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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28화 (28/200)

제28화

마왕성에 도착해 방을 배정받은 나는, 안내받은 대로 곧바로 짐을 풀고 나와 1층 중앙의 거대한 홀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형님.”

“음. 생각보다 훨씬 넓고 화려하군. 높으신 분들도 많이 보이는 거 같고.”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정찰대원들을 위해 준비했다던 파티는 생각보다 훨씬 본격적이었다.

성 안에 방을 내어주는 것만 해도 파격적인 처사가 아닐 수 없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준비를 했을 줄이야.

하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마왕의 이름을 걸고 개선장군들을 맞이하는 자리이니만큼 소홀히 하지는 않았을 터.

게다가 이 자리가 마냥 정찰대의 귀환을 축하하고 그들의 공을 치하하기 위한 것만은 아님을 생각하면, 그리 과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앞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만큼, 이처럼 병사들을 확실히 대우해주겠다는 걸 보여주려는 속셈인 거겠지.

그렇게 해서 여론을 조금이라도 가져올 수 있다면 온건파에게 충분히 압박을 넣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형님은 어느 부대로 들어가실 생각입니까? 이번 원정에서 가장 혁혁한 공적을 세우셨으니 곧 어디서든 제안이 올 텐데 말입니다. 역시 같은 뱀파이어이신 혈마왕님의 아래로 가실 겁니까?”

나는 뷔페처럼 늘여져 있는 음식들을 받기 위해 준비된 접시를 꺼내들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러고 보니 형님께선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으음.”

난 제멋대로 생각을 마치고선 무안한 듯 헛기침을 내뱉는 발라크를 보고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찰대로 다닐 때야 온건파 놈들이 부린 수작질에 다들 뿔뿔이 흩어진 터라 어느 정도 개인행동이 가능했었지만, 곧 본격적으로 마왕군의 본대가 나서 전쟁을 시작하고 나면 그때처럼 따로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수천수만 명으로 이루어진 부대에 소속되어,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받아 움직여야만 했다.

그나마 이번에 공을 세운 게 있으니만큼 어디 말단 병사로 들어가지는 않을 테지만, 만에 하나 중책을 맡아 장군이 된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복수고 뭐고 탈영으로 붙잡혀 처형되고 말 터.

그렇기에 이번에 공적을 세운 자들을 위주로 자기들 부대에 끼워 넣으려고 할 일곱 마왕군의 스카우터들을 상대로, 어떻게든 자율행동을 보장받을 수 있는 조건을 받아내야만 했다.

“에릭, 음식을 푸다 말고 가만히 서서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나. 혹시 전공에 대한 거라면 걱정 마라. 네가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든, 그걸로 네가 세운 공이 가려지지는 않을 테니까.”

“…카렌.”

나는 언제 왔는지 옆에서 집게를 들며 말을 붙여오는 카렌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있었지.

예로부터 인맥 좋다는 게 무슨 말이겠는가.

정 안되겠다 싶으면 그녀를 통해 협상테이블에 앉으면 그만이었다.

물론 아무리 뒷배가 좋아도 실력이 아예 없다면야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내가 어디 가서 전공이 빠지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그마치 마왕의 딸이 여기 있는데, 괜한 고민을 하고 있었군.

“아. 이건 지나치지 말고 꼭 먹어라. 우리 요리사들이 다른 것도 그렇지만 특히 이 갈비찜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하거든.”

난 오랜만에 제 집으로 돌아와서 기분이 좋은지, 편한 미소를 지으며 고기를 왕창 담아가는 그녀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집주인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확실히 자신하는 만큼 냄새도 그렇고 색깔도 그렇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군.

“발라크.”

“예, 형님.”

적당히 접시를 채우고 먼저 자리를 잡은 발라크의 옆에 앉은 나는, 같이 들고 온 음료를 한잔 들이키고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어느 부대로 들어갈 생각이냐.”

