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42화 (42/200)

제42화

“허윽, 큭….”

[단검술의 귀재, ‘세레이크 피델’을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민첩이 ‘1’증가합니다.]

나는 여덟 번째 되는 녀석의 시체를 치우며,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도시를 바라봤다.

“드디어 도착인가.”

저택을 벗어난 후로 한시도 쉬지 않고 꼬박 이틀을 달린 나는, 피곤함에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언덕 아래를 내려다봤다.

“저쪽도 지칠 대로 지친 모양이군.”

난 처음에 꽤 빠른 속도로 날아가던 것과는 달리, 이젠 날개를 축 늘어트린 채 힘겹게 한 발 한 발 떼고 있는 서큐버스를 보고선 손에 쥔 단검을 빙글 돌렸다.

이제 와서라도 녀석을 잡아 배후를 캐묻고 놈들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증인으로 써먹을 수도 있겠지만, 더 큰 걸 낚기 위해 조금만 더 참기로 했다.

조심스러운 숙부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아무리 둘 사이를 오가는 전령이더라도 정말 그들의 계획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정도라면 만에 하나 무언가 알고 있더라도, 나한테 잡힌 그 순간부터 작은 리스크를 감내하고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죽여 버리려고 들겠지.

그렇게 되면 조금 의심이야 사긴 하겠지만,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면 끝이었다.

그가 지금껏 공을 들여 쌓아온 탑은, 고작해야 그것에 무너질 정도로 부실하지 않았다.

그를 무너트리기 위해선 조금 더 결정적인 무언가가, 더욱 확실한 단서가 필요했다.

“놓치지 않으려면 나도 슬슬 들어가 봐야겠어.”

나는 녀석이 도시 안으로 들어가 인파에 섞이기 전에, 단검에 묻은 피를 닦고선 후드를 눌러쓰고 곧장 언덕을 내려갔다.

마음 같아선 성벽이라도 넘고 싶었지만, 날이 너무 밝아 그러진 못하고 남들과 똑같이 줄을 서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 또한 내 앞에 줄을 서서, 허무하게 놓칠 일은 없었다는 거였다.

“상태창.”

[에릭 가이오스]

[뱀파이어]

[레벨 : 31]

[힘 : 107] [민첩 : 100][체력 : 105][마력 : 66]

나는 한 칸 정도 떨어져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여덟 명을 흡혈하고 더 강해진 능력치를 살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 마력을 제외하고 전부 세 자릿수에 돌입했나.

“확인되셨습니다. 다음.”

난 어느새 검문을 마치고 안쪽으로 들어서는 서큐버스를 보며, 슬쩍 고개를 내밀어 녀석의 동선을 살폈다.

일단은 어디 잠깐이라도 둘러보는 것 없이 직진인가.

“다음.”

나는 이쪽으로 오라 손짓하는 꽤 커다란 덩치의 문지기를 보고선, 말없이 품에서 은화를 꺼내들었다.

“…통과.”

“음?”

난 무얼 하기도 전에 슥슥 내 모습을 살펴보더니 길을 열어주는 그를 보고선,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거기, 빨리 들어가십시오. 뒤에 줄이 많습니다.”

“아, 예.”

나는 안으로 들어가라 재촉하는 손짓에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며,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잠시 예의 문지기를 돌아보았다.

“…느낌이 영 안 좋은데.”

난 그새 다른 인원과 교대하여 자리를 비운 그를 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조금 서둘러야 될 거 같았다.

* * *

“이, 이… 전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죄, 죄송합니다!”

남자, 케레스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노성을 터트리는 상관을 보며 넙죽 엎드린 채 벌벌 몸을 떨었다.

“게다가 그놈이 서큐버스를 쫓아서 도시 안까지 들어갔다고? 빌어먹을… 그딴 애송이 하나 잡지 못해서 이게 무슨 사단이야!”

“수, 숙부님! 목소리가 너무 크십니다, 화를 조금 가라앉히십시오!”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이를 가는 카른의 모습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두려움에 당장이라도 터질 듯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무리 녀석이 전령을 따라 도시에 들어갔다 한들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멀리서 저택이나 바라보며 손톱이나 물어뜯고 있겠지요.”

“후우… 그래. 어차피 그놈 혼자 애써봐야 무얼 알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지. 게다가 그쪽도 바보는 아니니, 아예 가문 전체를 들쑤시지 않는 이상에야 꼬리가 잡힐 일도 없을 테지.”

케레스는 둘째의 만류에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는 상관을 보고선,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일 임무 실패의 책임을 물어 죽더라도, 시체는 건질 수 있을 거 같았다.

“오히려 지금이 기회이지 않겠습니까? 조금 더 본격적으로 밀어붙이시지요. 원래 소문이라는 건 당사자가 자리를 비웠을 때 더욱 빠르게 퍼지고 불어나는 법이니까요.”

“으음… 소문이라면 예의 그거 말인가?”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요새 녀석이 주변에 아무런 언질도 없이 갑자기 모습을 감춘 것에 대해 이래저래 얘기가 나오고 있으니, 알아서 그 공백을 소문으로 채워주지 않겠습니까? 이를테면 타 가문에 손을 빌리러 갔다던가.”

카른은 제 둘째 조카의 말에 흡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그 애송이가 돌아올 때쯤이면 이미 판은 키워질 대로 키워졌겠지. 뒤늦게 제가 나서서 소문을 일축시켜보려고 한들, 한 번 벌어진 판은 쉬이 닫히지 않는 법. 다만 카발… 그 망할 여우가 과연 녀석을 후계 경쟁에 끼워주느냐 마느냐가 문제로군.”

