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똑똑-
“계십니까?”
“누구지?”
“에릭 가이오스입니다. 마룡왕님의 무기고에 들어가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어젯밤 카렌에게서 무기고에 있는 몇몇 장비들에 대한 얘기를 들은 나는, 새벽 일찍부터 방을 나서 쟈칼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아직 방에서 자고 있지는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좋다. 잠시만 기다려라.”
혹시나 자리에 없으면 잠깐 구경이나 좀 할 겸 마왕성이나 한 번 돌아볼까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어졌군.
끼익-
나는 곧 문을 열고 나온 그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굴에 피곤이 가득한 게, 아무래도 어제 일이 꽤 바빴던 듯했다.
하긴 반년이나 나가 있던 정찰대가 막 돌아왔으니, 여러모로 해야 할 일이 많았겠지.
그들의 공적을 처리하고 대원들 모두에게 줄 보상을 책정하는 등.
적어도 하루 만에 가볍게 끝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리라.
어차피 밤을 새야 될 걸 아니, 내가 편한 시간대에 그냥 자기를 찾아오라고 했던 모양이었다.
“충성! 쟈칼 님, 좋은 아침이십니다!”
“그래, 다들 고생이 많군.”
금방 1층 구석에 있는 작은 통로 앞에 도착한 쟈칼은, 그 앞을 지키는 병사들의 경례를 받고선 안쪽에 나있는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여기다.”
“음.”
이곳이 마룡왕의 무기고인가.
지하에 이렇게 커다란 공간이 나있었을 줄이야.
나는 꽤 길게 이어진 계단 끝에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문을 보고선, 나지막이 감탄을 흘렸다.
“상당히 크군요.”
“그야 당연한 거 아니겠나. 카르카쉬 님께서 그간 마음에 들어 하신 수준 높은 장비들을 모아놓은 공간이다. 그런 중요한 곳이 겉보기에 볼품없어서야 안 될 일이지.”
쟈칼은 내 말에 당연하다는 듯 자랑스럽게 고개를 주억이며, 사뭇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본디 이 안에 들어선다는 건, 우리 고고한 용족들조차 긴 일생을 바쳐 무수히 많은 공적을 쌓아도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 영예다. 가문의 영광으로 알아라, 뱀파이어.”
그는 용족도 아닌 내가 이 무기고의 문을 연다는 사실이 탐탁지 않았는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문을 지키고 있는 마법진을 해제했다.
“자, 열어라.”
나는 간단히 잠금장치만 풀고선 문 앞에서 자리를 비키는 그를 보며, 천천히 거대한 손잡이 앞에 섰다.
덜컥-
문은 그 크기만큼이나 꽤나 빡빡했다.
어중이떠중이들은 이걸 여는 것조차 힘들겠군.
쿠구궁-
곧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어두컴컴한 안쪽이 드러났다.
둥- 둥- 둥-
이윽고 작은 진동이 울려옴과 동시에, 절로 무기고 안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허어….”
나는 용사 시절 동료들과 함께 처음으로 마왕을 암살하러 가기 전에 딱 한 번 들어가 볼 수 있었던 인류 제국의 보물고만큼이나 널따란 공간과, 그 안에 가득 들어찬 수많은 장비들을 보고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과연… 이 정도였단 말인가.
“전하께서 마왕의 자리에 오르시기 전부터 꾸준히 모아오신 것들이다. 하나같이 아주 훌륭하고 뛰어난 무구들뿐이지. 보통은 이 중 하나만 해도 평생을 살아가며 한 번 구경해보는 것조차 힘들 거다.”
난 마치 이게 전부 자신이 모은 것들인 양 굉장히 뿌듯해하는 쟈칼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정도면 부하 된 노릇으로서도 자랑스러울 법할 것 같았다.
얼핏 보기에도 다들 제국의 보물고에서 봤던 장비들에 비해 크게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이 중에서 하나만 가지고 나갈 수 있다. 그리고 물론 무어든 한 번 집으면 무조건 그걸 택해야만 된다.”
그는 경고하듯 말을 늘어놓으며,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나를 감시하듯 뒤따라왔다.
어제 카렌한테 듣기를, 분명 마룡왕이 그녀에게 얘기해줬던 것들 중에 단검이 하나 있다고 했었지.
