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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33화 (33/200)

제33화

“손님, 다 도착했수다.”

“음.”

마왕성 인근에서 마차를 타고 가문으로 출발한 나는, 중간에 포탈을 한 번 이용하고서도 거의 보름 가까이 걸려서야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참 한심하군.”

마차에서 내린 나는 각양각색의 마족들이 북적이는 거리를 거닐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게 정말로 곧 중간계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마계의 풍경이란 말인가.

나는 방금 전에 제대로 된 확인조차 없이, 그냥 동화를 몇 푼 쥐어주고 나니 마차를 그냥 들여보내주던 문지기들을 떠올렸다.

평화가 너무 오래 지속된 탓일까.

저런 말단 병사들까지 뒷돈을 받아 챙길 정도로 부패해있다니.

여기가 다른 곳도 아니고 공작가가 적을 두고 있는 도시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이래서야 전에 중간계에서 봤던 놈들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군.

이런데도 온건파 놈들은 전쟁을 일으키지 말고 현상을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었단 말인가.

역시, 아무래도 가능한 녀석들의 뿌리를 뽑아놔야 할 거 같았다.

“여긴가.”

금방 가문의 저택 앞에 도착한 나는, 그 으리으리한 자태에 나지막이 감탄을 흘렸다.

비록 마왕성이나 제국의 황궁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여기도 당장에 대문부터가 한눈에 담기지 않을 정도였다.

다른 건 몰라도 가문 하나만큼은 확실히 쓸 만하군.

이걸 잘 써먹을 수만 있다면 내 복수에도 상당히 도움이 될 거 같았다.

그러려면 일단 가문 사람들의 인정부터 받아야겠지.

딱히 어려울 건 없었다.

부모형제는 물론 시종들에게조차 비웃음을 사던 반푼이 에릭 가이오스는 내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이젠 정찰대의 젊은 영웅이며, 자그마치 마룡왕의 무기고도 열어젖힌 남자였다.

“정지!”

“음?”

그렇게 자연스레 대문 앞으로 다가가 손잡이에 손을 올리려던 나는, 갑자기 양쪽에서 창을 들이밀며 앞을 막아서는 병사들을 보고선 인상을 팍 찌푸렸다.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지?”

“이놈, 뻔뻔하기는! 이곳은 대 가이오스 공작가의 저택이다. 너 같이 추레한 행색의 평민이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나는 창대를 이용해 나를 밀어내려는 두 경비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마왕성에서 이리로 곧장 돌아오느라 옷가지가 꼬질꼬질해졌다고는 해도, 설마하니 제가 모시는 가문의 도련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할 줄이야.

아니, 이건 피를 마시지 않아 유약했던 몸 때문에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잘 나오지 않았던 이 몸뚱이를 탓해야할 일인가.

“쯧, 비켜라.”

“어허, 이놈이 글쎄….”

“내가 내 집에 들어가겠다는데, 네깟 놈들이 감히 무슨 낯짝으로 나를 막겠다는 거냐.”

“뭐, 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처참하군.

나는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놈들을 보며, 말없이 미간을 좁혔다.

설마 아직 마왕성에서의 소식이 닿지 못한 걸까.

“잠깐만. 그러고 보니 어째 공자님들이랑 많이 닮은 거 같기도 하고….”

“거기, 밖에 무슨 소란입니까.”

“지, 집사장님!”

집사장?

나는 안에서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중년의 뱀파이어를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마침 잘됐군.

알프레드, 이 몸뚱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 저택에서 일했던 그라면 충분히 나를 알아볼 터.

이 답답한 두 녀석을 제압하고서라도 들어가야 되나 고민하던 찰나였는데.

이러면 굳이 귀찮은 일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알프레드, 오랜만이군.”

“음? 오, 에릭 도련님 아니십니까. 굉장히 일찍 도착하셨군요. 도련님께서 마룡왕님의 성을 출발하셨다고 어젯밤에 전해 듣긴 했습니다만… 아무쪼록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도, 도련님?”

나는 알프레드의 말에 벙찐 얼굴로 나를 살피는 두 경비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끼익-

“어서 들어오시지요. 공작님께서 도련님이 오시면 바로 자신을 찾아오라고 이르셨습니다.”

“음. 그러지.”

난 이윽고 안에서 그가 열어준 대문을 지나,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반응을 보아하니 마왕성에서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적어도 가문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얘기가 퍼진 모양이었다.

“알프레드.”

“예, 도련님.”

나는 고작 반년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 나를 전혀 이상하다는 낌새 없이 자연스레 모시는 그를 보며, 속으로 나지막이 감탄을 흘렸다.

과연 공작 가문의 집사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건가.

처세가 아주 일품이었다.

전에는 거의 없는 사람을 대하다시피, 저택 안에서 마주쳐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기가 일쑤였는데 말이지.

“아까 보니까 집 지키는 개가 주인도 못 알아보더군.”

“바로 사람을 새로 구하라 일겠습니다.”

좋아.

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넓은 정원을 지나 저택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공작의 집무실이 아마 가장 위층이었던가.

“저기 봐, 집사장님이 누구랑 같이 오시는데?”

“응? 그러네. 오늘 오시는 손님이 계셨던가?”

“…저거 그 맨날 방구석에만 처박혀있던 걔 아니야? 그 왜, 저번에 정찰대로 쫓겨났다는 셋째 녀석.”

