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29화 (29/200)

제29화

카앙-!

날과 날이 부딪치며 시뻘건 불똥이 튀었다.

내 목을 노리고 날아든 검을 가볍게 쳐낸 나는, 곧바로 놈의 품으로 파고들어 팔을 휘둘렀다.

촤라락-

“큭, 되다만 반푼이 주제에 감히!”

단검이 녀석의 목에 닿기 직전.

나는 수많은 박쥐 떼로 흩어져 뒤로 물러나는 놈을 보며 조용히 혀를 찼다.

저런 식으로 나오겠다는 건가.

“음.”

난 멀찍이 뒤로 물러서 베일 뻔한 목을 슥 훑는 녀석을 살피며,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적당히 목에 생채기 정도만 내고서 마무리하려고 했건만, 이래서야 얌전히 끝내기는 어려울 거 같았다.

녀석이 마왕의 자식만 아니었더라도 아예 신체를 변형할 틈조차 주지 않고 베어버리는 걸로 끝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수 없나.”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놈이 지칠 때까지 놀아주는 수밖에.

카앙-! 캉-!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내게 덤벼드는 놈의 검을 가볍게 막으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꼴에 마왕의 핏줄이라고 생각보다 몸놀림이 제법이었지만, 이번 원정에서 실전이라고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보잘 거 없는 놈들만 상대하다 돌아온 건지.

기교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정직한 공격들뿐이었다.

“흐흐, 언제까지 막고만 있을 거냐. 처음의 그 자신감은 어디로 갔지?”

검이 들어올 곳에 적당히 먼저 단검을 대는 것으로 녀석의 공격을 전부 튕겨내고 있던 나는, 금세 자신만만해져선 나를 도발해오는 놈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며 자신의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내 모습을 보고선, 지금 본인이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

괘씸하군.

캉-! 카가각-

나는 아무래도 갈수록 자신감이 붙는 모양인지 점점 자세가 커지는 놈을 보며, 내가 뒤로 빠지는 만큼 녀석이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올 때를 노려 옆으로 슥 빠져나가면서 슬쩍 발을 들어올렸다.

“언제까지 겁쟁이처럼 막기만….”

“말이 많군.”

쿵-

“윽!”

난 보기 좋게 발이 걸려 앞으로 자빠진 놈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신체 능력은 나쁘지 않았으나 검술이 조약하기 짝이 없었다.

저보다 약한 놈들한테는 단순히 성능 좋은 몸뚱이로 밀어붙이기만 해도 가볍게 이길 수 있었을 테지만, 내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런 형편없는 녀석이 마왕의 핏줄이라니.

“크으… 네놈!”

“계속할 건가? 이미 승부는 난 거 같은데.”

“닥쳐라! 내가, 내가 너 같은 반푼이 따위에게 질 리가….”

“그만.”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시뻘겋게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일어서 다시 검을 휘두르려던 놈은, 홀 입구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혈마왕, 체르페슈 블라드.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이쪽을 바라보는 창백한 인상의 마왕을 보고선, 조용히 무기를 집어넣었다.

“발페르, 이게 무슨 추태냐.”

“아, 아버지! 그게….”

“됐다.”

난 자신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다 곧 말없이 고개를 돌리는 제 아비의 모습에 이를 악무는 녀석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자리로 돌아갔다.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음, 역시 대단하군. 아무리 그놈이 조금 모자란 녀석이라고는 해도, 마왕의 핏줄을 그렇게 어린애 다루듯 가지고 놀다니.”

나는 설마 이렇게까지 쉽게 이길 줄은 몰랐다는 듯 짐짓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카렌을 보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괜찮은 건가, 에릭? 괜히 이것 때문에 혈마왕의 분노를 사는 건 아닌가 모르겠군.”

혈마왕의 분노라.

나는 카렌의 말에 슬쩍 고개를 돌려, 다른 마왕들과 함께 단상 위에 준비된 왕좌에 앉은 체르페슈를 바라봤다.

“음….”

“왜, 왜 그러나. 역시 무슨 문제가… 그,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무엇하면 이 몸이 아버지께 말씀을 드려서라도….”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 나는, 제 자식에게 창피를 안겨준 나를 예상외로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고선 고개를 갸웃했다.

의외로군.

인간에게 붙잡힌 막내아들을 구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단신으로 도시를 습격했던 걸 보면, 자식애가 유별난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걱정하진 않아도 될 거 같군.”

“거, 걱정이라니… 그런 게 아니다! 크흠. 그저 에릭, 네가 발페르 그놈과 싸우게 된 데에는 어느 정도 이 몸의 책임도 있으니 그랬을 뿐이다.”

책임이라.

하긴 마왕의 흥미를 사는 게 꼭 나에게 득이 되라는 법은 없으니, 보험 하나 정도는 들어놔서 나쁠 게 없겠지.

나는 뭐가 그리 쑥스러운지 슬쩍 눈을 돌리는 카렌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말로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그때는 좀 부탁하지.”

“음! 이 몸만 믿어라.”

난 가슴을 피며 자신 있게 고개를 주억이는 그녀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녀석도 아니고 카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만큼, 꽤나 안심이 되는 소리였다.

역시 마왕의 딸이라는 뒷배가 좋긴 좋았다.

“모두들 수고 많았다.”

단상에서부터 힘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가운데 왕좌에 올라 천천히 입을 여는 마룡왕, 카르카쉬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단순히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다 떨릴 정도의 강함.

