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이쪽인가.”
환한 달이 떠오른 밤중에 저택을 둘러싼 울타리 앞에 도착한 나는, 정원사가 말한 대로 사각지대가 있는 곳을 향해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과연… 이 정도면 기척만 잘 숨겨도 충분히 들키지 않고 들어갈 수 있겠군.”
나는 마치 숙부가 전령을 기다리던 그 장소처럼 넝쿨과 이파리가 절묘하게 주변을 가리고 있는 곳을 보며, 조심스레 울타리를 넘었다.
부스럭-
슬쩍 넝쿨을 젖혀 고개를 내민 나는, 천천히 저택 주변을 살폈다.
주기적으로 바깥 순찰을 도는 병사가 여섯.
창을 통해 비치는 시종이 층마다 세 명씩.
혹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비를 서고 있을 녀석들까지 생각하면, 적어도 정문이나 뒷문을 통해 들어가는 건 힘들 거 같았다.
“…가장 꼭대기의 왼쪽 끝 방이라고 했던가.”
난 정원사 말고도 이 저택에서 일했다는 이들을 찾아가 돈을 지불하고 들었던 정보들을 떠올리며, 아스모데우스 가문의 사람이 숙부와 내통했다는 증거가 있을 만한 곳을 눈에 담았다.
가주의 집무실부터 침실 그리고 공작부인과 자제들의 방까지.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부시종장의 방을 살펴보기로 했다.
고용인들의 말에 따르면 아무래도 그녀가 예의 그 전령인 듯했으니까.
“후우….”
지금 내가 숨어있는 곳부터 저택 외벽까지.
순찰을 도는 병사들의 동선이 잠깐 비는 틈을 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터벅- 터벅-
나는 벽에 막 달라붙기가 무섭게 근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잠시 몸을 웅크리고선 기척을 숨겼다.
“하암… 피곤해 죽겠네. 앞으로 몇 바퀴 더 돌아야 교대지?”
“이제 다섯 바퀴 남았습니다!”
“뭐? 그럼 아직 반밖에 못 돌았단 말이야? 이러다 쓰러지겠네, 쓰러지겠어.”
난 피곤한지 입이 찢어지라 하품을 하며 옆을 지나가는 놈들을 보고선, 슬그머니 박쥐로 흩어져 위로 날아올랐다.
툭-
그대로 3층까지 올라온 나는, 굳게 닫힌 창문을 통해 슬며시 안쪽을 살폈다.
“…좋아, 듣던 대로군.”
과연 매달 말일뿐만 아니라 그냥 돌아와서 사흘마다 한 번씩 자리를 비운다는 얘기가 사실이었는지, 방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렇게 자주 어딘가로 보내야만, 왜 굳이 말일에만 그렇게 사라지는지 의심을 받을 일이 없겠지.
달칵-
금세 조잡한 잠금장치를 풀어내고 안으로 들어선 나는, 조심히 발을 움직여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평범하게 책상 위나 서랍부터 시작해, 침대 아래나 옷장 안쪽 그리고 창틀 깊숙한 곳까지.
구석구석을 살피며 증거가 될 만한 물건들을 찾던 난, 잡동사니가 가득 들어있는 상자를 뒤적이다 무언가 이질적인 감촉에 잠시 손을 멈췄다.
“이건…”
인형.
아래쪽에 솜을 넣고 꿰맨 자국이 선명한 인형을 몇 번 꾹꾹 눌러보던 나는, 이내 뭔가 잡히는 것 같은 느낌에 곧장 단검을 뽑아 들었다.
찌익-
그대로 인형을 살짝 뜯어 안쪽에 있던 솜을 빼낸 나는, 중간에 같이 집혀 딸려 나온 내용물을 보고선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찾았군.”
나는 무어라 빼곡하게 글씨가 적혀 있는 종이를 보며, 빠르게 글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으음.”
