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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36화 (36/200)

제36화

“음.”

나는 살짝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냄새가 훅 올라오는 핏물을 보며 침을 삼켰다.

잔이 좀 차가운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방금 뽑아낸 건 아닌 모양이었다.

꿀꺽- 꿀꺽-

다행히 보관하는데 무슨 처리라도 해놓은 건지, 어디 응고돼서 핏덩이가 남는 부분 없이 미끄럽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후.”

능력치는 오르지 않는 건가.

나는 어느새 전부 비워진 잔을 보며,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단순히 나보다 약해서 그런 건지, 이런 식으로 먹는 건 흡혈로 쳐주지 않는 건지.

뭐, 막내의 수준을 생각해보자면 아무래도 후자가 아닐까 싶었다.

그럼에도 굳이 식탁에 식재를 살아있는 채로 두고서 피를 빨지 않는 건, 뱀파이어가 귀족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겠지.

그런 식사는 체면이 살지 않으니까.

“나쁘지 않군요.”

그래도 맛은 썩 괜찮았다.

난 냅킨 안쪽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살포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다행이구나.”

나는 꽤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선 자기 몫을 들이키는 어미를 보며, 속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겉으로 내색하진 않아도 머리를 팽팽히 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눈 밖에 났던 자식이 차마 무시할 수 없는 전공을 세워 돌아온 걸로도 모자라, 치명적인 흠이라고 할 수 있었던 부분까지 고쳐서 돌아왔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무너져가던 가세를 다시 들어 올린 능력 있는 안주인으로서, 지금쯤 앞으로 나를 어떻게 대해줘야 할지 계산을 치르고 있을 터였다.

그나저나…

“루이스 형님. 혹시 속이 안 좋으십니까?”

나는 아까부터 계속 은근히 이쪽을 향해 알 수 없는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둘째를 보며, 홀로 아직까지 잔이 가득 채워져 있는 그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이거 아무래도 내가 퍽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갑자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능해져서 돌아온 동생이 말이다.

“…아니, 아니다.”

난 내 지적에 한순간 와락 표정을 구기더니, 이내 다시 얼굴을 펴며 잔을 들이키는 루이스를 보고선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아무리 봐도 뭔가 수상하단 말이지.

발록이 강함을 일생 최고의 가치로 여기듯이, 마찬가지로 뱀파이어는 귀족다움을 추구하기 마련이었다.

이 몸뚱이의 기억 속에 둘째가 그리 모자란 놈으로 있지는 않았는데.

적어도 함부로 저렇게 겉으로 불쾌한 감정을 내비칠 만큼 기품이 모자란 녀석은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그럼에도 저리 표정에 묻어나올 정도로, 내 성장이 마음에 안 드는 이유가 무언가 있다는 것일 터.

“오늘 에피타이저는 마음에 드셨습니까?”

“훌륭하더군. 당분간 자주 내오도록.”

“예, 공작님.”

나는 내 앞에 비어있는 잔을 보고선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이는 아비를 보며, 슬며시 둘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설마하니 그렇지 않아도 첫째에게 명분으로나 실력으로나 밀리고 있는 판국에, 나를 구슬리지는 못할망정 또 다른 후계자로서 견제하는 것은 아닐 테고.

아무래도 내가 공적을 세우고 마왕들의 기대를 사며 돌아온 것이 어딘가 방해가 되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이를 테면 주전파의 젊은 영웅으로서의 내가 이곳에 있으면 무언가 곤란해진다던가…

“실례하겠습니다.”

난 이윽고 식탁 위에 올라오는 스프를 보며, 잠시 생각을 미루어두고 식기를 들었다.

그것도 나중에 따로 알아보면 될 일이겠지.

온건파인 숙부와 첫째를 제치고 다음 공작위를 계승하고 싶은 야욕 넘치는 둘째라.

벌써부터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 * *

식사를 마치고 나온 나는, 공작부인의 명으로 이전과 달리 귀족다운 사치품이 몇몇 들어서고 있는 방을 보며 문 앞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작가의 자제가 지내는 곳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단출했던 방이, 어느새 척 보기에도 값이 꽤 나가 보이는 물건들로 가득 들어찼다.