오래전 아직 마계가 지금처럼 평화롭지 않던 때에, 그가 체르페슈 이전의 혈마왕을 죽이고서 빼앗은 무기라고 했던가.
한 마디로 전 마왕이 쓰던 단검이 이곳에 있는 거였다.
“혹시 단검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한참 동안 이 넓은 무기고를 샅샅이 살펴보며 걸음을 옮기던 나는, 생각보다 너무 넓은 공간에 난색을 표하며 쟈칼을 돌아보았다.
“모른다. 나도 이곳에 들어오는 건 이번으로 고작 세 번째니까 말이다.”
“음….”
그런가.
나는 이제야 겨우 일할 정도 둘러본 거 같은 무기고를 슥 훑으며,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딱히 얼마 안에 골라서 나가야 되는 것처럼 시간제한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해가 중천에 뜨기 전까지는 용무를 마쳐야만 했다.
그때쯤에 정찰대의 해산을 공표한다는 모양이었으니까.
이거 곤란하게 됐군.
이럴 줄 알았으면 늦은 밤에라도 찾아오는 거였는데.
설마하니 마룡왕이 고르고 골라 넣었다는 무구들이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다.
과거 드래곤들이 그렇게 재물이나 재보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고 하던데, 용족도 그와 닮은 면이 있는 건가.
“그래도 따로 무기들을 모아놓은 곳이 없는 건 아니지. 아마 네가 찾는 건 저 가장 안쪽에 있을 거다.”
“…안쪽 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의외로군.
날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난 잠시 고민하다 저 안쪽을 가리키며 조용히 충고를 덧붙이는 그를 보고선, 짐짓 놀란 눈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음.”
쟈칼의 도움을 받아 무기들이 모여 있는 구역으로 자리를 옮긴 것까진 좋았지만, 나는 또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봉착한 난관에 난색을 표하며 침음을 흘렸다.
설마하니 단검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분명 특이할 것 없는 단순한 모양새에, 날이 통짜 아다만티움으로 만들어진 거라고 했던가.
뭐라도 다른 특징을 하나 더 알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물론 그것도 혹시나 싶어 물어보긴 했었지만, 아쉽게도 그 이상은 그녀도 듣지 못했다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 귀한 아다만티움을 통째로 쓴 단검이라니.
그런 게 어디 여럿 있을까 싶었는데…
“…어렵군.”
나는 날에서 유독 시퍼런 예기를 뿜어내는 두 개의 단검을 앞에 두고서 고민에 빠졌다.
둘 모두 용사 시절 수많은 전투를 치러오며 몇 번 눈에 담을 수 있었던, 아다만티움으로 제련된 무기가 내는 그 특유의 광택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이 중 무엇이 마왕이 쓰던 무기이냐 하는 건데.
“크흠.”
그렇게 연신 두 단검을 번갈아 보다, 하는 수 없이 나머지는 운에 맡겨야 하나 싶어 적당히 손을 뻗으려던 찰나.
나는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끄는 쟈칼을 보고선 슬쩍 그를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전하께서 썩 마음에 드신다며 통짜 아다만티움으로 된 단검을 가져오신 적이 있었지. 아마 손잡이가 적갈색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적갈색?
난 나보고 들으라는 듯 티 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를 보고선, 고민하고 있던 두 단검을 다시 살폈다.
하나는 손잡이가 검은색.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적갈색인가.
“그걸로 할 텐가?”
“…예.”
더 이상 망설임 없이 단검을 집어 든 나는, 슬쩍 가늘게 눈을 뜨며 이쪽을 살피는 쟈칼의 물음에 고개를 주억이면서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무구를 골랐으니 이걸로 끝이다. 이제 어서 나오도록.”
쟈칼은 그길로 곧장 나를 데리고 무기고 밖으로 나와, 다시 잠금 마법을 걸고선 말없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째서 도와주신 겁니까.”
나는 그를 뒤따라 지하를 벗어나며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에 물음을 던졌다.
혹시 이것도 주전파의 얼굴로 써먹기 위해 베푸는 답례인가.
쟈칼은 내 물음에 잠시 우뚝 멈춰서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찰대장에게 들었다. 듣자 하니 네가 중간계에서 아가씨를 구해줬다더군.”
“음….”