그녀 외에도 전령 노릇을 하던 전임자가 한둘이 아니었는지, 이 작은 종이엔 혹여나 버려질까 훗날을 대비해 적어놓은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놈들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언제 일을 치르려는 것인지.
또 누가 관련이 되어 있는지.
아마도 시종이 죽으면 그 유품을 가족에게 넘겨주는 걸 생각해, 미리 이렇게 대비책을 세워놓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놈들이 그렇게 비밀스러운 일에 써먹은 녀석의 유품을 과연 남들처럼 넘겨주기나 할까 싶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냥 준비는 해놓은 거겠지.
뭐 어쨌든 아주 의미 없는 짓은 아니었다.
결국 내가 이렇게 발견해버렸으니까.
그게 그녀에게 좋은 일일지는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음, 완벽하군.”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종이를 챙긴 나는, 곧바로 다시 솜을 채워놓고선 같은 상자 안에 들어있던 바늘과 실을 이용해 인형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가능한 본래 구멍이 나 있던 곳을 통해 꿰어, 혹시나 그 부분을 살펴보더라도 들킬 일이 없도록 치밀하게 말이다.
“헌데 좀 아쉽군. 이것만으로는 조금 모자란데.”
나는 내가 이곳에 들어왔었다는 흔적을 완벽히 지우기 위해 물건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종이에 적힌 내용을 정리하자면 참 간단했다.
전쟁을 위해 소집령이 떨어지는 날.
도시에 불을 지르고, 혼란한 틈을 타서 미리 심어놓은 늑대인간 자객들이 우리 형제들 모두를 노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첫째는 죽고, 둘째는 예정대로 급소를 피해 중상을 입는다.
간단명료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첫째만 사라진다면 다음 공작위는 자연스레 둘째가 차지하게 될 테니까.
거기에 둘째도 큰 부상을 입은 만큼, 세간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물론 아무리 급습한다고 한들 첫째와 그를 지키는 기사들이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기에 인력의 대부분을 그쪽에 붙인 터라 잘하면 나와 막내는 살아남을 수 있을 테지만, 그거야 따로 생각해놓은 방법이 있을 터.
나머지는 전쟁 중에 어떻게든 공작을 죽이기만 하면 끝이었다.
“놈들을 잡으려면 조금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한데….”
다만 고작 이것만으로는 숙부와 온건파들을 축출해낼 수 없었다.
그들의 계획을 망치고 첫째가 죽는 걸 막을 수는 있겠지만, 정작 일을 벌인 놈들이 입을 꾹 닫고 숙부가 모르쇠로 일관한다면 거기서 끝이었다.
늑대인간은 원래부터 뱀파이어와 철천지원수지간인 데다가, 애초에 다른 종족들과는 달리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그들끼리 자치권을 보장받고 있는 터라, 그쪽에서도 온전히 그 자객들에게만 책임을 지고 눈을 감아버릴 테니까.
물론 그것만 해도 그들에게 있어선 충분히 막대한 손해가 되겠지만, 내가 원하는 건 온건파의 거두인 녀석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거지 고작 놈들의 계획에 훼방을 놓는 게 아니었다.
“음.”
금방 뒷정리를 모두 마친 나는, 다시금 종이를 펼쳐 그곳에 적힌 이름들을 하나씩 살폈다.
아스모데우스 공작가의 현 가주와 공작부인 그리고 그들의 차녀까지.
전부 이 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놈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이 방주인을 전령으로 써먹은 사람은 바로 공작부인.
아무래도 결정적인 증거를 손에 넣기 위해선 그녀의 처소를 한 번 뒤져볼 필요가 있을 거 같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군.”
마음 같아선 곧장 찾아가고 싶었지만, 지금 이 시간에 공작부인의 방이 비어 있을 거 같진 않았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와 창을 닫은 뒤, 저택을 빠져나왔다.
한 번 나가면 보통 못해도 사흘은 자리를 비운다고 했던가.
