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이, 이반 도련님….”
기사들은 호기롭게 나에게 결투를 신청한 이반을 보며, 어떻게든 그를 말리기 위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원래대로였다면 녀석이 무얼 하든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
아니, 오히려 몇몇은 그에 호응하며 일을 더욱 부추겼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처음 이 수련장에 들어왔을 때, 반푼이이자 종족의 수치인 이 몸뚱이를 보는 시선은 그만큼 탐탁지 않았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방금 코앞에서 내 실력을 확인한 그들의 눈에는, 오히려 이반을 향한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필패.
고작해야 이제 막 검기나 조금 뽑아볼 수 있는 그의 실력으로는, 백 번을 부딪치더라도 내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흠흠. 됐네. 에릭 도련님, 괜찮으시겠습니까?”
하지만 알바크는 도리어 그런 기사들을 조용히 시키고선,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나를 쳐다봤다.
이 늙은이, 뭔가 노리는 게 있는 모양이군.
아무래도 오냐오냐 자란 덕에 모든 게 제 세상인 양 망나니처럼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는 이반의 기를, 나를 통해 조금 눌러놓으려는 생각인 거 같았다.
뭐 원한다면 그리 못 해줄 거야 없지.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걸로 기사단을 통솔하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점수를 딸 수 있다면 나로서도 충분히 이득이었다.
“좋다. 덤벼라. 철없는 동생을 훈육하는 것도 어찌 보면 형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겠지.”
나는 기사단장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이쪽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못난 막내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자세는 꽤 봐줄 만하군.
딱히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라고 해서 폼으로 검술을 배운 건 아닐 테니까.
“…뭐? 하! 동생? 형? 누가 누구를 훈육한다고? 되다 만 반푼이 자식이… 그깟 잔챙이들이랑 같이 반년 정도 군대놀이 좀 하고 왔다고 해서, 네가 정말 뭐라도 된 줄 아는 거냐?”
“하늘 같은 형한테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아무래도 그간 못 해준 만큼, 오늘 제대로 그 몸에 예의범절이라는 걸 새겨줘야겠구나.”
난 한심한 동생의 모습에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수련장 구석으로 걸음을 옮겨 아까 봐뒀던 연습용 목검을 꺼내 들었다.
“덤벼라.”
“이, 이 빌어먹을 반푼이 자식이!”
너 같은 건 이런 목검 하나로도 충분하다.
아무리 멍청한 녀석이라고 할지라도 지금 내가 무슨 뜻으로 허벅지에 찬 단검을 꺼내지 않고서 굳이 목검을 골라왔는지 눈치 챈 것인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재빠르게 자리를 박찼다.
“느리구나.”
나는 훤히 보이는 녀석의 움직임에, 슬쩍 몸을 옆으로 빼며 발을 들어올렸다.
툭-
“어, 어어?”
쿵-
흥분해서 일단 검을 휘두르며 마구잡이로 내게 달려들었던 녀석은, 그대로 멈추지 못하고 발이 걸려 넘어졌다.
제 나이대를 생각하면 충분히 위협적인 속도였으나, 내 눈에는 그저 어린아이의 재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직 한참이나 미숙한 이 몸뚱이의 시선으로도 말이다.
“이, 이게… 어?”
“그쪽이 아니다. 대체 어디를 보는 거냐. 항상 적이 어디 있는지를 잘 살필 줄 알아야지.”
쩌억-!
“아아악!”
“도, 도련님….”
나는 수련장이 떠나가라 소리가 울릴 정도로 차지게 녀석의 등짝을 후려쳤다.
“쯧. 소리만 크지 별로 아프지도 않을 텐데 엄살은. 그렇게 해서 어디 나 대신 전쟁에 나갈 수 있겠나?”
“크읏… 이, 이 반푼이….”
짜악-!
“아윽!”
“형님이라고 해야지. 다들 널 오냐오냐하며 봐줬다고 해서 나까지 그럴 거라 생각하지 마라. 전쟁에 나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적들은 이렇게 목검 같은 걸로 네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나는 간만에 그간 달려온 스트레스라도 푼다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놈의 공격을 피하고 목검의 넓은 면으로 녀석을 내려치기를 반복했다.
