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왔군.”
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있던 나는, 순간 뒷목이 싸하니 무언가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느낌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막 2층으로 올라온 놈이 여덟 명.
1층에서 기다리고 있는 녀석이 다섯.
바깥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놈이 넷… 아니, 다섯인가.
슥슥 주변을 둘러보며 인기척을 살핀 나는, 슬그머니 허벅지에서 단검을 빼어 들었다.
딴에는 기척을 지운다고 지운 것 같았지만, 용사 시절 마왕군과의 전장에서 적진 한가운데로 기어들어가 요인들의 암살을 지내며 수년을 굴렀던 내 기감을 속일 수는 없었다.
마룻바닥이 미세하게 떨리는 소리.
조심스럽게 품에서 날붙이를 꺼내들 때 옷깃에 슬쩍 스치는 소리.
그리고 저들을 목표인 나를 코앞에 두고 고양된 감정에, 몇몇 미숙한 이들이 내비치는 살기.
턱-
나는 문고리에 손을 올리는 그 작은 소리에 훌쩍 뛰어올라 천장 위에 몸을 붙이고선, 곧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끼이익-
한 명, 두 명, 세 명.
조금씩 거리를 두고서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온 놈들은, 시퍼렇게 번뜩이는 날붙이를 손에 쥐고서 이리저리 안쪽을 둘러보았다.
사락-
커튼 사이로 살짝 비치는 달빛을 통해 침대 위에 불룩 튀어나와 있는 이불 안쪽을 슥 살피던 녀석들은, 망설임 없이 그 앞으로 다가가 날붙이를 들어 올렸다.
푹-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기습으로 쓰러트렸습니다.]
[민첩이 ‘1’ 증가합니다.]
[레벨이 증가합니다.]
끝내 내 기척을 잡지 못한 놈들이 사람 비스무리한 형상으로 뭉쳐놓은 이불에 무기를 막 내리찍은 찰나.
나는 천장에서 내려오며, 이제 막 문을 지나고 있던 녀석의 정수리에 깊숙이 단검을 박아주었다.
“이, 당했….”
이윽고 문밖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다 맥없이 쓰러지는 동료를 보고선 입을 여는 놈을 향해, 곧장 단검을 뽑아내고선 가까이 붙어 짧게 휘둘렀다.
촤악-
“컥….”
나를 발견하자마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무기를 휘두른 건 좋았지만, 아쉽게도 내가 놈에게 딱 달라붙는 바람에 녀석의 공격은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이 자식, 어떻게!”
“쉿.”
난 가슴이 반으로 쩍 갈라져 뒤로 쓰러지는 제 일행을 보고선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놈을 향해, 곧바로 단검을 집어던졌다.
쩌억-
“켁….”
이걸로 복도에 남아있던 세 명은 모두 정리했고, 남은 건 열다섯 명인가.
정말 징글징글하게도 많이 몰려왔군.
푹푹- 푹-
나는 아까 정수리를 찍어버린 시체를 들어 올려 방 안에서 날아오는 암기를 막아내고선, 아까 큰소리를 내던 녀석의 미간에 박힌 단검을 뽑았다.
확실히 무기가 좋긴 좋군.
아까 천장에서 뛰어내렸을 때도 그렇고, 두개골을 마치 종잇장마냥 가볍게 뚫고 들어가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괜히 전대 마왕이 애용하던 게 아니라는 건가.
타닥- 탁-
아까 그놈이 내뱉은 소리 때문인지, 1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녀석들이 잽싸게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돌겠군.
이젠 뭐 일반인한테 들키든 말든 상관없다는 건가.
아니면 혹여나 들키더라도 여기서 나를 살려 보내는 것보단 나으리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래, 좋아. 그쪽이 그렇게 나서준다면 나야 고맙지.”
괜히 어쭙잖게 도중에 한둘이 살아서 도망치느니, 아예 놈들이 저들의 상관에게 무어라 보고할 수 없게끔 여기서 다 처리해버리는 편이 더 뒤탈이 없었다.
“뭣….”
나는 혹시라도 양옆으로 둘러싸이면 아무리 나라도 이런 모자란 몸뚱이로는 조금 위험해질 수 있으니, 1층에 있던 녀석들이 올라오기 전에 재빨리 방 안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쩌억-!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기습으로 쓰러트렸습니다.]
[민첩이 ‘1’ 증가합니다.]
그대로 막 방을 나오고 있던 녀석의 심장에 단검을 박아 넣은 나는, 곧장 양옆에서 휘둘러오는 검을 피해 몸을 숙였다.
후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붙이가 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단검을 뽑아 그대로 왼쪽에 있던 놈의 몸뚱이를 반으로 갈랐다.
쯔어억-
“이런 빌어먹을! 뭔 놈의 도련님이 이렇게….”
“쉿. 조용히 하라니까. 다른 손님들한테 민폐잖나.”
쏟아지는 핏물에 따뜻하게 몸을 적신 나는, 옆에서 터져 나온 욕지거리에 그리로 손을 털었다.
촤악-
“아악! 누, 눈이….”
어두컴컴해서 부릅뜨고 있던 눈에 피가 튄 녀석은, 질끈 눈을 감으며 반사적으로 소매를 들어 올렸다.
푹-
“커윽….”
그때를 놓치지 않고 놈의 팔을 붙잡은 나는, 그대로 녀석을 잡아당겨 방패로 삼아 암기를 막아냈다.
“이런 젠… 컥!”
[레벨이 증가합니다.]
이걸로 마지막 한 명.
당황하는 녀석에게 자신이 던졌던 암기를 뽑아 그대로 가슴팍에 꽂아준 나는, 겁에 질린 듯 몸을 벌벌 떨며 도망이라도 치려는지 창문 쪽에 가까이 붙은 놈을 바라보았다.
