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30화 (30/200)

제30화

“훌륭하다. 크로셀 가문의 어린 마법사여. 그 여리고 작은 몸으로 정찰대를 이끌어 흠잡을 데 없는 결과를 세워 올린 공은 과연 칭찬할만하다.”

“황송합니다, 전하.”

“이에 정찰대장, 아이시스 크로셀에게 금화 오백과 1급 훈장을 하사한다.”

짝짝짝-

나는 쏟아지는 박수갈채에도, 마왕에게 직접 공로를 인정받는 영예로운 순간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서있는 아이시스를 슬쩍 바라봤다.

보통 악마족들의 성격이 제 가계능력을 따라 간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면 가문 내에서도 유별난 편이 아닐까 싶었다.

“기특하구나. 언젠가 크로셀 가문의 여식이 그리 총명하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는데, 소문 이상이로구나. 네 아버지가 좋아하시겠어.”

난 그러다 악마왕, 벨제붑의 입에서 튀어나온 아버지라는 말에 흠칫 입 꼬리를 씰룩이는 그녀를 보고선 속으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뭐, 그래도 아주 무뚝뚝하기만 한 건 아닌가.

하긴 전에 같이 다닐 적에도 가끔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고는 했었지.

“그러고 보니 장남도 썩 능력이 출중한 편이었지. 아이베른이었던가. 다음대의 크로셀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감사합니다.”

아이시스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그녀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는 짙은 보라색 머리칼의 노인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선 몸을 돌렸다.

겉으로는 태연하게 내 옆으로 돌아오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이 일순간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다시 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거 아무래도 남매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모양인데.

“에릭 가이오스.”

“예.”

나는 조용히 내 이름을 호명하는 카르카쉬를 보며, 아이시스에게서 눈을 돌렸다.

무슨 일인지에 대해선 나중에 물어보면 되겠지.

어차피 연합을 박살내기 위한 내 복수에 방해가 될 온건파 놈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선, 그녀를 따로 한 번 만나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흐음….”

마룡왕의 앞에 선 나는, 어째선지 뜸을 들이며 나를 위아래로 자세히 훑어보는 그를 보고선 눈썹을 꿈틀거렸다.

차마 여기서 겉으로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 마치 나를 품평하듯 가만히 살피는 시선이 굉장히 불쾌했다.

“…가이오스 가문의 젊은 흡혈귀여. 중간계의 서로 다른 종족들 사이의 갈등을 부추기고, 국지전을 일으켜 그들을 갈라놓은 공적은 가히 칭송할 만하다.”

“과찬이십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흥분할 거 없다.

그저 이 몸뚱이의 소문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조금 당황한 것뿐이겠지.

“하여 에릭 가이오스, 이 전도유망한 뱀파이어에게 금화 일천과 1급 훈장. 그리고 본인의 무기고를 한 번 열 수 있는 기회를 하사한다.”

쾅-!

“마왕 전하! 그것은….”

난 카르카쉬가 제 무기고를 열어주겠다는 말에 깜짝 놀라 자리도 잊고 사회대를 내리친 쟈칼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마왕의 무기고이니만큼 썩 괜찮은 물건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반응을 보아하니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닌 모양이었다.

“…쟈칼.”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미 결정한 일이다. 이 이상 토 달지 말도록.”

카르카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물러나는 그를 잠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곧 다시 내게로 눈을 돌렸다.

“…소란을 피웠군. 이만 가 봐도 좋다.”

나는 슬쩍 체르페슈를 향해 턱짓하는 그를 따라, 창백한 인상으로 왕좌에 앉아 꼿꼿이 등을 받치고 있는 사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많이 컸구나.”

잠시 말없이 내 모습을 두 눈에 담던 마왕은, 곧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반쪽짜리 뱀파이어, 동족의 수치. 설마하니 그런 네가 이번 원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올 줄은 몰랐다.”

“체르페슈!”

나는 공적을 치하하는 자리에서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 몸뚱이의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입에 담는 체르페슈와, 당황하며 그를 돌아보는 투마왕을 보며 지그시 눈을 좁혔다.

역시 아무리 그래도 제 자식에게 창피를 준 나를 곱게 봐줄 수는 없다는 건가.

“이걸로 카발, 그 녀석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겠구나. 제 아픈 손가락이 이리도 훌륭하게 커서 돌아왔으니.”

카발.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가이오스가의 당주, 이 몸뚱이의 아버지 얘기를 꺼내는 그를 짐짓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빈말이 아니라, 마치 오랜 친우의 일을 떠올리는 듯 감정이 서려있었다.

하긴 가이오스가 공작가문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아주 특별할 것도 아니었다.

역시 다른 건 몰라도 이 몸뚱이가 가문 하나만큼은 썩 쓸 만하단 말이지.

“젊은 동족이여, 네가 자랑스럽구나.”

난 곧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와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는 체르페슈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황송합니다.”

이거 의외로군.

나는 예상과 달리 오히려 끝까지 뿌듯한 표정으로 왕좌로 돌아가는 그를 보고선 천천히 단상을 내려왔다.

혈마왕이 내게 호의를 보인다라.

그가 진심으로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 중요했다.

내가 마왕의 호의를 사고 있다는 사람들의 인식.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써먹을 데가 많았으니까.

찰그랑-

거기에 이 묵직한 주머니까지.

금화 천 개가 정확히 어느 정도 가치를 지녔는지는 몰라도, 일등공신에게 내리는 포상이니만큼 절대 적은 돈은 아닐 터였다.

이 몸뚱이의 기억 속에서 가문의 기사가 받던 월급이 대강 금화 열 개 정도였으니, 썩 괜찮은 장비 여럿 정도는 거뜬히 구매할 수 있는 액수일 터.

