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마룡왕의 무기고인가.”
파티가 끝나고 배정된 방으로 돌아온 나는, 푹신푹신한 침대에 누워 잠시 생각에 빠졌다.
설마하니 이번 공적으로 그런 포상을 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쟈칼이 언제든 편할 때 자기를 찾아오라고 했던가.
확실히 좋은 포상이긴 했지만, 문제는 그 안에 있는 무구들이 어떤 것들인지 전혀 모른다는 거였다.
물론 어느 걸 들고 나와도 자그마치 마왕이 모아놓은 것들이니만큼 대부분 훌륭한 장비들뿐이겠지만, 막말로 그 안에 함정이라고 할 만한 게 하나도 없으리란 법은 없었다.
이를테면 그가 아주 예전에 쓰던 장비들처럼 성능보다는 그 상징성 때문에 들어가 있는 것들이라던가.
“음.”
아무래도 나중에 카렌한테 가서 한 번 물어보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녀는 마왕의 하나뿐인 자식이니만큼 무기고에 대해 무언가 들어본 게 있을 터.
똑똑-
그렇게 한참 홀로 사색에 잠겨있을 때쯤.
나는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에릭.”
“아이시스인가. 이 밤중엔 무슨 일이지?”
“할 말 있어. 들어가도 돼?”
할 말이라.
그렇지 않아도 내일 해산하기 전에 한 번 찾아가려고 했는데, 마침 잘된 일이었다.
이번 정찰대의 성과로 인해 전쟁을 일으키자는 주전파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릴 거라고 했던가.
다만 그전에 준비해야 될 게 많으니, 새로이 군을 꾸리기 전까지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으라는 모양이었다.
마왕군과 연합간의 전쟁이 벌어진 이후에 대해선 경험하고 들은 게 많았지만, 그 이전.
특히 마계에 대해선 딱히 아는 바가 없으니, 다들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가능한 많이 정보를 수집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이 빌어먹을 몸뚱이의 기억은, 도저히 공작가의 자제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약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음. 들어와라.”
끼익-
나는 그녀를 방 안에 들이고선, 의자를 빼고 테이블에 앉았다.
“할 말이란 게 뭐냐.”
내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은 아이시스는, 멀뚱멀뚱 이쪽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릭. 혹시 온건파에 대해서 알아?”
“온건파?”
난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려고 했던 주제에 대해 먼저 얘기를 꺼내는 그녀를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카렌이 어떻게든 전쟁이 일어나려는 것을 막으려는 온건파의 수작에 훼방을 놓기 위해 자진해서 정찰대에 지원했던 것처럼, 아이시스 또한 그와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칫 전쟁을 일으킬 빌미가 될 수 있는 정찰대의 공적을 빼먹지 않고 그대로 보고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응. 전쟁을 막으려는 놈들. 평화에 썩어빠진 돼지들.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위험한 법. 전쟁에서 확실하게 이기기 위해선 온건파, 정리해야 돼.”
“으음….”
온건파를 정리해야 된다라.
나는 생각보다 직설적으로 대담한 그녀의 발언에 침음을 흘리며 슬쩍 주변을 살폈다.
혹시 어디선가 쥐새끼가 듣고 있는 건 아닐까.
다행히 적어도 근처에 누군가 숨어있는 거 같진 않았다.
“…왜 나한테 그런 말을 꺼내는 거지? 만일 내가 그 온건파의 끄나풀이면 어떡하려고.”
난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얘기를 툭 던진 아이시스를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이 작은 악마족 아가씨는.
함부로 그렇게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멍청한 녀석은 아니었을 텐데.
“으응. 에릭, 온건파 아니야.”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젓는 아이시스를 보며 눈썹을 까딱였다.
그녀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똑바로 나와 눈을 마주치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야 에릭, 누구보다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랄 사람.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그만한 실력이랑 수완을 정찰대에 들어오기 전까지 숨기고 있었을 필요가 없음. 특히 카렌은 더더욱 구할 이유가 없었음. 카렌, 주전파의 젊은 상징 같은 거니까.”
