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제길, 오늘도 더럽게 빡세게 굴리는구만.”
“하루 이틀도 일도 아닌데 뭘. 그래도 이번엔 좀 심하긴 했어. 그 양반이 원래 좀 고지식해도 부상자가 나올 때까지 굴리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곧 전쟁인지 뭔지, 그거 때문에 그러는 거 같은… 응?”
철컥-
수련장 밖에서 투구를 벗고 땀에 푹 젖은 몸을 식히고 있던 기사들의 옆을 지난 나는, 곧바로 닫힌 문을 열고서 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바, 방금 누구야? 저런 놈이 있었던가?”
“새로운 고용인인가? 어이! 여긴 함부로 들어오는 데가….”
“쉿! 바보야, 얼굴 보면 모르겠어? 도련님들하고 똑 닮았잖아. 아까 단장이 했던 얘기 기억 안나? 전에 정찰대로 보냈다던 셋째가 오늘 돌아왔다고 했잖아.”
“뭐? 그럼 저게 그 반푼이….”
난 갑작스레 열린 문에 수련을 하다말고 이쪽을 돌아보는 기사들을 뒤로 하고, 곧장 한쪽 구석에 놓인 목각인형들 앞으로 향했다.
“음.”
각자의 수준에 맞춰 기술을 갈고 닦을 수 있도록 구분이라도 해놓은 것인지, 다들 색깔이 제각각이었다.
주황색부터 짙은 고동색까지.
나는 적당히 그 중간 정도 되는 갈색을 골라, 허벅지에 찬 단검을 뽑아들었다.
“지금 뭐하려는 거지?”
“수련이라도 하려는 모양인데. 전엔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녀석이 웬일이래. 정찰대에서 살아 돌아오더니 마음이 좀 바뀌었나보지?”
“하. 그래봐야 반푼이지. 고작해야 그 제대로 되먹지도 못한 놈들 사이에서 반년 정도 구르고 온 주제에. 다짜고짜 우리도 흠집 하나 내기 힘든 갈색 인형 앞에 선다고? 자기 수준도 제대로 모르는 애송이 같으니라고. 단장님은 왜 저걸 가만히 보고만 계시는 거지?”
난 어느새 슬금슬금 나를 둘러싼 기사들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마침 잘됐군.
어차피 가문 내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라도, 언젠가 임팩트 있는 무언가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더구나 이들은 가문에 충성하고 실질적으로 그를 무력으로 지탱하는 기사들이 아니던가.
여기서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이 몸뚱이에 대한 가문사람들의 평가도 확 뒤집을 수 있을 터였다.
“흡!”
나는 목각인형 앞에 자세를 잡고선,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서서히 단검의 날을 덮어가는 시퍼런 기운에, 주변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뭐, 뭐야 저거. 설마 지금 저 반푼이가 검기를 쓰고 있는 거야?”
“그럴 리가… 평소에 단련은커녕 제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던 녀석이 어떻게 고작 반년 만에!”
순식간에 형태를 갖춘 검기가 마치 수면에 비친 것처럼 일렁였다.
이것만 해도 저 콧대 높은 기사들을 놀라게 하기는 충분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 볼일 없었던 반푼이 에릭 가이오스가 해낸 일이기에 그런 거였다.
애초에 공작가의 적자로서 제대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자랐더라면, 검기를 다루는 것쯤이야 아주 특별한 일도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지금까지 이 몸뚱이가 쌓아온 악명을 여기서 단번에 뒤엎어버리기 위해선, 저치들이 상상조차 못할 기예가 필요했다.
“후우….”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단검을 뒤덮은 검기를 조금씩 다듬어나갔다.
얇게, 더 날카롭게.
날에서 멀어질수록 옅은 안개처럼 희미하게 일렁이던 검기가, 점점 안쪽으로 뭉치며 예리한 칼날을 이루었다.
“저, 저건… 말도 안 돼!”
“어, 어떻게… 고작 반년 만에 검기를 응축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다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난 선명하고 짙은 푸른색을 띠는 검기의 모습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기사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단검을 휘둘렀다.
서걱-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마치 허공을 가르듯 막힘없이 인형이 잘려나갔다.
쿵-
잘려진 상체가 서서히 뒤로 넘어가며 곧 바닥에 떨어졌다.
오톨도톨한 부분 하나 없이 매끈하게 잘린 단면이 모두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건 좀 놀랍군.
솔직히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잘릴 줄은 몰랐는데.
도대체 날이 얼마나 예리한 건지.
아다만티움으로 만든 단검이라더니, 확실히 그 값을 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제련할 때 원석의 강도가 강도이니만큼 절대 부러질 걱정 없이 마음껏 날을 두드릴 수 있어, 다른 무기들보다 몇 배는 더 날카롭게 펼친 모양이었다.
“프흐….”
나는 이만 단검을 집어넣으며 달뜬 숨을 내쉬었다.
그 단 한 번의 휘두름에 진이 다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었다.
제멋대로 흩어지는 검기를 칼날의 형태에 맞춰 응축하는 건, 적어도 지금 내 수준의 마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기예가 아니었으니까.
적어도 100.
지금 고작해야 58밖에 되지 않는 내 마력으로는 본디 실현조차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다만 날의 길이가 짧은 단검이었기에, 용사 시절 쌓아온 경험을 살려 억지로 일으킨 것뿐이었다.
“지,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인형이 단번에 반으로… 그것도 저렇게나 말끔하게….”
난 이젠 아주 넋을 잃고 계속 감탄만 흘리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신고식은 제대로 마쳤겠지.
다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걸 보아하니, 이번 일로 가문 내에서 입지 좀 꽤나 다질 수 있을 거 같았다.