아무리 잘나 봐야 이 몸뚱이하고도 여덟 살 터울의 막내.
공작가의 자제로서 그 무슨 훌륭한 선생을 두었다 하더라도, 그가 이 귀한 핏줄에 걸맞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나이에 이룰 수 있는 성취에 한계가 있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이놈이 나처럼 수명을 대가로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여신의 저주인, 상태창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쩌억-!
[반복된 운동으로 체력의 한계를 조금 넘어섭니다.]
[체력이 ‘1’ 증가합니다.]
오, 이것 봐라.
나는 아무래도 그간 쌓아온 것들에 더해 이번 걸로 드디어 터진 건지, 간만에 흡혈이나 레벨업 외로도 올라간 능력치를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악! 죄, 죄송….”
“아니,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쩍-!
“어윽… 자, 잠깐… 혀, 형님! 저 방금 맞은 데 또 맞았….”
어쩌면 이걸로 한 번 더 올릴 수 있지 않을까.
난 어느새 검을 놓고서 거북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이반을 보고선, 더더욱 마음을 놓고서 계속 목검을 휘둘렀다.
* * *
“으으….”
“음. 그래도 이제 얼추 사람이 된 거 같군.”
나는 거의 30분 정도를 내리 패고서야 말에 싹수가 달라붙은 녀석을 보고선, 그제야 목검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역시 공작가에서 쓰는 물건이라 그런지, 보통 같았으면 내가 아무리 힘 조절을 잘했다고 한들 이만하면 다 갈라지고 부서졌을 텐데도 멀쩡해 보이는 게 꽤 튼튼한 나무를 가져다 만든 모양이었다.
“그간 하루종일 마차에 있느라 몸이 좀 뻐근했는데 덕분에 좀 풀린 거 같군. 알바크, 지금 몇 시지?”
“이제 여섯 시입니다, 도련님.”
여섯 시라.
만찬까지 앞으로 한 시간인가.
이제 적당히 돌아가서 몸을 씻고 나면 얼추 시간이 맞을 거 같았다.
“이, 이반 도련님!”
나는 내가 그새 온몸이 퉁퉁 부은 막내에게서 몸을 돌리고 나서야 녀석을 부축하기 위해 뛰어가는 기사들을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에 얼마나 사고를 치고 다녔으면 비 오는 날이었어도 먼지가 자욱하게 났을 정도로 두들겨 맞는 동안 한 명도 말리는 사람이 없을까.
하지만 이번 기회에 내가 손수 사랑의 매를 놔주었으니, 적어도 당분간은 얌전히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늘을 찌르던 자존심이 아주 박살이 났을 테지.
“괘, 괜찮으십니까?”
“흐윽… 주, 죽을 거 같… 아, 아니! 괘, 괜찮다. 괜찮으니까….”
난 고통에 눈물을 흘리려다 슬쩍 나와 눈을 마주치고선 후들거리는 다리로 힘겹게 몸을 일으킨 놈을 보고선,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보기엔 심하게 다친 것 같아 보여도, 정말로 친족을 개 패듯이 팰 수는 없었기에 적당히 손을 썼으니 분명 괜찮을 터였다.
뱀파이어의 재생력을 생각하면 아마 내일 아침엔 여기저기 쓸린 상처도 전부 아물어있겠지.
“고생하셨습니다, 에릭 도련님.”
“알바크, 자네도 참 짓궂군. 그래, 이제 어디 만족스러운가?”
“다 도련님들을 위한 일이지요. 공작님께서도 최근 이반 도련님에 대한 안 좋은 소문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계셨답니다. 덕분에 이걸로 한시름 놓으실 수 있겠지요.”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기사 두 명의 부축을 받아 수련장을 떠나가는 이반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능구렁이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럼 나도 이만 돌아가지. 자네 때문에 하나뿐인 동생에게 미움을 사게 된 거 같으니, 이건 빚으로 달아두겠네.”