“가문의 어르신들께서 어느 정도 목소리를 모으면, 제아무리 아버지라 한들 언제까지고 버티실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그놈을 밀고 싶어 하는 이들의 눈치도 있을 텐데요.”

그래, 그만하면 충분히 놈을 압박할 수 있겠지.

혹시나 녀석이 그를 허락하지 않는다하더라도 이쪽은 전혀 손해 볼 게 없었다.

바라던 만큼 이득을 볼 수는 없겠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몇몇의 반감을 사게 될 테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보험을 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래, 기왕이면 녀석이 아예 돌아오지 못하도록 중간에 죽여 버리는 것도 괜찮겠지. 하는 김에 그 전령도 같이 묻어버리라고 그래.”

“예, 숙부님. 바로 여유인원들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녀석이 살아서 돌아오면 첫째와 둘이서 지지기반을 갈라먹게 되니 좋았고, 녀석이 죽으면 죽는 대로 본래 계획했던 것처럼 거사를 치를 수 있을 테니 딱히 손해 볼 게 없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거기 네놈.”

“예, 예!”

“티 나지 않게 방금 말한 그대로 소문을 퍼트릴 수 있도록.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무, 무슨 수를 써서든 꼭 완수해내겠습니다!”

케레스는 둘째의 계책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한껏 누그러진 카른을 보고선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장 돌아가서 시작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우렁찬 대답과 함께 곧장 창을 통해 방을 나선 그는, 곧바로 시종을 사이에 끼어 은근슬쩍 소문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니 글쎄 그러니까, 에릭 도련님께서 공작위에 관심을….”

이윽고 저택을 넘어 도시 전체에 소문이 퍼지기까지, 채 사흘을 넘기지 않았다.

* * *

“공작님, 항간에 떠돌고 있는 소문이 정녕 사실인지요?”

“에릭 도련님께서 공작위를 잇겠다고 하심이 정말입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리 갑자기 후계 경쟁에 눈독을 들이다뇨! 알렌 도련님하고 루이스 도련님과는 다르게….”

“그만! 다들 조용히들 하게.”

카발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최근 그놈의 셋째 이야기로 가문이 떠들썩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본래 이 정도까진 아니었거늘, 녀석이 갑작스레 자리를 비운 탓에 소문이 눈덩이처럼 빠르게 불어나버리고 말았다.

이러려고 그때 내게 그런 부탁을 맡겼단 말인가.

괘씸한 것 같으니라고.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당사자가 오면 내 직접 의견을 묻겠다고.”

“하지만 이제 곧 전쟁이 코앞이지 않습니까. 큰일을 앞에 두고 이리 계속 가문이 혼란해서는 안 될 일이옵니다. 공작님께서 후계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시니 만큼, 이번 일은 확실하게 답을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능글맞은 노인네가…

공작은 전부터 이 일로 계속 목소리를 높이는 가문의 일부 원로들을 보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마음 같아선 그 아이가 바란 대로 아주 못을 박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자칫 녀석에게 줄을 대보려던 이들의 반감을 살 수도 있었다.

가뜩이나 가문에 아직 쳐내지 못한 온건파들이 못난 동생을 중심으로 모여 골머리를 썩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까지 갈라져버린다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당사자가 돌아오면, 그때 직접 의견을 묻겠다고 했네.”

그렇기에 이 일은 무조건 에릭, 그 아이가 돌아와서 자기 입으로 끝을 내어야만 했다.

그동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오로지 터져 나오는 불만들을 억지로 잠재워가며 시간을 벌어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언제까지고 계속 미룰 수만은 없는 일.

카발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못난 자식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바랐다.

* * *

“아스모데우스 공작가라.”

나는 지난 사흘간 도시를 돌아다니며 얻은 정보들을 조합하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전대 가주가 전대 색욕의 마왕이었단 말이지….”

듣자하니 전대 혈마왕과 함께 카르카쉬에게 죽임을 당했다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빈 두 자리를 꿰찬 것이 체르페슈 블라드와 페르세 릴리스.

그리고 에멜에게 받았던 정보에 따르면, 그때 체르페슈를 도와 혈마왕의 자리에 올린 일등공신이 현 가이오스 공작.

바로 이 몸뚱이의 아비였다.

“처음엔 그저 타 종족을 끌어들여서라도 어떻게든 공작위를 차지해보려는 심산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탄탄한 연결고리가 있었군.”

본래 가이오스 공작가는 전대까지만 하더라도 온건파의 한 주축이었다는 듯했다.

거기에 후계도 카발이 아닌 그의 이복형. 그러니까 카른과 같은 어미를 둔, 내 또 다른 숙부가 맡고 있었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둘 다 전대 혈마왕을 도와 카르카쉬를 막기 위해 가문의 주축을 이끌고 나섰다 사망하고, 그 빈자리를 지금의 공작이 차지했다고 했던가.

한 마디로 아스모데우스 가문도 이 몸의 숙부도, 주전파의 주축 중 하나인 카르카쉬에게 패배해 많은 것을 잃은 온건파의 한 축이었다는 거였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보려는 하는 건가.”

카른은 본디 자신의 형이 이어받았어야 할 공작위를.

아스모데우스 가문은 먼저 그들을 올리고서, 후에 도움을 받아 다시금 색욕의 마왕의 자리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자, 그럼 이제 남은 건 놈들이 정확히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냐는 건데.

“좌측 울타리 끝 쪽에 사각지대가 있다고 했지.”

나는 최근까지 그 저택에서 일하다 나왔다던 정원사에게 금화 하나를 주고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슬슬 몸을 일으켰다.

단순히 들키지 않고 울타리를 넘는다고 끝이 아니니, 시간에 맞추려면 오늘부터 부지런히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