 전혀 다르긴 했지만 말이다.
“무식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먼 훗날을 내다봤다고 해야 하는 건지.”
그녀가 아주 어릴 적부터 저택에서 시종으로 일하다 최근에 그만두었다던 사람의 말에 따르면, 날 때부터 승부욕과 출세욕이 남달랐다는 듯했다.
과거 마왕이었던 제 친할머니의 무용담을 듣고 자랐기 때문인지, 항상 자기도 커서 그녀와 같은 마왕이 될 거라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했던가.
그런 릴리아나가 보기엔 주전파가 모두 마왕의 자리를 먹은 현시점에서, 온건파인 가문의 뜻을 따라서는 위로 올라갈 수 없다 느낀 모양이었다.
때문에 훗날 자신의 출신이 제 출세에 발목을 붙잡는 일이 없도록, 어릴 적부터 일부러 가문의 눈 밖에 났다는 듯했다.
“결국 빠른 속도로 경쟁자들을 제치고 사천왕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어찌 보면 그게 옳은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더구나 이번에 전쟁을 벌이는 걸 막아야하는 온건파의 입장에서 녀석이 정찰대에 들어가 아주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와 버렸으니, 이젠 거의 감금되다시피 제 방에 갇혀 감시를 받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주전파의 눈에는 확실히 띄었을 테지만 말이다.
“저쪽 입장에서도 참 계륵이겠군. 마음 같아선 딸이고 뭐고 쳐내고 싶겠지만, 또 능력은 있으니 마냥 버리긴 또 아쉬웠겠지.”
다만 그런 만큼 잘 구슬릴 수 있다면 주전파의 눈을 속이고 그녀를 첩자로 써먹을 수도 있으니, 일단은 처리하지 않고 잠시 지켜보고 있다는 것 같았다.
하긴 아직까진 미숙하고 어린 서큐버스이니만큼, 시간을 들인다면 충분히 그들의 입맛대로 바꿔먹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였다.
실제로 그때도 어쩌면 성공해서, 실은 뒤에서 온건파의 첩자노릇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물론 그래 봐야 지금은 아닐 테지만 말이야.”
나는 씩 웃으며 저택 내부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조심스레 울타리를 넘었다.
주변에 가릴 게 없어 누군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면 들킬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직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밖이 많이 어두운 터라 유심히 살펴보고 있던 게 아닌 이상에야 그럴 일은 없었다.
“뭐? 그럼 거기다 그냥 물을 퍼서 부어버렸단 말이야? 이런 빌어먹을….”
“지금 그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마법사님! 어서 빨리 서두르시지요!”
“재촉하지 마! 지금 가고 있는 거 안 보여? 젠장, 못 배워먹은 빈민가 쓰레기들 같으니. 기름에 물을 뿌리면 어쩌자는 거야!”
난 피곤에 찌든 얼굴로 욕지거리를 마구 뱉어대며 저택을 나서는 마법사들을 지나쳐, 재빨리 화단 안쪽에 몸을 숨겼다.
그러고 슬쩍 온몸의 신경을 집중해 저택 안쪽을 분주히 지나다니고 있는 기척들을 살펴보니, 이제 슬슬 안쪽에 있던 인원들이 대부분 빠져나가고 없는 거 같았다.
파라락-
조금만 더 신중히 근처를 살피다 박쥐로 흩어진 나는, 2층에 창이 열려 있는 방을 향해 날아들었다.
“…응? 꺄… 읍!”
“쉿.”
턱을 괸 채로 창에 몸을 기대고 있던 릴리아나를 지나 그녀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나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는 녀석의 입을 틀어막고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하도록. 지금부터 너와 나 둘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얘기를 좀 나눠볼까 하니 말이야.”
그대로 천천히 그녀를 이끌고 문 앞으로 자리를 옮겨 바로 앞에 감시로 붙은 인원들이 지키고 서있는 걸 확인한 나는, 슬그머니 문을 잠그고서 다시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자, 그럼 슬슬 놓아줄 테니 괜한 소란을 일으키지는 말도록.”
“읍… 프하.”
나는 조용히 고개를 주억이는 그녀를 보며, 등 뒤에 대고 있던 단검을 회수하고선 천천히 입을 막은 손을 떼었다.
“…생각했던 거랑 달리 거칠고 야만적이네, 우리 반푼이 흡혈귀 씨는. 이런 밤중에 몰래 여자 혼자 있는 방에 숨어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그런 위험한 물건을 들이밀다니.”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지. 보다시피 시간이 많진 않아서 말이야.”
난 금방 어렴풋이 상황을 짐작하고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주도권을 가져가려고 하는 앙큼한 서큐버스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나름대로 머리 좀 굴릴 줄 아는 모양이군.
곧바로 조금이라도 더 제몫을 챙기려고 분위기를 잡는 모습이 조금 건방지긴 했지만, 오히려 좋았다.
멍청한 것보다는 이쪽이 더 거래하기 쉬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