아까 당연하다는 듯이 나한테 뱀파이어 쪽으로 갈 거냐고 물었던 걸 떠올려보면, 아마 발록들과 함께 하려고 하지 않을까.

녀석 또한 나와 같이 돌아다니며 자연스레 쌓은 전공이 있으니, 원한다면 나름 괜찮은 대우와 그럴싸한 직책을 받을 수 있을 터.

조금 어리숙하기는 해도 시키는 일은 군말 없이 잘 따라서 나름 쓸 만한 녀석이었는데, 아쉽게 됐군.

“저야 당연히 형님만 괜찮으시다면 옆에서 계속 모시고 싶습니다만….”

나는 슬쩍 내 눈치를 보며 허락을 구하는 그를 보며, 씨익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놈은 그런 녀석이었지.

“둘이서 무슨 얘기를 그리 즐겁게들 나누고 있나.”

난 발라크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접시 위에 한가득 음식을 담아온 카렌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용족들이 상당한 대식가라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설마하니 그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전에 같이 다니는 동안에는 그만큼 먹을 게 쌓여있지 않아서 자제하고 살았던 모양이었다.

“음? 왜 안 먹고 가만히 이 몸의 접시만 바라보고 있나, 에릭. 아, 혹시 이중에 맛보고 싶은 거라도 있는 건가? 자, 궁금하면 한 번 먹어봐라.”

나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고기들을 순식간에 줄여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나를 향해 두툼한 스테이크 한 점을 찍어 내미는 그녀를 보며,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참 복스럽게도 먹는군.

“그보다 아이시스는 어디 있지? 이제 얼추 다들 온 거 같은데 그녀만 보이질 않는군.”

“녀석이라면 지금쯤 아버지께 보고를 드리고 있을 거다.”

그런가.

가능하면 내 공적들 좀 잘 말해주고 있으면 좋겠군.

뭐 그녀라면 어련히 알아서 잘 해주겠지.

난 조금 무뚝뚝하지만 똑 부러지는 그 작은 소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마룡왕님네 공주님 아니야?”

이후로 한창 썩 만족스러운 식사를 느긋하게 즐기고 있던 중.

나는 어딘가 경박하면서도 꽤 반가워하는 목소리와 함께 내 맞은편 자리에 앉는 남자를 보며, 조용히 인상을 찌푸렸다.

잿빛 머리에 나처럼 시뻘건 눈. 그리고 씨익 미소 짓는 입가에 살며시 삐져나온 날카로운 송곳니.

뱀파이어인가.

난 꽤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얼굴의 미남자를 잠시 바라보다, 곧 그와 친분이 있어 보이는 카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발페르 블라드.”

아, 이 녀석이 바로 그놈인가.

나는 조용히 남자의 이름을 읊조리며 입술을 꾹 깨무는 그녀를 보고선, 그제야 그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전쟁 초기, 인류 제국의 도시에 잠입해 출정 계획과 병력의 규모를 재다가 꼬리가 밟혀 붙잡힌 혈마왕의 아픈 손가락.

비록 그러고 나서 곧장 자기 막내아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마왕으로 인해 도시가 초토화되고 무사히 풀려나긴 했지만, 이후로 어디 후방 보급부대로 좌천이라도 당했는지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던 별 볼일 없는 놈이었다.

“포탈 앞에 아무도 없어서 다들 어디 갔나 했더니, 먼저 넘어가서 쉬고 있었을 줄이야. 적어도 카렌, 너라면 조금 기다려줄 줄 알았는데. 유이하게 정찰대에 참여했던 같은 마왕의 핏줄끼리 이렇게 정이 없어서야.”

“…함부로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하, 까칠하기는 여전하구만. 그보다 옆에 그 두 녀석들은 뭐냐? 네 시종이냐?”