이로서 가문의 수치나 다름없던 반푼이가, 드디어 어디 내놓기에 부끄럼이 없는 가족으로 인정받은 셈이었다.

“알프레드.”

“예, 에릭 도련님.”

난 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집사장을 불러, 내일부터 내 가문을 좀먹고 있는 온건파를 드러내기 위해 움직이는데 필요한 정보를 물었다.

“혹시 도시에 상인연합 같은 건물이 있나?”

“길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대장장이 같은 장인들이나 말씀하신 것처럼 도시를 오가는 상인들이 따로 모이는 곳이 있긴 합니다.”

길드.

그런 건 중간계나 여기나 똑같나.

하긴 어디든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이권을 위해 저들끼리 뭉치는 곳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렇다는 말은, 이 도시 어딘가에 내가 원하는 곳도 있으리란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포상금을 많이 받으셨다지요. 곧 있을 전쟁에 필요한 장비를 구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런 거라면 가문에도 쓸 만한 게 몇 있는 걸로 압니다만… 공작님께 한 번 여쭤봄이 어떠신지요.”

“우선 도시를 한 번 둘러보고 생각해보지. 아무래도 내일 일찍부터 나가야될 거 같군.”

“아침은 어떻게 하실는지요.”

“먹고 가도록 가지.”

“그럼 그리 전해놓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선 금세 일을 모두 마친 시녀들과 함께 걸음을 옮기는 그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가문의 장비라.

나중에 한 번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음.”

난 그새 꽤나 번쩍번쩍해진 방을 둘러보며, 푹신한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가문으로 돌아온 지 하루.

이 정도면 썩 괜찮게 움직인 거 같았다.

* * *

“아침부터 참 북적거리는군.”

전날의 만찬에 비해 나름 간단하게 준비된 식사를 마치고서 저택 밖으로 나온 나는, 마계의 다양한 종족들이 잔뜩 돌아다니는 거리를 둘러보며 대장간을 찾았다.

오늘 가려는 곳이 썩 대놓고 당당하게 들락날락할만한 곳은 아닌 만큼 최대한 이목을 끌지 않도록 평범한 옷을 찾느라 나오는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덕분에 여기까지 편하게 올 수 있었다.

중간 중간 이쪽을 흘끔 돌아보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거야 이곳이 뱀파이어가 다스리는 도시이기에 그와 같은 종족인 나를 보고 잠시 흠칫했을 뿐이었다.

만일 내가 가이오스 공작가의 일원이라는 걸 알아봤다면, 아예 거기서 다들 무릎을 꿇었을 테지.

딸랑-

“어서 옵쇼.”

깡-! 깡-!

가게 뒤편에서 쇠를 때리는 소리가 입구까지 울렸다.

크게 귀에 거슬리지 않고 맑은 걸 보아하니, 적당히 고른 것 치고는 꽤 실력 있는 곳인 모양이었다.

“뭐 찾는 거라도 있수?”

나는 카운터를 나서며 슬쩍 이쪽에 붙는 직원을 보고선,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물건을 둘러봤다.

단검도 좋지만, 가능한 정체를 숨기려면 다른 무기를 쓰는 편이 더 낫겠지.

“이걸로 주시오.”

난 내 이미지와 전혀 상반되는 거대한 대검과 몸 전체를 가릴 수 있는 로브 하나를 들었다.

물론 이걸로 모두의 눈을 속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귀찮게 달라붙을 어중이떠중이들은 좀 떼어낼 수 있겠지.

“괜찮겠수? 그 대검이 통짜 철이라서 손님이 휘두르고 다니기엔 좀 무거울 텐데….”

“됐소. 얼마요?”

“…마음대로 하쇼. 우리야 팔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은화 서른 장만 주쇼. 그 로브야 뭐, 얼마 안 하는 거니까 공짜로 드리리다.”