“아, 으… 서, 선배님들이 순식간에… 히, 히이이….”
아무래도 처음 들어왔던 여덟 중에 가장 신참이었는지, 쪽도 못 쓰고 시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구는 녀석들의 모습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히익! 오, 오지… 컥, 커억…”
“거 조용히 하라는데 왜 이리 말을 안 들을까. 암살자가 그렇게 입이 가벼워서야 되겠어?”
떨리는 칼끝을 지나 그대로 놈의 목을 움켜쥔 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켁, 켁… 크, 으으….”
툭-
“쯧.”
완전히 쪽 빨려 금세 말라붙은 녀석의 시체를 옆으로 휙 던진 나는, 눈앞에 떠오르지 않는 메시지에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쩐지 유독 미숙하더라니.
뭐 그래도 한 명쯤은 괜찮았다.
그전에 죽인 놈들 중에 분명 나보다 강하다고 떴던 녀석들이 있었으니까.
“괴물 같은 놈. 역시 추적조를 모두 없앤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건가.”
나는 1층에 있다 올라와 복도와 방 안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선 눈을 크게 뜨는 새로운 얼굴들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척 보기에도 여기 널브러진 놈들보다는 좀 더 강해 보이는 게, 간만에 능력치 좀 듬뿍 올릴 수 있을 거 같았다.
* * *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군.”
“아까 보니 1층에 대기시켜놓은 애들도 올라가는 거 같던데, 저희도 이만 가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도시 구석에 있는 허름한 여관을 둘러싸고서 말없이 위쪽을 지켜보고 있던 복면인들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오지 않는 인원들을 보며 초조한 듯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음….”
그들의 시선이 모인 곳에 선 남자는, 침음을 흘리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녀석이 도망칠 때를 대비해야 했기에, 모두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내가 직접 가보도록 하지. 2조 조장, 따라오도록.”
“예? 하, 하지만 조장님….”
그는 자연스레 따라나서려는 인원들에게 눈짓을 주어 그 자리에 두고선, 다른 한 명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상하군. 정말로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반푼이 취급을 당하던 그 철없는 도련님이 맞는 건가?”
“한 번에 하나씩. 전부 급소를 당했구만. 정찰대라더니, 어디 그런 곳에서 이렇게 깔끔하게 죽이는 법을 가르쳐줬을 리가 없는데.”
금방 계단을 타고 2층으로 들어선 둘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복도에 쓰러져있는 제 부하들을 보고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놈이 추적조를 따돌리고 오히려 역으로 사냥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설마하니 그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물론 녀석들이 어디 이름만 번지르르한 애송이들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놈들은 추적조.
남아있는 흔적을 쫓아 목표를 찾고, 대상의 동태를 살피며 윗선에 보고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게다가 당했다고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두세 명씩 찢어져서 각개격파를 당했던 거지, 조 전체가 한 번에 덤벼들었던 건 아니었다.
그에 반해 이쪽은 태생부터가 오로지 요인암살을 위해 구성된 조였다.
비록 전투능력은 기사들에 비해 조금 모자랄지 몰라도, 기척을 없애고 상대방의 급소에 날붙이를 꽂아 넣는 것만큼은 그 누구보다 자신 있는 인원들이 자그마치 열여덟이었다.
그런데 고작해야 귀족가의 도련님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다니…
끼이익-
남자는 반쯤 닫혀있는 문을 천천히 밀며, 허리춤의 단검을 손에 쥐었다.
카앙-!
“조금 많이 늦었군.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
그는 예상대로 안쪽에 발을 들이밀기가 무섭게 날아드는 서슬 퍼런 날붙이를 보며, 황급히 단검을 휘둘러 날을 맞대었다.
“…네놈.”
남자는 방 한쪽 구석에 그득히 쌓인 시체를 보고선 눈살을 팍 찌푸렸다.
하나같이 당장이라도 부스러질 듯 바짝 마른 것이, 아무래도 눈앞의 목표에게 피가 다 빨린 모양이었다.
삐이이익-!
옆에서 같이 그 모습을 발견한 다른 조장이 황급히 목에 매고 있던 호루라기를 불었다.
둘이서는 쉬이 녀석을 처리할 수 없으리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으… 뭐야, 시끄럽게. 누가 한밤중에….”
푹-
덕분에 다른 방에서 머물던 손님들이 잠에서 깨어 하나둘씩 무슨 일인가 살피러 나오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남에게 들키고 말고 하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이 보더라도 방금처럼 살인멸구를 해버리면 됐으니까.
타다닥-
그는 금세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세 부하를 보고선, 슬쩍 눈짓으로 명령을 내렸다.
절대 살려 보내서는 안 될 놈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쉬이 상대할 수 있는 녀석도 아니었다.
혹 은밀함을 잊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여기서 놈의 숨통을 끊어놓아야만 했다.
“이렇게 눈에 띄게 일을 벌일 거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우르르 몰려오지 그랬나. 다들 암살자 실격이야.”
그나마 다행인 건 녀석이 도망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다들 처리해.”
남자는 들고 있는 단검뿐만 아니라 품에서 슬쩍 암기를 꺼내 손에 쥐며, 부하들과 함께 목표에게 달려들었다.
그리 깔끔하게 부하들을 처리한 걸로 봐선 확실히 저리 자신 있어 할 만한 실력은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개 조원들이 당한 것뿐이었다.
각 조장의 칼날은, 그 마왕의 사천왕들을 지키고 서 있는 친위대들조차 쉬이 피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고 날카로웠다.
제아무리 한가락 하는 놈이라고는 한들, 두 조장과 그를 뒤받치는 세 조원의 암수를 빗겨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