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드디어 오늘인가.”
혹시나 자리를 비우게 됐을 때 내가 공작위를 노린다는 소문이 돌 것을 대비해, 이 몸뚱이의 아비를 찾아가 미리 의사를 밝혀놓은 지도 어느덧 이틀이 지났다.
“과연… 나무와 넝쿨이 절묘하게 안쪽을 가리는군. 날만 어둡다면 누가 이 앞을 지나가더라도, 일부러 들여다보지 않는 한 들킬 일은 없겠어.”
나는 저택 구석에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와 붙은 자리를 살피며, 나지막이 감탄을 내뱉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라니.
확실히 에멜에게서 받은 정보대로, 이 저택 안에서 바깥의 누군가와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지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장소가 없을 거 같았다.
“분명 밤 열 시쯤이라 했던가.”
난 숙부가 매달 말일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항상 같은 시간에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다고 적혀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아마도 그때 이곳에서 저택 밖에 있는 온건파들과 접선을 하는 모양이었다.
“음.”
나는 근처에 적당히 숨어있을 곳이 있나 물색하기 위해, 슬쩍 저택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이번에 말이야… 아, 에릭 도련님! 오늘도 외출이십니까?”
“오늘 받기로 한 물건이 있어서 말이다.”
“예, 알겠습니다. 모쪼록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래, 수고하도록.”
난 군기가 바짝 든 경비병의 어깨를 고생한다고 툭툭 치며, 천천히 대문을 나섰다.
“허억… 가, 감사합니다!”
나는 작은 위로에도 감동한 듯한 표정으로 크게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확실히 알바크가 그때 혹시 모를 상황을 우려해 노파심에 참지 못하고 얘기를 꺼냈을 만큼, 내가 기사들과 그들 아래에 있는 병사들에게 많은 존경을 사긴 하는 모양이었다.
식솔들에게 전부 무시당하던 반푼이의 취급이 고작 두 달 만에 이렇게까지 변했으니, 나중을 생각하면 당연히 걱정이 앞설 만도 하지.
딸랑-
“어서 옵… 아! 고, 공자님 오셨습니까!”
난 우선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까지 조금 남아있는 시간을 이용해, 도시에서 가장 커다란 잡화점을 찾았다.
바닥을 뚫고 내려갔던 평판이 완전히 뒤집힌 건 비단 가문 내에서의 일만이 아니었다.
일전에 공작이 직접 나서 나를 인정했던 건 물론이고 마왕성에서의 일까지 소문이 퍼진 덕에, 나는 주전파가 바라던 대로 어느덧 젊은 영웅 취급을 받고 있었다.
물론 아직까진 어느 정도 의심의 눈초리가 섞여 있긴 했지만, 이것도 분명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차 나아질 것이 분명했다.
“저번에 말했던 건 어떻게 됐나.”
“물론 들여왔지 말입니다! 금방 가져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나는 부리나케 창고로 향하는 가게 주인을 보며, 고개를 푸는 척 슬쩍 가게 밖을 훑었다.
저택을 나온 순간부터 내 뒤에 따라붙은 놈이 넷.
전부 익숙한 얼굴인 것이, 처음 정보길드를 찾기 위해 나섰을 때부터 몰래 나를 찾던 그놈들이었다.
매번 저택을 나올 때마다 한결같이 곧장 뒤를 쫓는 것이, 이젠 아주 숨길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반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지 못한 변수였던 내 동선을 놓치는 것보단 이편이 더 리스크가 더 적다고 판단한 거겠지.
미행이야 여차하면 그저 내 안위를 걱정해서 몰래 호위를 붙인 거라 둘러대면 될 테고 말이다.
“참 어설프기 짝이 없군.”
난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저 멀리서 뚫어져라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놈들을 보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시선의 처리도 미숙하고, 따라붙을 때 기척을 숨기는 것도 불완전했다.
물론 나름대로 온건파의 거두 중 하나라는 녀석이 부리는 놈들이니만큼 실력이 썩 나쁜 건 아니었지만, 애초에 도적으로서 정보수집과 미행 그리고 요인암살의 임무가 주업이었던 내 눈을 피해갈 정도는 아니었다.
원한다면 언제든 녀석들의 감시망을 피해 달아날 수 있었다.
“헉, 허억… 여기 말씀하신 물건입니다, 공자님!”
나는 뭐가 그리 급한지 숨을 헐떡이며 금방 물건을 내온 주인장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그래도 뭐 빨라서 나쁠 건 없었다.
“어떻게… 물건은 마음에 드십니까?”
“음. 썩 나쁘지 않군.”
“헤헤…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서 가장 품질이 좋은 걸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무슨 약초를 이렇게 많이… 혹시 어디 아프신 곳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난 마계에서 흔히들 진통제로 많이 쓴다는 약초가 그득히 담긴 주머니를 챙겨 들며, 전에는 묻지도 않던 질문을 해오는 그의 얼굴을 잠시 말없이 지켜봤다.
숙부가 시켰나?
아니면 저기서 날 감시하고 있는 놈들이 그리 물으라 언질을 놓은 건가.
“아, 으… 그, 그게… 죄, 죄송합니다! 소인이 쓸데없는 질문을….”
나는 어딘가 싸늘한 내 반응에 덜컥 겁을 집어먹으며 고개를 숙여오는 가게 주인을 보고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니다. 요새 근육통이 심해서 말이야. 그럼 이만 가지.”
“아… 예, 예! 안녕히 가십시오!”