난 명백히 아랫것을 보는 시선으로 이쪽을 살피는 녀석을 보며 말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저 나불대는 주둥이를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왕의 아들을 해코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제멋대로 지껄이기 좋아하는 혓바닥은 아직도 붙어있는 건가. 그보다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합석하지 말아주겠나? 아니, 그냥 우리가 옮기지. 에릭, 일어나지.”

나는 마찬가지로 인상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카렌을 따라, 녀석을 무시하고 등을 돌렸다.

“하, 잠깐만. 에릭? 설마 그 반푼이 에릭 가이오스?”

하지만 놈은 우리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철거머리마냥 계속 따라붙었다.

구질구질하게 굴기는.

“아하하하! 카렌 너, 그놈이 어떤 녀석인지는 알고 그렇게 같이 다니는 거냐?”

“흥, 네놈이야말로 에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함부로 그 더러운 주둥이를 나불거리지 마라. 너 같은 게 백 명, 천 명이 모여도 이 녀석의 발끝 하나 따라잡을 수 없으니까.”

결국 참다못한 카렌이 한 마디 쏘아붙이자, 녀석은 말을 잃고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트렸다.

방금 전까지 일방적으로 무시당하던 거야 그녀가 자신과 같은 마왕의 핏줄인데다가 원래 그런 성격이기도 하니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자기와 같은 뱀파이어. 그것도 종족의 수치라고 불리던 나와 비교당하는 건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지 않아도 출신이 출신인지라 이목을 끄는 두 사람이 적잖이 소란을 피우고 있던 만큼 주변의 시선을 끌고 있는 와중에, 자존심에 흠이 가다 못해 부서지는 얘기를 들었으니 당연하겠지.

“…뭐? 내가, 그 반푼이보다 못하다고?”

녀석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면서까지 이쪽을 노려보다, 곧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며 자신이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집어던졌다.

짜악-

“에릭 가이오스, 이 빌어먹을 종족의 수치가… 도대체 무슨 수로 마왕의 딸을 구슬린 건지는 몰라도, 감히 나를 모욕한 값을 치러야 될 거다.”

…뭐?

나는 내 가슴팍에 맞고 바닥에 떨어진 장갑과, 천천히 등에서 세검을 뽑아드는 녀석을 번갈아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지금 이게 무슨 어이없는 상황인지.

같은 마왕의 핏줄인데다가 용족인 카렌한테 덤비긴 그렇고, 만만한 나한테 화풀이하겠다는 건가.

“발페르! 불만이 있으면 이 몸에게 결투를 신청할 것이지, 왜 애꿎은….”

“카렌, 됐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나로서도 딱히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건 기회였다.

아무리 이 몸뚱이가 가지고 있던 그 불명예스러운 소문을 벗겨낼 만한 공적을 쌓았다고 한들, 모두가 얌전히 수긍할 리가 없었다.

믿지 않는 것은 물론이오, 여기저기서 뒷얘기가 흘러나올 게 불 보듯 뻔했다.

어차피 그런 말들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언젠가 한 번 제대로 실력을 보여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 상대가 마왕의 핏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하, 웃기는군. 그렇게 누가 자기를 이름으로 부르는 걸 싫어하는 녀석이, 고작 이런 덜떨어진 반푼이 앞에선 얌전하다 이건가?”

“네놈….”

난 발끈하며 앞으로 나서는 카렌을 뒤로 물리고서 천천히 그의 앞에 섰다.

“추하군. 밤의 귀족답지 못해. 싫다는 사람 데리고 구질구질하게 엉겨 붙기는. 그것도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끄럽게 소란이나 일고 말이야.”

“…뭐?”

나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며, 나보다 한 뼘쯤 키가 작은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뭐하는 거지? 덤벼라. 선수를 양보해주마.”

“이, 이 빌어먹을 놈이!”

난 자신을 향해 피식 조소를 지어보이는 내 모습에 기어코 이성의 끈을 놓고 덤벼드는 녀석을 보며, 쥐고 있던 단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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