“아! 맞네. 근데… 그놈이 원래 저랬던가? 분위기도 그렇고, 전보다 살이 좀 붙어 보이는 것도 그렇고. 뭔가 많이 바뀐 거 같은데.”

나는 저택을 돌아다니며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 몸뚱이의 평판이 바닥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고용인들이 공작가의 적자를 눈앞에 두고서 몰래 흉을 보는 모습을 직접 보자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앞의 경비병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 소식이 저택의 모두에게 알려진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설사 알려졌다고 한들 당장에 그리 크게 바뀌진 않았겠지.

하나같이 그 반푼이가 해낸 일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들뿐이었으니까.

오히려 이건 알프레드가 이상한 거였다.

똑똑-

“공작님, 알프레드입니다. 에릭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

금방 저택의 가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간 나는, 복도 끝에 놓인 문 앞에 서서 잠시 대답을 기다렸다.

“들어 오거라.”

끼익-

나는 곧 안에서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알프레드가 열어준 문을 지나, 커다란 집무실 안쪽 책상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 백발의 흡혈귀를 바라보았다.

“앉거라.”

카발 가이오스.

비록 마왕과 그 사천왕들만큼은 아닐지라도, 용사 시절 내가 몇 번은 그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현역으로서도 충분히 강인한 사내였다.

난 책상 앞에 놓인 탁자를 가리키는 아비의 손짓을 따라, 의자를 빼고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알프레드. 자네는 잠시 나가 있게.”

“예, 공작님.”

그는 아직 수십 장은 남아있는 서류를 잠시 옆으로 치워두고, 걸음을 옮겨 내 앞에 앉았다.

“어제 체르페슈가 보낸 사람한테 얘기 들었다. 내 아픈 손가락이 이제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훌륭하게 자랐다고 하더구나.”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 대견함과 의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둘이 오랜 친우사이라고 했던가.

그 말은 아들로서 그의 신임을 얻을 수만 있다면, 훗날 혈마왕의 도움도 바랄 수 있다는 얘기였다.

학연 지연보다 좋은 게 바로 혈연이라 하지 않았던가.

가능하면 가문에서 머무는 동안, 이 빌어먹을 몸뚱이가 뒤집어놨던 마음을 확실하게 다시 돌려놔야 될 거 같았다.

카발이 체르페슈에게 들은 말마따나, 적어도 더 이상 아픈 손가락 취급을 받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가 언제든지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도록,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야만했다.

“…과찬이십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다시 그를 쳐다봤다.

“듣자 하니 네가 정찰대의 일등공신으로서 마룡왕님의 무기고까지 열었다지. 그게 거기서 가지고 나온 무기더냐?”

카발은 슬쩍 내 허벅지에 찬 단검을 보며 나지막이 감탄을 흘렸다.

비록 검집에 가려 날이 보이진 않았지만, 손잡이만 보고서도 이게 어떤 무기인지 알아본 모양이었다.

하긴 본디 전대 혈마왕이 쓰던 물건이니만큼, 그의 눈에 익은 건 당연한 일이겠지.

“예,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라.”

그는 내 말에 침음을 흘리며, 무언가 고민하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역시 아무리 못난 아들이 성공해서 돌아왔다고는 한들, 그간 자식 취급도 안 해주던 녀석을 곧바로 깔끔히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에릭, 네게 다시 아버지라 불리는 날이 올 줄은 몰랐구나. 좋다, 앞으로 지켜보마. 그럼 이만 들어가 보거라.”

“예.”

뭐 그래도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한가.

나머지는 천천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면 될 뿐이었다.

나는 다시금 고개를 꾸벅 숙이고선, 조용히 자리를 일어났다.

* * *

“얘기는 잘 끝나셨습니까?”

“음.”

집무실 밖으로 나온 나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알프레드와 마주쳤다.

그는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지,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서 오셨다는 말에, 공작부인께서 저녁에 만찬을 준비해놓으라 하셨습니다. 죄송하지만 오실 수 있겠습니까?”

“안 될 거야 없지. 그래, 몇 시지?”

나는 얼핏 보면 이상한 질문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내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그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간 이 몸뚱이가 피를 마시지 않는 덕에 식사조차 매일 방에 가져다줘야 했던 만큼, 내가 만찬을 먹으러 가겠다는 그 말이 그리도 놀라운 모양이었다.

하긴 충분히 그럴 만한 반응이었다.

흡혈귀들의 만찬은 보통 신선한 피를 뜻하는 거였으니까.

“…7시입니다. 그럼 도련님께서도 오신다고 전해드리겠습니다.”

난 슬쩍 고개를 숙이고 이만 물러나는 알프레드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못난 아들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버지뿐만이 아닌 듯했다.

피를 두려워하고 마시려고도 하지 않던 아들이 막 돌아온 날에 저녁으로 피를 준비하다니.

“재미있군.”

과연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한 번 시험해보려는 심산인가.

나야 뭐 잘된 일이었다.

그깟 피 한 번 마시는 게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고.

오히려 다들 보는 앞에서 변화를 증명할 자리를 이렇게 만들어준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자, 그럼 7시까지 남는 시간 동안 뭘 하고 있을까.

“분명 저택 바로 뒤에 있는 건물이 수련장이었던가.”

기왕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거라면 더욱 확실히 하는 게 낫겠지.

나는 과거 이 몸뚱이가 평생 동안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수련장의 위치를 떠올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겸사겸사 새로 얻은 무기의 성능도 확인해보고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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