“물론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짐작한 대로, 전하의 뜻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온건파 놈들을 좀 더 수월하게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젊은 영웅이 될 네가 더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곧 있을 전쟁에서 전공을 쌓으면 쌓을수록. 우리들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릴 테니 말이다.”
그는 거기까지 얘기하고선 다시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강해져라. 네게 공을 들이는 만큼, 네 노리는 놈들에게 쉽게 목을 내어주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예.”
나는 짧게 대답을 마치고선 금방 1층 통로 밖으로 나왔다.
“충성! 쟈칼 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래, 이만 고생하도록.”
나는 무기고의 안내를 마치고 다시 제 집무실로 돌아가는 자칼의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선 방으로 되돌아갔다.
예비 영웅 대접도 나쁘지 않군.
어디 어떻게든 골수까지 이용해 먹으려고만 하던 빌어먹을 연합과는 다르게 말이야.
* * *
“그럼 다들 전쟁의 준비가 끝나기 전까지 돌아가서 몸을 추스를 수 있도록.”
와아아-
정찰대의 해산과 함께 주어진 만족스러운 보상에, 모두의 함성 소리가 공터를 가득 메웠다.
나는 곧 좌석을 비우고 마왕성으로 돌아가는 마왕과 그 측근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소란스러운 인파 속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끝났군. 당분간은 좀 편히 쉴 수 있겠어. 에릭, 너는 이제 어떡할 거냐.”
“일단 가문으로 돌아가 볼 생각이다. 정찰대가 해산했다고는 해도 곧 전쟁이 있을 테니, 그전에 할 수 있는 건 미리 다 준비해놔야겠지.”
나는 그래도 이 몸뚱이가 나름 공작가의 자제임에도 불구하고, 정찰대가 해산할 때까지 아무도 나를 모시러 온 식솔들이 없는 걸 보고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면 정찰대에서 보냈던 때보다 돌아가서가 더 바쁠지도 모르겠군.
“형님!”
“음.”
난 저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선 급하게 뛰어오는 덩치 큰 발록을 보며, 어딘가 불안한 듯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형님, 전쟁이 시작되면 따로 부대를 만드신다는 게 사실이십니까?”
“아마 그렇겠지.”
…이놈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갔나?
독립권에 관한 얘기는 아이시스에게만 전했었을 텐데.
“에릭.”
“아이시스.”
나는 발라크의 덩치에 가려져 있다 옆으로 빼꼼 모습을 드러내는 아이시스를 발견하고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녀가 그에게 직접 얘기를 꺼낸 모양이었다.
설마하니 아이시스가 멍청하게 아무한테나 그렇게 말해줬을 리는 없으니, 적어도 발라크는 확실히 믿어도 되는 것 같았다.
하긴 애초에 발록인 녀석이 온건파나 그 끄나풀일 리가 없었다.
“독립권은 어떻게 됐지?”
“성공. 에릭, 부대 만들 수 있어. 하지만 많이는 안 돼. 처음엔 분대 수준.”
“그거면 충분하다. 잘 전해줘서 고맙군.”
“…응.”
난 작게 고개를 주억이며 옅은 미소를 짓는 그녀의 머리를 잠시 살살 쓰다듬어주고선, 옆에서 무언가 말하고 싶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발라크를 향해 눈을 돌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어서 해라, 발라크.”
“예, 예!”
녀석은 군기가 바짝 들어간 듯 우렁차게 대답을 내뱉고선, 어째 어제보다 더 존경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형님. 혹시 절 형님께서 만드시는 부대에 받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음, 글쎄….”
나는 긴장한 듯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내 대답을 기다리는 녀석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아직 실력이 조금 부족하긴 해도 군말 없이 명령도 잘 듣고, 그동안 정찰대원으로서 같이 다니면서 나름 괜찮게 성장하는 모습도 보여주고는 했으니 썩 나쁘지는 않겠지.
“한 번 생각해 보마.”
“…예!”
녀석은 내가 잠깐 말없이 자신을 훑으며 고민하는 동안 불안한 듯 자꾸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곧 떨어진 내 대답에 다시 화색이 돌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형님께서 실망하지 않고 저를 거두어주실 수 있도록, 곧 전쟁이 있을 때까지 확실하게 강해져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행운을 비마.”
“그동안 건강히 지내십시오, 형님!”
나는 끝까지 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면서 사라지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슬슬 나도 돌아가 보도록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