시기가 곧 전쟁을 앞두고 있으니 만큼, 가문의 높으신 분들도 기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테니까.
“…에릭 도련님. 그 짧은 새에 정말 몰라보게 달라져서 돌아오셨군요. 혹시 이 늙은이가 지금 노망이 난 건 아닐까,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봐야 됐을 만큼 말입니다.”
알바크.
나는 상당히 흥미로운 얼굴로 앞에 나서는 늙은 기사단장을 보며,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정찰대에서 많은 일이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듣자하니 이번에 일등공신으로 마룡왕님의 무기고까지 여셨다지요?”
“마, 마룡왕님의 무기고를?”
“분명 같은 용족의 최측근 분들에게마저도 쉽사리 열어주시지 않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알바크의 말에 주변이 더욱 술렁이기 시작했다.
처음 수련장에 들어와 목각인형 앞에 섰을 때만 해도 홀로 이쪽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이제 와서 살갑게 말을 붙이는 건 또 무슨 꿍꿍이지?
“음, 그랬었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눈앞의 노인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이 몸뚱이의 숙부가 온건파라고 했던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그마치 공작의 동생씩이나 되는 인물이 그저 그런 어중이떠중이일리는 없고, 분명 그들 중에서도 한가락 하는 인물일 텐데.
그런 놈이 설마하니 이 가문에서 혼자 온건파 행세를 하고 있지는 않겠지.
틀림없이 누군가 그의 손발이 되어주는 녀석들이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혹시 알바크가…
“호오… 과연.”
그는 깔끔하게 잘려나간 목각인형의 단면을 한 번 슬쩍 살피더니, 나지막이 감탄을 흘리며 내 허벅지에 있는 단검을 내려다봤다.
“지금 차고 계신 그것. 방금 손에 쥐고 휘두르실 땐 워낙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긴가민가했습니다만, 전대 혈마왕이 쓰던 단검이로군요.”
“그랬다고 하더군.”
“허허. 이렇게 간만에 보니까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군요. 공작님과 함께 그분의 건너편에서 체르페슈 님을 위해 싸웠을 때가 바로 엊그제 같건만….”
나는 어딘가 추억에 젖은 눈동자로 아련하게 단검을 바라보는 기사단장을 보며, 잠시 의심의 씨앗을 거두어들였다.
제 못난 막내아들을 구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단신으로 도시를 습격한 것부터, 수많은 전장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며 최전선에서 무자비하게 연합군을 도륙하던 그 잔혹한 모습까지.
용사 시절 내가 봐왔던 체르페슈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적어도 그놈이 전쟁을 반대하고 이런 썩어빠진 마계의 생태를 유지하기를 원하는 그 온건파로 보이지는 않았다.
만일 지금 이 노익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카발과 함께 체르페슈의 편에 서서 그를 마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싸웠었다는 것만으로도 알바크를 온건파로 보기는 힘들었다.
“처음 도련님께서 일등공신이 되셨다고 들었을 땐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만, 방금 그 검기를 보아하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고작 반년 만에 홀로 검기를 응축하는 경지에 다다르시다니. 제아무리 전쟁터가 실력을 키우기에 가장 기름진 땅이라지만, 에릭 도련님께서 이만한 재능을 가지고 계시는 줄 알았다면 진즉에 포기하지 않고 억지로라도 검을 쥐어드릴 걸 그랬습니다.”
난 마치 기특한 손주를 보는듯한 할아버지의 웃음으로 나를 반기는 그를 보며, 말없이 침음을 흘렸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그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전에는 온건파의 반대편에 서서 그들과 맞서 싸웠을지 몰라도, 지금은 또 그쪽에 착 달라붙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으니까.
자세한 건 나중에 천천히 조사해 봐도 늦지 않겠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잘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훌륭하게 자라주셨습니다. 이제 더는 그 누구도 함부로 도련님을 반푼이라 비웃을 수 없을 만큼, 아주 훌륭한 뱀파이어가 되셨군요.”
“…잘 돌아오셨습니다, 에릭 도련님!”
“음.”
나는 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이며 뒤늦게 예를 차리는 그와 기사들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지금 자기 나름대로 나를 인정한 모양이었다.
설마하니 기사단장이 이렇게 직접 나서서 일을 벌여줄 줄은 몰랐는데.
덕분에 굳이 매일 수련장에 얼굴도장을 찍어가면서까지 기사들을 내편으로 만들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그럼 난 이제 슬슬 다시 알아서 수련할 테니, 경들도 전에 하던 걸 마저….”
끼이익-!
“에릭!”
“…음?”
그렇게 나를 둘러싼 기사들을 전부 해산시키고, 저택으로 돌아가기 전에 검기를 씌우지 않고서는 과연 얼마나 되는지 단검을 다시 뽑아들려던 찰나.
갑자기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선 내 이름을 외치며 이쪽으로 달려드는 꼬맹이의 모습에, 슬쩍 녀석을 돌아보았다.
“네가 이번 원정의 일등공신이라고? 마룡왕님의 무기고를 열었다고? 어떻게 너 같은 반푼이가….”
이반 가이오스.
반푼이인 이 몸뚱이 다음으로 태어난 덕에 오냐오냐 자라, 제 형 알기를 아주 우습게 보는 못난 막내.
“그건… 그건 내 몫이야! 이 가이오스에서, 우리 종족 중에서 가장 먼저 전쟁의 일등공신이 되었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라고, 나!”
나는 다짜고짜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며 이쪽을 향해 검 끝을 내미는 친동생을 보고선,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보나마나 무슨 속임수를 쓴 게 분명해. 덤벼! 여기서 너를 때려눕히고, 아버지께 가서 말할 거니까. 다 가짜였다고, 그러니까 전쟁엔 내가 대신 나가겠다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