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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27화 (27/200)

제27화

매혹적인 보랏빛 하늘과 그 한가운데 떠 있는 커다란 둥근 달.

처음 보는 풍경이었지만, 낯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저건 이 몸뚱이의 기억에 있는 마계의 밤하늘이었으니까.

“으음….”

포탈을 넘으며 정신을 잃은 것인지, 다들 주변에 기절한 채로 퍽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 채 쓰러져있었다.

“어머,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네. 반푼이 씨.”

“흥, 꼴사납게 기절이나 하기는. 이래서야 널 칭찬한 이 몸의 꼴이 우습게 되지 않나.”

나는 여기저기 널브러진 놈들 가운데 멀쩡하게 일어나있는 몇몇 녀석들을 보고선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카렌과 아이시스, 셀레스트와 릴리아나.

그밖에 예의 가고일이나 얼핏 익숙한 인상의 7대 종족 일부가, 수백 명의 마족들 사이에서 각자 저를 뽐내듯 꼿꼿이 서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있는 건 하나 같이 한가락 하는 놈들뿐인가.

그동안 능력치를 많이 올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직 출발선에조차 서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거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

난 곧장 몸을 일으켜 근처를 둘러봤다.

그나마 옆에 발라크가 쓰러져있는 게 위안이 됐다.

적어도 이 어수룩한 발록보다는 확실히 강해졌다는 얘기니까.

“그나저나 주변이 참 소란스럽군.”

“음. 정찰대가 돌아오는 자리니까 말이다. 전쟁을 원하는 쪽도, 원하지 않는 쪽도 모두 이곳에 모였을 거다.”

나는 우리가 서있는 공터를 둘러싼 벽 위쪽을 가리키는 카렌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하나 같이 7대 종족, 그중에서도 마왕군에서 꽤나 이름을 날렸던 이들의 모습이 잔뜩 보였다.

아무래도 마계의 높으신 분들이 죄다 이곳에 모인 모양이었다.

“으윽….”

“일어났나.”

“아… 예, 형님.”

난 뒤늦게 머리를 짚으며 정신을 차린 발라크를 바라보다, 옆에서 천천히 앞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아이시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정찰대,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그녀는 다른 좌석들과 달리 홀로 꽤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일곱 개의 자리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왕”

나는 상당히 사치스러운 장식들로 꾸며져 있는 좌석에 앉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들을 쳐다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계를 다스리는 일곱 명의 군주.

연합군의 악몽이자,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짓된 희망에 빠져 허우적대던 용사들의 최종목표.

“수고했다.”

난 그중에서도 당당하게 가운데 자리한 마룡왕의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단순히 한 마디 말을 꺼냈을 뿐인데도 전신을 옥죄여오는 듯한 그 위압감에, 입술을 꾹 씹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문득 아직 풋내기이던 용사시절,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그의 모습을 봤을 때가 떠올랐다.

자신보다 압도적인 강자를 마주했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원시적인 공포.

마치 내가 한없이 나약하고 비루한 존재가 된 것만 같은 이 찝찝하고 더러운 기분을 또 다시 느끼게 될 줄이야.

“후….”

나는 중압감에 숨조차 제대로 고르지 못해 달아오른 숨을 거칠게 내쉬며, 간신히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서 똑바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 빌어먹을 연합을 내 손으로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해선, 눈앞의 마왕들 또한 언젠가 내가 넘어야할 산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이 모두 끝나고 승자로서 그들의 처우를 결정할 때, 내가 원하는 대로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선 가장 높은 곳에 오를 필요가 있었으니까.

“정찰대장. 그대가 본 중간계는 어떠했는가.”

“제, 제가 본 중간계는….”

마왕의 물음에 조심스레 입을 여는 아이시스를 향해, 모두의 시선이 팍 꽂혔다.

마룡왕, 카르카쉬 레비아탄은 곧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그녀의 말에 씨익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원은 풍족하지만, 오합지졸이라 쉬이 정복할 수 있을 곳이었습니다.”

* * *

“좋다. 자세한 건 이후에 따로 보고받도록 하지. 다들 적지에서 임무를 수행하느라 고생 많았다. 이만 들어가서 쉴 수 있도록.”

카르카쉬는 풋내기 정찰대장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군중을 해산시켰다.

풍족한 자원과 그에 비해 보잘 거 없는 적들의 병력.

그들이 가장 바라마지않던 상황이었다.

전쟁.

그동안 배부른 온건파들 놈들의 개수작 때문에 쉽사리 굴릴 수 없었던 군대를, 드디어 부릴 수 있는 초석이 섰다.

“마룡왕 전하, 마룡왕 전하!”

“알모르! 지금 마왕님들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요!”

“…자간 후작.”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을 제치고 달려드는 배불뚝이 악마를 보고선,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알모르 자간.

이번 원정에 앞서 얼마나 위험할지 모를 곳에 능력 있는 젊은이들의 목숨을 맡겨선 안 된다며, 정찰대의 대부분을 임프 같은 저급 마족으로 우겨넣은 온건파의 행동대장 같은 사내였다.

“전하, 설마 정찰대장의 말만 듣고 전쟁을 일으키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카르카쉬는 그 얄미운 면상을 가만히 바라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게. 전쟁 같은 중대사를 그리 쉽게 결정할 리가 있겠나.”