“허허. 이 늙은이가 갚을 수 있는 정도라면 말이지요. 편히 들어가십시오, 도련님.”
공작가의 기사단장씩이나 되는 인물이 쉬이 갚지 못할 정도로 큰일이 어디 있겠는가.
난 썩 만족스러운 그의 대답에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며, 천천히 수련장을 나섰다.
* * *
“음, 좋군.”
1층에 가문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는 욕탕에서 느긋하게 몸을 담그고 나온 나는, 적당히 준비된 옷을 입고서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련장에서 있었던 일도 그렇고 슬슬 마왕성에서의 일에 대한 소문이 퍼졌는지, 중간중간 마주치는 시종들마다 복잡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나를 모셨다.
아무리 그리 놀랄 만한 업적을 지었다고는 한들, 지난 시간 계속 반푼이로 여겨왔던 놈을 한순간에 동전 뒤집듯 제대로 대한다는 건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것도 조금만 지나면 다들 적응하겠지.
그리고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가문의 인정을 받고, 내 사람이 되어줄 이들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닐 수 있을 터였다.
“에릭 도련님, 오셨습니까.”
“음. 아직 늦진 않았겠지?”
“예. 그래도 오랜만에 도련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소식에, 모두들 일찍 자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끼이익-
나는 식당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알프레드를 보고선, 천천히 고개를 주억이며 그가 열어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왔느냐.”
“예.”
난 무뚝뚝하게 나를 반기는 카발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선, 중간에 비어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윽….”
그새 멍은 거의 가라앉았나.
나는 제 옆에 내가 앉는 걸 보고선 흠칫 몸을 떠는 이반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이구나.”
“예, 어머니.”
사비나 가이오스.
나는 내 옆에 막내와 반대편에 앉아 미소 짓고 있는 여인을 보며, 마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몸뚱이의 기억으로 미루어보면, 참으로 자식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그보다 가문 자체에 신경을 더 쓰는 거라고 봐야 하나.
과거 모종의 이유로 휘청거리던 가이오스 가문의 뼈대가 기울지 않도록 다시 일으켜 세운 게 바로 그녀라고 했던가.
아쉽게도 자세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과거의 에릭 가이오스가 주로 제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지라, 나중에 따로 알아봐야 할 거 같았다.
어차피 숙부를 몰아내려면 우선 이 가문에 대해서 자세히 조사해야 했으니까.
“이렇게 가족이 전부 식탁에 모이는 게 정말 몇 년 만인지 모르겠구나.”
“앞으로는 자주 이렇게 모일 수 있을 겁니다.”
“후후. 그래?”
난 주변을 한 번 슬쩍 둘러보고선 살포시 웃는 그녀를 보며, 마찬가지로 식탁을 살폈다.
부모와 막내는 그렇다 치고, 저게 그 첫째와 둘째로군.
나는 후계자 수업으로 인해 이 몸뚱이의 기억에서도 몇 번 마주친 적이 없던 두 형제를 바라봤다.
카발의 옆에 앉은 저 매사에 무심해 보이는 녀석이 첫째인 알렌, 그 옆에 있는 게 둘째인 루이스 가이오스인가.
“음?”
“왜 그러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지?
난 순간 이쪽을 보며 이를 가는 루이스를 보고선 고개를 갸웃했다.
단순히 못난 동생의 얼굴이 보기 싫어서 그랬다고 하기에는 꽤 적의가 다분한 표정이었다.
드르륵-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되새기며 무언가를 고민하는 사이에 나온 트레이를 보고선, 하나씩 앞에 놓이기 시작하는 잔을 살폈다.
“그….”
“괜찮으니 어서 놓도록.”
“…예.”
피.
나는 내 차례에서만 잠깐 내려놓기를 주저한, 시뻘건 피가 담긴 유리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서 들지.”
“예.”
난 천천히 잔을 들어 올리며, 그 순간 이쪽을 향해 몰린 가족들의 시선을 보고선 속으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참 노골적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