“…그런가.”
하긴 내가 온건파였다면 굳이 이렇게 전공을 쌓아 전쟁의 불씨를 지필 필요 없이, 애초에 그럴 일이 없도록 다 망쳐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 여우 같은 꼬맹이, 카렌이 노예로 붙잡혔었던 건 또 어떻게 안 거지.
…뭐 생각해보면 딱히 놀라울 것도 없나.
그 후작 놈이 용병 가젤의 목에 현상금을 걸고 사방팔방에 지명수배를 뿌렸을 테니, 거기서 소문이 난 거겠지.
“그럼 나한테 그 얘기를 꺼낸 이유가 뭐지? 확실하게 주전파에 가담이라도 해달라는 건가?
방금 그걸로 어느 정도 의심은 거두어졌지만, 아직 의문이 다 풀린 것은 아니었다.
굳이 이 밤중에 나를 찾아와서 이런 얘기를 꺼냈다는 건, 무언가 원하는 게 있다는 소린데…
“…응. 에릭, 마왕이 공을 치하하는 자리에서 직접 동족의 수치라고 얘기했을 정도로 유명하고 취급이 안 좋았던 뱀파이어. 하지만 이번에 공적으로 당당하게 정찰대장인 나를 제치고 마룡왕의 무기고까지 열었음. 에릭, 단순한 일등공신이 아니라 성공의 상징. 능력이 안 돼서, 형편이 안 좋아서 평생 계층 상승은 꿈도 못 꾸던 이들의 희망.”
성공의 상징, 그리고 피지배층의 희망이라.
나는 아이시스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동족의 수치라고 불리며 가문 안팎으로 멸시받던 내가 정찰대에 들어가 공적을 세우고 기어코 마룡왕의 총애를 받아 그의 무기고까지 열어낸 것을, 곧 있을 전쟁에 대비해 병사들을 모으는 용도로 쓰겠다는 얘기였다.
쉽게 말하자면 선전용 젊은 영웅 정도가 되겠지.
“전쟁은 소수의 강한 사람들만 하는 게 아니니까. 이기려면 무엇보다 병사들의 수가 가장 중요. 그러기 위해선 에릭이 꼭 필요해.”
“흐음….”
확실히 나쁘지 않은 얘기였다.
영웅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승리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법이니까.
특히나 그게 열악한 환경에서 오로지 실력으로 거머쥔 자리라면, 자원의 고갈과 계속된 평화로 인해 더 이상 위로 올라갈 사다리가 끊어져버린 이 마계에서 출세를 원하는 이들의 가슴에 더욱 화끈하게 불을 지피게 될 터였다.
그만큼 온건파의 입지가 좁아지는 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제 무기고까지 열어주겠다고 한 건가.
주전파도 보기보다 정치적인 수완이 그리 나쁘지는 않은 거 같았다.
헛웃음조차 안 나오던 정찰대의 꼬라지를 생각해보면 온건파에게 마냥 밀리기만 하는 바보들인 줄만 알았는데.
“…좋아.”
어차피 내 복수를 위해서라도, 전쟁에 방해가 되는 온건파의 세력을 조금이라도 더 줄여놓을 필요가 있었다.
설마하니 그놈들이 결국 전쟁이 일어났다고 해서 쉽사리 꽁무니를 빼지는 않을 테니까.
어쩌면 그건 그것대로 기회로 삼아, 전쟁을 주도한 주전파를 아예 적들과 같이 처리해버릴 계획을 짜고 있을지도 몰랐다.
저쪽에서 나를 이용해먹겠다는 속셈이 뻔히 보이긴 했지만, 그게 꼭 내게 해가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게 내 복수에 도움이 됐으면 됐지.
절대 손해를 볼 일은 없었다.
그렇게 민심을 휘어잡기 위해 나를 써먹을 생각이라면, 그만큼 주전파 쪽에서도 내가 빛나보이게끔 밀어줘야만 할 테니까.
