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금화 오백 개다. 모자라다면 조금은 더 얹어주도록 하지.”
“으응, 안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침이 꼴깍 넘어가며 목울대가 꿀렁거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나는 이미 눈앞에 보이는 금화에 반쯤 구슬려진 그녀를 보고선, 한껏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미안하지만 역시 안 되겠어. 무리야.”
“음?”
난 예상과 달리 안타까운 얼굴로 힘겹게 고개를 젓는 몽마를 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돈이 모자란가?”
“아니, 값은 충분해.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야. 모양새의 문제지.”
모양새의 문제라.
나는 알 수 없는 말에 침음을 흘리며, 그녀의 입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
“하아… 눈빛을 보아하니 그냥 돌아갈 생각은 없나 보네. 누나는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아이가 취향인데. 굳이 밖을 그렇게 들쑤시면서까지 여길 찾아와서 그 양반에 대한 정보를 찾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모양이니, 조금은 이유를 설명해줘도 괜찮겠지. 후후. 고맙게 생각해. 원래는 이런 것도 다 돈 받고 팔아야 하는 이야기니까.”
몽마는 슬며시 다리를 반대로 꼬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그 교태로운 몸짓에 이끌려 절로 내려가는 시선을 중간에 멈추며, 다시금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거 참 곤란하군.
능력이 너무 차이 나는 지라, 계속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버텨내기가 그리 쉽진 않았다.
원한다면 충분히 막아놓을 수 있을 텐데, 성격이 영 짓궂군.
“간단해. 주전파에서 밀어주는 젊은 영웅이 온건파 거두의 정보를 사간다? 미안하지만 고래 싸움에 새우등처럼 터져나가는 건 사양이야. 여기에 먹여 살려야 할 아이들이 몇인데, 어느 한쪽의 눈 밖에 날 수는 없지.”
…과연, 그런 이유였나.
나는 차마 무어라 꼬드기지도 못할 사정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럼 별 수 없나.
어쨌든 숙부에 대한 정보는 얻어야 하니, 이제부턴 설득이 아니라 적당히 협박을 하는 수밖에.
“뭐 별 것도 아닌 걸로 걱정을 하고 있었군.”
“…흐응? 설마 이렇게까지 설명해줬는데도 못 알아들은 거야? 아니면 설마… 공자님께선 우리들 사정이야 봐줄 필요도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으음….”
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다 끼칠 정도로 저릿한 살기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애써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이 지하도시에 대한 애정이 깊은 모양이군.
음지에서 살아가는 족속치고는 조금 의외긴 했지만, 나야 도리어 그편이 더 협박하기 좋으니 환영이었다.
“그게 아니지. 이미 내가 이곳에 온 순간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는 거다.”
나는 그녀의 눈앞에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이고선, 천천히 하나씩 접으며 얘기를 이어나갔다.
“그냥 이대로 나한테 정보를 팔던가, 아니면 거부하고 주전파의 눈 밖에 나던가.”
찌릿-
난 뻣뻣하게 굳은 몽마의 표정과 함께 갈수록 심해지는 살기에, 여차하면 바로 도망칠 수 있도록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녀도 바보는 아니니, 여기서 일을 벌이려 들지는 않을 터.
“후우….”
나는 곧 한숨을 푹 내쉬며 적의를 거두어드린 그녀를 보고선,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얌전하게 생겨서는, 보기보다 성깔 있네. 귀한 공자님이 호위도 없이 홀로 내 주둥이에 들어온 걸로도 모자라서, 이렇게 얄미운 협박까지 늘어놓다니.”
“칭찬 고맙군. 그럼 이제 알려줄 수 있나?”
“그래도 무리야. 말했잖아, 고래 싸움에 끼어드는 건 사양이라고. 애초에 정보의 신뢰도 하나로 먹고 사는 우리가 어느 한쪽에 붙는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빌어먹을 년, 고집하고는.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무리인가.
“뭐… 하지만 아주 못 해줄 건 없지.”
그렇게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른 방법을 고민하며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던 찰나.
떠나려는 내 발길을 붙잡는 조용한 목소리에 다시금 엉덩이를 붙였다.
“온건파의 거두에 대한 정보는 팔 수 없지만, 현 가이오스 공작의 이복동생인 카른 가이오스라는 마족에 대해서라면 문제 될 게 없지.”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슬쩍 내 눈치를 살피는 몽마의 모습에, 더 말해보라며 팔짱을 끼고선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물론 공자님이 원하는 그런 직접적인 정보는 없겠지만… 어때? 이 정도면 봐줄 수 있지 않을까?”
“음.”
확실히, 그것만 하더라도 지금 내 입장에선 감지덕지였다.
적어도 지금처럼 아무런 정보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물론 그 정도라면 나 혼자 움직여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것들뿐이겠지만, 그건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혹시라도 꼬리가 잡힐 위험이 있었다.
“일단 한 번 보도록 하지.”
“…저기, 이만하면 공자님도 한 번쯤은 양보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사지도 않은 정보를 먼저 보고 생각하겠다니.”
“걱정하지 마라. 마음에 들면 제값은 꼭 치를 테니.”
“칫.”
나는 말이 안 통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는 그녀를 보고선,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제값을 치르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곧 전쟁을 치르러 마계를 떠나기 전에, 언제 또 다시 이곳에 들를 일이 생길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정보상의 신뢰가 중요하듯, 그를 사는 손님 또한 약속을 지켜줘야 하는 법이었다.