나는 주머니에 가득히 든, 앞뒤로 중간계의 것과는 다른 문양이 새겨져 있는 마계의 금화를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형님! 마룡왕님의 무기고라니… 역시 대단하십니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답지 않게 흥분하는 발라크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본인의 일인 양 순수하게 기뻐해주는 그 모습에, 불쑥 정이라도 생길 것만 같았다.

“…이건 이 몸도 놀라지 않을 수 없구나. 아버지께서 무기고를 열어주신 것은 적어도 우리 용족을 제외하고서는 네가 처음일 거다, 에릭.”

“음? 그 정도인가?”

난 이어진 카렌의 말에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생각보다 훨씬 파격적인 포상이었군.

단순히 마왕의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을 정도로 훌륭한 장비를 내어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족에게 문을 열어주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가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쟈칼이 그렇게나 당황했던 건가.

남들이 보기엔 자칫 카르카쉬가 나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걸로도 모자라, 어쩌면 아예 밀어주려는 걸로 비춰질지도 몰랐다.

“…확실히 카렌, 네 말대로 신상필벌이 아주 확실하군.”

“흥, 그야 당연한 소리 말거라.”

나는 말은 그렇게 해도 제 아버지의 칭찬에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가슴을 쭉 펴 보이는 그녀를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찌됐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얻은 게 많은 하루였다.

뭐만 하면 용사니까, 아니면 한낱 이방인들에게 그간 먹을 것과 잘 곳을 내어줬으니 당연히 그랬어야 할 일이라 치부하던 연합 때와는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말이다.

* * *

“카르카쉬! 진심인가? 다른 건 몰라도 무기고에 직접 모은 보물들만큼은 악착같이도 아끼는 네가, 같은 용족도 아니고 고작 뱀파이어 꼬맹이에게 문을 열다니!”

빌어먹을, 또 시작이군.

파티가 끝나고, 카르카쉬는 제 어깨를 붙잡으며 소리치는 시끄러운 발록을 보고선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는 마음에 안 든다더니. 혹시 체르페슈, 그 재수 없는 흡혈귀 놈의 혈육을 가지고 노는 걸 보고 생각이 바뀌기라도 한 거냐? 흐흐, 하긴. 그 녀석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순간 얼굴에 핏기가 돌더군.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도 그런 꼴을 당했으니 아비로서 화가 치밀어오를 수밖에. 그 문제아가 제 친우의 아들만 아니었더라도 지금쯤 파티장이 엉망이 돼있었겠지.”

“그런 게 아니다. 여전히 그 놈팽이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아. 그저 그만한 공적을 세웠으니 그에 걸맞은 포상을 내렸을 뿐이다.”

“뭐? 으하하하! 쟈칼, 그 고지식한 놈이 네 정적의 목줄이 될 수도 있는 약점을 캐왔을 때도 무기고만큼은 허락하지 않았던 네가, 아무리 정찰대의 일등공신이라고 한들 그리 쉽게 문을 열어줬다고?”

악투스는 제 친우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그게 아니지. 그 호리호리한 놈이 마음에 안 드는 것도, 그런데도 굳이 무리해가며 무기고를 여는 것도. 전부 다 네 하나뿐인 딸 때문이잖나. 그 어린 것이 제 아비를 위해 시궁창 같은 정찰대에 나서겠다고 했을 때부터 당장 어제까지, 몇 달을 자식걱정에 끼니도 제대로 못 챙기고 다녔다지?”

“금시초문이군. 그 아이가 선택한 일이다. 걱정은 무슨, 어련히 알아서 잘하리라 믿었다.”

덩치 큰 발록은 여전히 제 딸 얘기만 나오면 솔직해지지 못하는 고집 센 용족을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그래, 그렇겠지. 그나저나 아까 보니 둘이 꽤 사이가 좋아 보이더군. 카렌, 그 조그만 것이 네 앞이 아닌 곳에서 그렇게 웃는 건 처음본 거 같은데 말이야.”

“…뭐? 방금 뭐라고 했나.”

“어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체면 때문에 파티장 음식은 입에 대보지도 못하고 나왔더니 배에서 밥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구만. 어디 갈비찜이 좀 남았으려나 모르겠네. 여기 요리사가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만큼은 아주 일품인데 말이야.”

카르카쉬는 너스레를 떨며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하는 악투스를 잠시 말없이 노려보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선 집무실로 들어갔다.

“쟈칼.”

“예, 전하.”

“카렌과 같이 있던 그 뱀파이어. 분명 체르페슈가 골머리를 썩일 정도의 문제아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가이오스 가의 셋째가 날 때부터 피를 두려워했다고 들었습니다.”

흡혈귀가 피를 두려워한다라.

“이상하군. 뱀파이어는 피를 마시지 않으면 강해질 수 없을 텐데. 그런 놈이 갑자기 정찰대에서 그만큼이나 전공을 쌓았단 말인가?”

“소인도 그게 의문이었습니다만, 정찰대장이 보고한 그대로 다른 정찰대원들의 입에서도 그의 공적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적어도 그가 세운 공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한 번 자세히 조사해보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카르카쉬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집무실을 나서는 쟈칼을 보고선, 잠시 의자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다른 종족에게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의 문제아가 갑작스레 일등공신이 되어 돌아오다니. 단순히 마음을 고쳐먹었느니 같은 걸로 설명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그 젊은 뱀파이어의 행보를 곱씹으며, 눈에 넣어도 전혀 아프지 않을 자신의 자랑을 떠올렸다.

“카렌….”

절대 그 아이에게, 그렇게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 놈을 계속 붙여둘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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