과연, 괜히 일곱 마왕들 중에서도 최강이 아니라는 걸까.

“정찰대로서 훌륭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그에 대한 포상은 물론, 다들 공적에 따라서 추가로 큰 상이 주어질 것이다. 쟈칼!”

“예, 전하.”

난 카르카쉬의 부름에 단상으로 올라와 손에 쥔 종이를 살피는 검은 머리칼의 용족을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쟈칼 니드호그.

마룡왕의 사천왕 중 한 명이자, 항상 카르카쉬의 옆에서 그를 보필했던 검은 재앙.

나는 용사 시절, 언젠가 마룡왕을 노릴 때를 대비해 동료들의 희생으로 그와 떨어트린 녀석을 암살하러 갔던 때를 떠올렸다.

이미 두 명의 용사를 상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틈을 노리고 들어간 내 기습을 보기 좋게 막아냈던가.

결국엔 그 머리에 단검을 깊숙이 박아 넣어주긴 했지만, 기어코 본래 상대하고 있던 둘을 저승길 동무로 삼았을 정도로 강력한 놈이었다.

아마 실력으로 따지자면 카르카쉬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른 마왕들에 필적할 정도겠지.

“음. 아무래도 쟈칼 아저씨가 사회를 맡는 모양이군.”

아저씨라.

나는 마왕에 필적하는 강자를 마치 동네 아저씨처럼 말하는 카렌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역시 마왕의 따님은 아는 사람들의 스케일도 남다르군.

나로서도 잘된 일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내 편에 서있는 동안에는, 그들 또한 내가 써먹을 수 있는 인맥 중 하나가 되는 거였으니까.

“셀레스트, 발라크. 올라오도록.”

“발라크, 축하한다. 뭐하고 있나. 어서 올라가봐라.”

“예, 예? 저 말씀이십니까?”

“그럼 여기 다른 발라크가 또 있겠나? 흥, 하여튼 둔하기는.”

나는 카렌의 재촉에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발라크를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나와 같이 다니면서 그 또한 공적이 꽤 쌓인 모양이었다.

“작지만 어엿한 무리를 꾸린 늑대인간과 어리지만 한 사람의 전사로서 충분히 단련된 발록이여. 둘 모두 아주 훌륭한 전공을 세워주었다.”

쟈칼의 손짓에 따라 단상 위에 오른 두 사람의 앞으로, 금화 백 개에 달하는 포상과 훈장이 주어졌다.

더불어 각자 종족의 마왕이 직접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는 영예와 함께, 쏟아지는 박수갈채를 받으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크흑, 형님….”

“다 큰 사내자식이 눈물은. 고작 그런 걸로 울지 마라. 앞으로 이보다 대단한 걸 몇 번이고 더 받게 될 텐데, 그때마다 매번 이럴 거냐.”

“흡… 아, 아닙니다.”

나는 그 무뚝뚝한 녀석이 감동의 눈물을 줄줄 흘리는 걸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자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인정받는 걸 삶의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는 발록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발록, 그것도 자그마치 마왕이 직접 자신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준 것 아닌가.

“익숙해져라. 앞으로도 나를 따르려면 그래야만 할 거다.”

“혀, 형님….”

난 감동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발라크를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그러고 있을 거면 다른 자리로 가서 앉아라. 괜히 옆에 있는 이 몸이 다 부끄러워지는구나.”

“카렌 레비아탄, 릴리아나 아스모데우스.”

“음. 금방 다녀오마.”

나는 호명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 있게 성큼성큼 단상 위로 올라가는 카렌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제 딴에는 티가 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살짝 올라간 입 꼬리와 꼭 쥔 주먹에서 그녀 또한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긴 평소에 그리 자랑스러워하던 제 아버지에게 직접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나마 저것도 제 체면을 신경 쓴답시고 많이 참고 있는 거겠지.

“음?”

난 금방 훈장을 부여받고 돌아서며, 전에 포탈 앞에서 마주쳤을 때와는 한껏 달라진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릴리아나를 보고선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그녀는 단상에서 내려와 제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내게 눈길을 보내며, 앙증맞은 하트모양 꼬리를 보란 듯이 살랑거렸다.

뭐 유혹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하긴 전에도 전쟁통에 비어버린 사천왕의 자리를 조금 모자란 실력으로도 금세 꿰찼던 걸 생각해보면, 그 능력만큼이나 출세욕도 어마어마하겠지.

눈앞에서 내가 마왕의 자식을 농락하고 가지고 노는 모습을 봤으니, 전에 카렌과 아이시스가 했던 말이 마냥 거짓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테고.

아마 나중을 위해 미리 내게 눈도장이라도 찍어놓으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귀엽군.”

“귀, 귀엽… 뭐가 말이냐, 에릭?”

“아무것도 아니다.”

이 몸뚱이에 대한 소문을 믿고서 대놓고 무시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꼬리를 흔들다니.

뭐, 상관없나.

저쪽이 나를 원한다면 나 또한 언젠가 그녀를 이용해먹으면 될 뿐이었다.

특히나 그녀의 가문, 아스모데우스는 다른 서큐버스들과 달리 아주 특별하니까 말이다.

“아이시스 크로셀 그리고 에릭 가이오스.”

드디어인가.

“축하드립니다, 형님!”

“음. 정찰대장인 꼬맹이와 같이 나가는 걸 보아하니 역시 네가 일등공신인 것 같구나. 축하한다, 에릭.”

나는 두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일등공신 정도면 뭐 특별한 포상이라도 내려주려나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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