“카브리드!”
“예, 부르셨습니까.”
“카른 가이오스에 대한 정보. 겉으로 드러나나 있는 걸로만 가져오도록 해.”
난 그녀의 명령에 누군가 문밖에서 빠르게 어딘가로 달려가는 소리를 듣고선, 그가 돌아올 때까지 잠시 방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끼익-
“여기 있습니다, 에멜 님.”
“좋아, 수고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임프는, 족히 수십 장은 되어 보이는 종이뭉치를 탁자에 두고서 다시 밖으로 물러났다.
“어디 마음껏 보도록 해. 아니, 돈을 받을 것도 없겠어. 그냥 그대로 가져가도 좋아.”
“음?”
곧바로 몇 장을 가져와 천천히 정보를 읽어 내려가던 나는, 시큰둥한 말투로 남은 종이를 전부 이쪽으로 내미는 에멜을 보고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이게 무슨 꿍꿍이지.
“대신 미래의 영웅한테 눈도장 좀 찍어놓는다고 생각할게. 설마하니 우리 공자님께서 이렇게 도와줬는데 나중에 모르는 척하지는 않겠지.”
“…아까 전엔 고래 싸움에 끼어드는 건 사양이라고 하지 않았나.”
“어머, 누가 거기 끼어들겠대? 이건 개인적인 투자지, 투자.”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다가와 앉는 그녀를 보고선, 말없이 들고 있던 걸 종이뭉치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에릭 가이오스. 정찰대의 영웅에 대한 투자 말이야.”
“…이만 가지.”
난 가까이 달라붙어 은근히 마력을 더 진하게 피워내는 에멜을 보고선, 재빨리 그녀에게 받은 선물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말대로 투자는 고맙게 받도록 하지. 넣은 게 적어서 과연 얼마나 배당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재미없긴.”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군.
나는 그 잠깐 사이에 몽롱해진 정신에 거칠게 고개를 털며, 그녀의 방을 나섰다.
“뭐, 나쁘진 않군.”
처음 생각했던 거랑은 달리 필요한 정보를 모두 얻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꽤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방금 잠깐 읽어본 결과, 겉으로 드러난 정보뿐이라고는 해도 다들 상당히 자세하게 적혀있었으니까.
이를테면 언제 누구를 만났는지, 그가 무슨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말이다.
* * *
“에멜 님, 그냥 보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흐응… 뭐, 상관없어. 말 그대로 정말 투자였으니까.”
에멜은 방을 치우러 들어온 카브리드의 물음에, 흥미로운 표정으로 에릭이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풋내기는커녕 뒷골목의 무뢰배들만 못하던 그 반푼이가, 고작 반년 새에 끝까지 내 매혹을 버텨낼 정도로 성장했단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자신이 누구던가.
지금이야 이렇게 음지에서 작은 조직이나 하나 꾸리고 있을 뿐이지만, 백년도 더 전에는 나름 마왕의 핏줄로서 제 언니들과 후계의 자리를 두고 다투던 몸이 아니던가.
물론 십수 년 전에 파문당하며 금제에 걸려 마력을 절반 이상을 잃어버린 이후론 모두 부질없는 이야기였지만…
적어도 고작해야 반년짜리 애송이 하나 홀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동안 모두의 눈을 속이고 남몰래 힘을 쌓고 있었던 건지, 정말로 그 반년 사이에 그만큼이나 성장한 건지.”
둘 중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뭐가 됐든 절대 보통 녀석은 아니었다.
미리 줄을 대놓는다면 분명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크게 도움이 될 놈이었다.
“온건파의 인사들이 이 일을 알면 곱게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상관없어. 마음대로 하라지. 어차피 뒤가 켕길 만한 정보는 하나도 넘겨주지 않았으니까.”
에멜은 카브리드의 걱정에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자신은 정말로 누구나 구할 수 있는 정보만 팔아치웠을 뿐이었다.
물론 그 모든 걸 전부 한데 모아놓고 본다면 그 어린 공자님이 원하는 걸 찾을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이긴 하겠지만, 그거야 뭐 본인의 능력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그 정찰대에 우리 귀여운 조카도 끼어있었던 거 같은데.”
그녀는 제 어미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닮아 출세에 대한 욕심이 강했던 어린 조카를 떠올리며, 살포시 웃음을 터트렸다.
“잘하면 둘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만일 그가 그 종이뭉치에서 실마리를 찾아 따라간다면, 분명 자신의 옛 가문이 있는 곳에 닿게 될 터였다.
“그 아이가 기회를 잘 잡아야 할 텐데.”
원하던 원하지 않던, 에릭은 곧 전쟁의 주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할 수 없더라도 다른 이들이 그렇게 만들겠지.
“출세라….”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오를 수 없는 길이 있는 만큼, 실력이 좀 모자라도 다른 방법으로 오를 수 있는 길 또한 존재하는 법이었다.
특히 그녀의 가문은 출세를 위해선 남들보다 더더욱 그 다른 방법이라는 걸 활용할 줄 알아야 했다.
“뭐, 알아서 잘 하겠지.”
그녀도 엄연한 몽마니까.
굳이 누가 옆에서 충고해주지 않더라도, 제가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선 알아서 잘 움직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