난 적당히 핑계를 대고선 가게를 빠져나왔다.
실제로 요즘 들어 수석기사들과 대련을 하면서 전보다 몸을 많이 쓰는 것은 사실이니, 이걸로 혹여나 이 사실을 숙부가 전해 듣는다 하더라도 딱히 크게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 터였다.
물론 정말로 근육통 때문에 이 많은 양의 약초를 사들인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흐음… 저쯤이 좋겠군.”
금방 일을 마치고 저택 앞으로 돌아온 나는, 아까 봐두려고 했던 곳을 둘러보며 적당히 숨을 만한 장소의 물색을 마치고선 천천히 대문을 지났다.
“돌아오셨습니까, 공자님!”
“음, 그래.”
난 아까 저택을 나올 때부터 지금까지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를 지나치고선, 슬쩍 눈을 돌려 저택 구석에 숨겨진 개구멍을 찾아 빙 돌아가는 미행조의 모습을 살폈다.
한 명이 모자란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내 예상대로 중간에 잡화점 주인에게로 향한 모양이었다.
이제 늘 그랬던 대로 지금 들어오는 세 명이 이어서 저택 내에서의 감시를 맡겠지.
아직 돌아오지 않는 한 놈은 그대로 숙부에게 내가 오늘 약초를 구했다는 사실을 알리러 갈 테고.
왜 굳이 시종을 부리지 않고 내가 직접 나갔다 왔는지에 대해선 조금 의심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줄 알고 지금껏 딱히 아무런 용무가 없어도 이틀에 한 번은 꼭 저택을 나서 도시 곳곳을 살피고 다녔으니, 아마 그냥 외출을 좋아하는 별종이라 생각하고 넘기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주기적으로 혼자 밖을 돌아다녔던 이유가 꼭 그거 하나 뿐은 아니었지만…
부스럭-
방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품에서 약초를 꺼내 살짝 짓이겼다.
“크흐… 냄새 한 번 고약하군.”
과연 듣던 대로 아주 조금만 즙을 냈을 뿐인데도 쓴내가 진동을 했다.
이거 때문에 굳이 의심을 살 걸 알면서도, 시종을 시키지 않고 내가 직접 밖을 나갔다 와야만 했다.
그만큼 진통효과가 좋은 약초였지만 단순한 근육통 정도야 다른 걸로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심부름을 시켜봐야 다른 약초를 사올 것이 뻔했으니까.
물론 그것도 결국 귀에 들어가기는 하겠지만, 내가 나가서 구해온 거랑 시종한테 굳이 꼭 이 약초를 사오라 시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후자는 척 보기에도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거 같지만, 전자는 그저 약초에 대해 무지한 도련님이 이게 가장 효과가 좋다는 말에 홀라당 넘어간 모습으로 비칠 수 있었으니까.
“좋아.”
이 정도면 추적이 붙었을 때 확실히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곧인가.”
나는 슬슬 해가 완전히 져서 어둑어둑해진 밤하늘을 보며, 곧 방을 나설 준비를 마쳤다.
여태껏 어딜 가든 미행이 따라붙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계속해서 홀로 밖을 쏘다녔던 또 하나의 이유.
지금 내게 붙인 인원만으로도 충분히 날 감시하는 것에 문제가 없으리라 숙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이젠 그들의 눈을 가릴 시간이었다.
* * *
끼익-
늦은 밤중.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온 나는, 망설임 없이 몸을 움직였다.
이 시간대에 저택을 돌아다니는 시종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이야 적당히 기척을 숨기고 그늘진 곳에 서 있기만 해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저긴가.”
그나마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조심성 많은 숙부가 집안에서까지 붙여놓은 감시조 셋.
“하암… 피곤해 죽겠네. 나참,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지.”
그마저도 이미 그간 살펴본 바로 어디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지나치며 무리는 없었다.
거기에 일부러 이 시간대엔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않은 터라, 아무런 이상이 없는 나날을 두 달이나 계속 겪은 그들은 꽤나 해이해진 상태였다.
“음.”
박쥐로 흩어져 사각지대를 찾아 그들의 감시망을 탈출한 나는, 곧장 개구멍을 찾아 저녁에 봐두었던 장소에 몸을 숨겼다.
부스럭-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난 넝쿨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내는 숙부를 보며, 빼꼼 고개를 내밀어 가만히 그쪽을 살폈다.
“…늦었군.”
나는 어딘가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여는 그의 모습에, 슬쩍 그리로 시선을 옮겼다.
“죄송합니다. 요새 전쟁 준비 때문에 어딜 가든 주전파의 경계가 삼엄해진 터라.”
…서큐버스?
난 무언가를 꺼내 울타리 틈새로 넣는 녀석을 보며,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나도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으니.”
나는 짤막한 만남을 마치고 곧장 자리를 뜨는 두 사람을 보고선, 슬쩍 숙부가 받은 물건을 살피다 서큐버스를 따라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아하니 이리 조심스레 하루 이틀 준비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만큼 계획하고 있는 일의 규모도 보통은 아닐 터.
“으음….”
난 빠르게 도시를 벗어나는 서큐버스를 보며, 적당히 거리를 두고선 그녀의 뒤를 쫓았다.
자세한 건 녀석을 따라가 보면 알 수 있겠지.
다행히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아, 어디서 누가 방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놓칠 일은 없을 거 같았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쉽게 당해줄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부스럭-
나는 품에서 약초를 꺼내 짓이기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