겉으로 보기에 크게 티는 나지 않아도 잠금장치를 박살냈으니만큼, 녀석이 돌아오기 전에 일을 끝마쳐야 할 거 같았다.
난 종이에 적혀있는 글의 마지막에 들어있었던 글귀를 떠올리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겨 돌려받은 유품 속에서 이를 찾는다면, 부디 첫째 아가씨를 찾아가 이를 전해주세요라니. 그 아가씨한테 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발칙한 짓을 해놓은 건지 모르겠군.”
어쩐지 차녀에 대한 얘기는 있고 장녀에 대한 얘기는 없더라니.
아무래도 이 첫째 아가씨가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 도시 사람들이 그녀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는 다들 꺼려 했던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군.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가장 전쟁을 무산시키고 싶었던 온건파 가문의 자제가 정찰대에서 그리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왔으니, 그놈이 눈에 밟히지 않을 리가 있나.
“릴리아나 아스모데우스….”
난 처음 나를 고깝게 보던 그 콧대 높은 서큐버스를 떠올리며, 이만 잡아놨던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 * *
“허으… 사, 사려… 다, 다 마래느데… 어재, 어재허…”
“미안하군. 그놈이 우리가 뒤를 밟고 있다는 걸 눈치채면 안 돼서 말이야. 혹시 모르잖아. 네가 별말 않더라도 녀석이 네 표정을 보고서 뭔가 알아챌지. 내 윗사람이 워낙 확실한 걸 좋아하시거든.”
푹-
곳곳에 섬뜩한 고문도구들이 늘어서 있는 어두컴컴한 지하실 안.
복면을 쓴 남자는 축 늘어진 시체를 옆으로 치우며, 헝겊을 꺼내 도구에 묻은 피를 슥슥 닦았다.
끼익-
“일은 다 끝났나?”
“예. 후드를 쓰고 얼굴을 가린 남자가 그 집에 들어간 걸 봤답니다. 이놈 말고 다섯 명 모두 같은 얘기를 한 데다가, 다들 말하는 키가 비슷했으니 아마 그 셋째 놈이 확실하겠죠. 최근 들어 갑자기 실종된 인원들 중에 저택에서 일했던 시종들도 여럿 끼어있었다고 하니, 어쩌면 제법 많이 파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 상관에게 다가가, 그동안 알아낸 사실들을 보고했다.
본래대로라면 목표와 마주친 대상들을 잡아다 고문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이놈이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그들을 죄다 남들 몰래 잡아다가 죽여 버린 탓에 자세한 정보를 캐낼 수가 없었다.
그나마 행인들 중에 후드를 눌러쓰고 다니는 수상한 남자를 봤다는 놈들을 잡아다가, 녀석이 꽤 많은 사람들을 찾아가 무언가를 물어보려 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무래도 저택 쪽에도 조금 대비를 해놓는 편이 좋겠군. 설마하니 이런 일을 고작 그놈 혼자서 꾸미고 있을 리가 없으니.”
“확실히 그러는 편이 안전하겠죠. 그보다 그 녀석은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이미 처리하고 오신 겁니까?”
“아니, 아직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래도 놈이 어디 묵고 있는지 알아냈으니, 곧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거다. 그럼 이만 마님께 보고하러 가보도록.”
“예, 알겠습니다.”
남자의 상관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선 저택으로 향하는 제 부하를 보며, 동시에 계단을 내려오는 또 다른 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암살조 둘, 모두 모였습니다.”
“음. 그럼 바로 출발한다. 상대는 추적조 하나를 한 명 빼고 전부 잡아먹은 괴물이다. 절대 얕잡아보지 말고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실수란 없다.”
“존명.”
그는 자신의 앞에 부복하는 남자를 데리고서 지하실 밖으로 나와, 그 앞에 기다리고 있던 열여섯 명의 복면인들을 이끌고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꽉 찬 보름달이 붉게 빛나는 밤하늘 아래.
시커먼 그림자가 건물 지붕을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