나는 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고선, 은화 일흔 개가 든 주머니를 건네받았다.

이것도 서비스인가.

뭐 따로 가져온 주머니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가문에서 들고 나온 걸 꺼내기보다는 이쪽이 더 나은 거 같았다.

마왕성에서 포상과 함께 지급받은 것보다는 아니어도, 그것 또한 나름 눈에 띄는 고급품이었으니까.

“…참 귀찮게 됐군.”

구매한 로브를 걸치고서 등에 대검을 메고 밖으로 나온 나는, 근처에 아닌 척 하면서도 분명히 누군가를 찾기 위해 눈알을 굴리고 있는 몇몇 행인들을 보고선 눈살을 찌푸렸다.

숙부가 보낸 건가.

주전파의 머리 중 하나인 마왕의 친우가 가주로 있는 가문에서 온건파의 요직을 차지하고도 멀쩡히 살아있을 정도로 쉬이 틈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신중할 줄은 몰랐다.

보통 같으면 애초에 저택을 나설 때부터 서서히 미행을 붙이든 했을 텐데, 이제야 거리에 나와서 자리를 잡고 있을 줄이야.

하긴 사람을 시켜 내가 무얼 입고 나갔는지 파악한다면, 조금 늦게 감시를 풀더라도 충분히 늦지 않게 나를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어설픈 녀석이었다면 자칫 안심하고 돌아다니다 꼬리를 물렸을 테지.

난 후드를 좀 더 깊게 눌러쓰고선, 주변에 있는 골목을 슥슥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젠장… 요즘 벌이가 영 시원찮구만.”

“전쟁이니 뭐니, 그거 때문에 병사가 확 늘었어. 빌어먹을… 이래서야 이번 달엔 상납금이나 채울 수 있을지 모르겠네.”

찾았다.

나는 후미진 골목 깊숙한 곳에서 침을 찍찍 뱉고 있는 질 나쁜 무리들을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음지의 일은 음지에 빌붙어 사는 놈들이 잘 아는 법.

척 보기에도 내가 원하는 곳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거 같은 잔챙이들뿐이었지만, 이 녀석들을 계속 타고 올라가다보면 결국 찾는 게 나오는 법이었다.

“어디 멍청한 도련님이라도 하나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으려나. 한탕만 제대로 잡으면 상납금은 물론이고 당분간은 돈 걱정 없이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을 텐데.”

“별 말도 안 되는 걸 다 기대하고 사는구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면서 여기서 이렇게 죽치고 있지 말고, 나가서 어디 호구 하나라도 낚아….”

쩌억-

“…어?”

나는 저들끼리 불만을 늘어놓다 슬슬 자리를 옮기려는 세 녀석을 보고선, 원하는 것처럼 하늘은 아니지만 조금 높이 뛰어올라 한 명을 반으로 갈라버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로브에 피가 튀지 않도록 적당히 조절하면서 말이다.

“히, 히이익!”

“케, 케르트! 뭐, 뭐야. 너 뭐하는 놈… 컥!”

“쉿. 조용히. 이러다 밖에 들리겠어.”

난 대검에 잔뜩 묻은 피를 적당히 털어내고선, 갑작스런 일행의 죽음에 당황하는 두 놈의 목을 움켜쥐었다.

“정보길드가 어디 있는지 알 만한 놈이 있으면 조용히 눈만 두 번 깜빡여라. 아니라면 그런 녀석을 알고 있을 만한 다른 놈이라도 좋다.”

나는 벌써 창백해진 안색으로 황급히 눈을 두 번 깜빡이는 한 놈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뚝-

“흐읍….”

“좋아. 그럼 거기로 안내하도록.”

난 재빨리 눈을 깜빡이지 않은 녀석의 목을 간단히 부러트리고선, 놈이 입고 있던 옷에 대검에 남아 있는 피를 마저 닦았다.

“허튼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아까 네 친구가 어떻게 됐는지 봤지?”

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골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게끔, 놈의 등 뒤에 단검의 날을 계속 댄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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