“그럼….”
“하지만 그 전에, 뭘 해줄 수 있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쉽게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내가 그들에게 그만큼 매력적인 패라면, 조금은 무리한 요구도 받아들여줄 수 있겠지.
“…뭐든지. 자기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괜찮다고 하셨어.”
나는 썩 만족스러운 대답에 고개를 주억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자기가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걸 보면 아마 꽤 높으신 분이겠지.
어쩌면 마룡왕 본인일지도 몰랐다.
“독립권.”
“…응?”
“전쟁에서 따로 부대를 운영하고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면 좋겠군.”
그렇지 않아도 이걸 어떻게 따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올 줄이야.
“가능하겠나?”
다른 건 안 되더라도 이것만큼은 무조건 챙겨야 했다.
마왕군에서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지식을 제대로 써먹기 위해선, 적어도 누군가의 부대에 속해 명령을 받으며 움직임을 제한당하는 일만큼은 없어야 했다.
“…응. 말씀드려볼게.”
“음. 아, 그리고 혹시 뱀파이어들 중에 누구 유명한 온건파가 있나? 그쪽들 눈엔 내가 눈엣가시일 테니, 미리 알아두고 조심하는 편이 나을 거 같아서 말이야.”
나는 일을 마치고 이만 일어서려는 아이시스를 불러 멈춰 세웠다.
가능하면 다시 군을 꾸릴 때까지 종족 내에서 내 입지 좀 다져놓을 겸, 방해가 될 놈들도 치워버릴 수 있으면 좋겠지.
“뱀파이어….”
그녀는 문 앞에 뚝 멈춰선 잠시 고민하더니 곧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른 가이오스.”
“카른….”
“에릭, 몰랐어?”
“음? 아, 숙부와는 별로 인연이 없어서 말이다. 알고 있겠지만, 가문에서 내 취급은 완전 꽝이잖나.”
“…응.”
끼익-
나는 방을 나서는 아이시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른 가이오스.
그는 다름 아닌 이 몸뚱이의 숙부였다.
* * *
“무기고에 말인가? 흐음….”
아이시스를 보내고 나서 잠시 뒤 카렌을 찾은 나는, 그녀에게 무기고에 있는 쓸 만한 장비들에 대해 물었다.
“잘 모르겠군. 아쉽지만 이 몸도 아버지의 무기고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말이다.”
“…그런가.”
나는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아쉬운 대답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된 이상 직접 들어가서 살펴보는 수밖에 없나.
물론 용사 시절 오랜 시간 전장에서 구른 만큼 상황에 따라 여러 무기도 써보고 또 많은 적들과 무기를 맞대본지라 완전히 보는 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전문가만큼은 아니었기에 마음 한편으로는 불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저 꽝이 없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음. 하지만 아버지께서 무기고에 넣어 놓은 것들 중에 몇 개 정도는 얘기를 해주신 적이 있었다.”
그렇게 아쉬움을 안고 방을 나서려던 찰나.
난 그녀의 입에서 들려온 반가운 말에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궁금한가?”
“음.”
“후후. 그럼 어디 한 번 부탁해봐라. 자, 어서 이 몸에게 부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해 보거라!”
“부탁한다. 부디 이야기를 좀 들려줬으면 좋겠군.”
“으, 응?”
나는 갑자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팔짱을 끼는 그녀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원하는 대로 부탁해줬다.
안에서 제대로 된 무기만 구해서 나올 수 있다면 그 정도쯤이야 못 해줄 게 뭐가 있겠는가.
오히려 고작 이런 걸로 기회다 싶어 샘을 부리는 칠칠맞은 용족의 모습이 마냥 귀여울 뿐이었다.
“그, 그렇게 나오면 이 몸이 뭔가 되게 속 좁은 사람인 것 같지 않느냐! 크흠.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 알려주도록 하겠다.”
난 멋쩍은지 슬쩍 고개를 돌리며 볼을 붉히는 카렌을 가만히 바라보며, 곧 그녀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