“그, 그렇지요? 역시 전하십니다. 무척이나 현명하….”

“헌데, 누가 자네에게 감히 본인의 앞길을 가로막아도 된다고 했나.”

화륵-

“흐읍… 저, 전하. 소인은 그저….”

“으하하! 카르카쉬, 그쯤하지. 뭐 이놈들이 성질머리 긁는 게 어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말이야.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 간만에 똥줄 좀 탄 거 보니까 자기들도 일이 안 좋게 흘러가는 줄 아는 모양인데.”

픽-

“으으….”

손아귀에 새하얀 불꽃을 피워 올린 카르카쉬는, 슬쩍 뒤에서 손을 뻗어와 불길을 꺼트리는 누군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악투스.”

투마왕 악투스 바알.

그는 사람 좋은 미소로 자신을 말리는 미치광이 전투광 발록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런 상대할 가치도 없는 약해빠진 버러지는 무시하고, 가면서 썩 괜찮은 선물을 들고 돌아와 준 싹수 좋은 젊은이들 얘기나 나누자고.”

“컥!”

악투스는 공포에 질려 바닥에 널브러진 알모르를 걷어차 옆으로 밀어내고선, 카르카쉬의 옆에 섰다.

“너도 봤지? 예전에 한창 시끄러웠던 그놈 말이야. 그 무뚝뚝한 체르페슈가 한숨까지 푹 쉬었던 문제아. 이번에 보니까 의외로 제법이던걸.”

“문제아? 아, 그녀석이….”

마룡왕은 투마왕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 방금 전에 자신의 딸 옆에서 똑바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던 건방진 뱀파이어 한 명을 떠올렸다.

보아하니 둘이 꽤 친해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드는군.”

그는 인상을 팍 구기며 살짝 주먹을 쥐었다.

“그래? 나는 꽤 마음에 들던데 말이야. 요즘 젊은 놈들하고 다르게 패기가 좀 있는 거 같던데. 조금만 더 올라오면 한 번 키워보고 싶을 정도야. 요새 통 나랑 어울려주려는 놈들이 있어야 말이지.”

카르카쉬는 씨익 이를 내보이며 웃는 악투스의 말에 흠칫 몸을 떨며, 속으로 그 건방진 뱀파이어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하필이면 재수 없게도 이 전투광의 관심을 사다니.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머지않아 이 미친 발록의 식지 않는 투쟁심에 밤낮을 시달리게 될 테지.

먼 과거에 그가 그랬던 것처럼.

* * *

마룡왕을 시작으로 마왕들 모두가 자리를 떠난 후.

나는 금세 텅 비어버린 좌석을 잠시 지켜보다,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이시스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시스, 고생했다.”

“…응.”

난 기진맥진한 얼굴로 힘겹게 대답하는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단순히 목소리만으로도 벌벌 떨릴 정도로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내던 마룡왕의 시선을 홀로 받아낸 그 자그마한 몸은, 어느새 땀에 흠뻑 젖어 차게 식어있었다.

“이제 무얼 하면 되는 거지? 전공을 논하는 자리가 올 때까지 근처 거리라도 돌아다니면 되는 건가?”

아이시스는 피식 웃으며 말을 꺼낸 내 모습에 살포시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일단 휴식. 아마 마왕성에서 쉴 곳을 내줄 거야.”

마왕성에서 휴식인가.

연합으로 따지면 병사들을 위해 왕궁의 문을 열어주는 셈이었다.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널브러져 있는 저 되먹지 못한 놈들을 가지고 정찰대로 보낸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개선장군들에 대한 처우는 썩 나쁘지 않은 듯했다.

하긴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왕들은 대부분 전쟁을 벌이고 싶어 하는 쪽일 테니, 그들 입장에선 앞에 있던 장애물을 치워준 우리가 당연히 예뻐 보일 수밖에.

“음. 분명 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다들 만족할 만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테지. 제아무리 오합지졸들이 모인 정찰대라고 한들, 아버지께선 공적만 충분하다면 귀천을 가리지 않는 분이시니 말이다.”

보상 좋지.

나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제 아비가 있던 곳을 올려다보는 카렌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면 곧 있을 전쟁에서 써먹을 수 있는 걸 줬으면 좋겠군.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그럼 나중에 보지.”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악마족을 보고선, 아이시스를 놔주고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런데 카렌, 넌 따로 네 아버지를 보러가지 않는 건가?”

난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을 슬쩍 보고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발라크야 그렇다 치더라도, 마왕의 딸이 마계에서까지 굳이 나를 따라다닐 필요는 없을 텐데.

“그게 무슨 소린가. 아무리 이 몸이 마룡왕의 핏줄이라고는 해도, 이번 일에 대한 논공행상이 끝나기 전까진 너희와 같은 일개 정찰대원일 뿐이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얼굴로 얘기를 꺼내는 카렌을 보며, 짐짓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시절, 미치광이 붉은 용이라고 불렸던 그녀의 입에서 이런 정론이 튀어나올 줄이야.

최전방에서 같이 구르던 용사들을 제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았던 연합의 누구들과는 확연히 다른 마음가짐이었다.

끼이익-

“정찰대 분들, 모두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난 썩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금방 거대한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안내역을 따라 콜로세움 같은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하기 전, 앞으로 마계에서 할 일과 얻을 수 있는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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