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형님, 또 왔습니다. 이번엔 일곱 명입니다.”
“그래. 이 정도면 거의 확실한 거 같군.”
엘프들의 숲 입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 위.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행인들을 내려다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에리스, 그 망할 년에게 줄 선물을 공터에 두고서 잘 받았는지 확인하고 나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정말 전쟁이라도 치르려는 걸까요, 형님?”
“글쎄….”
엘븐하임에서 밖에 있는 엘프들을 전부 불러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과연 전쟁을 대비해서 벌이는 일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냥 범인을 잡으려는 걸지도 모르지.”
숲밖에 있는 수백, 수천 명의 엘프들 중에서 하필이면 그랜드 마스터의 동생을 콕 집어 선물로 보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것도 그것만 덩그러니 놓은 게 아니라, 근처에 다른 엘프들의 머리까지 장식으로 두었으니 더더욱 말이다.
아마 범인은 에리안의 가치를 알고 있는 녀석일 거라 생각하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같은 엘프.
그중에서도 에리안이 에리스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놈일 확률이 높았다.
특히 숲에서 제 발로 나간 것이 아니라, 모종의 이유로 쫓겨난 놈들이라면 그 동기도 충분할 테니 더더욱 의심이 갔을 테지.
종종 다른 놈들한테 묶인 채로 강제로 끌려가는 놈들이 보였던 건,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을 테리라.
멍청하게도, 진짜 범인은 여기 있는 줄도 모른 채.
“흐흐흐….”
쓸데없이 헛수고나 하고 앉아있을 에리스와, 엘브하임의 잘나신 하이엘프들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알게 될 테지.
결국 엘프들 중에서 범인을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조사를 이어나가다보면, 언젠가는 에리안이 살고 있던 그 마을에서 단서를 얻게 되리라.
창백한 피부의 외지인이 마을에 들러 에리안을 찾은 그날 이후로, 그녀가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때 끽해야 목책으로 조금 둘러싸인 게 전부인 마을을 굳이 용병패까지 들이밀면서 정문으로 들어섰던 것도, 일부러 주점에 들러서 마을 사람에게 눈도장을 찍었던 것도.
그 모든 게 전부 다 이것을 위함이었다.
“에릭, 슬슬 떠나야 한다.”
“음… 그런가.”
나는 슬슬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여는 카렌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숲에서 등을 돌렸다.
“되도록 국지전이라도 일어나는 걸 눈에 담고 가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기껏 그렇게나 전공을 쌓았는데, 제 시간에 늦어서 돌아가지 못하면 그보다 웃긴 일이 어디 있겠나.”
그야 그렇지.
어차피 놈들에게 복수할 기회가 이게 마지막이었던 것도 아니고, 이제 겨우 막 시작했을 뿐이다.
비록 결과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자리를 떠야한다는 건 좀 슬펐지만, 그를 위해 앞으로 있을 계획에 내손으로 먹칠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출발하지.”
“음. 이 몸만 믿고 따라오게.”
카렌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한 발짝 앞에 나서서 먼저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카렌, 혹시 길은 알고 있나?”
“물론이다. 이 몸을 무엇으로 보는 게냐? 그저 이놈이 가리키는 대로 쭉 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음?”
그녀는 잠시 제자리에 멈춰서 제 품을 뒤적이다, 동그란 수정구 같은 걸 꺼내어 내게 보란 듯이 내밀었다.
가운데 회색 연기 같은 게 뭉쳐 화살표로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그것은, 마치 나침반과 흡사하게 생긴 마도구로 보였다.
“뭘 처음 본다는 얼굴로 그러고 있는 건가. 마계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오면 이 수정구 안의 연기가 뭉쳐서, 포탈이 생길 곳을 가리켜줄 거라고 출발하기 전에 설명 못 들었나? 분명 정찰대원 모두가… 으음, 설마….”
카렌은 말을 하다 말고 중간에 무언가 떠올랐는지, 인상을 팍 찌푸리며 쯧하고 혀를 찼다.
“빌어먹을 온건파 놈들. 설마 이것까지 빼돌리고 안 줬단 말인가? 아주 작정을 했나보군. 이러면 분명 나중에 이에 대한 책임을 피해가기가 힘들 텐데.”
또 그놈의 온건파 짓인가.
아무래도 그녀가 들고 있는 저 나침반 같은 것은, 원래대로라면 정찰대원 모두에게 지급되었어야 했을 장비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걸 주지 않는다면 만에 하나 누군가 공을 세우더라도 마계로 돌아와서 보고를 할 수 없을 테니, 그걸 노리고 일부러 빼돌린 거겠지.
혹시라도 나중에 그걸로 지탄을 받게 된다고 한들, 적당히 자르고 도망갈 꼬리만 준비해놓는다면 별로 큰 손해를 볼일도 없을 테니 밑져야 본전으로 질러본 것이리라.
“그런데 카렌, 넌 그걸 어디서 난 거지?”
“출발하기 전에 아버지한테서 받았다. 그래도 아마 다른 놈들 중에 이 몸처럼 따로 미리 받아놓은 녀석들이 여럿 있을 테니, 낙오되지 않고 돌아오는 놈들도 꽤 될 거다.”
하긴 그야 그렇겠지.
그러니까 이전에도 본대를 움직일만한 공을 세웠을 마족들이 포탈을 찾아 돌아가, 기어코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그럼 다시 출발하겠다.”
“음, 부탁하지.”
나는 다시금 수정구를 살피며 길을 찾는 카렌을 보며,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온건파.
마계에서 꽤나 영향력이 있어 보이는 그들의 뿌리를 전부 뽑아낼 수는 없을 테지만, 적어도 가지 정도는 많이 쳐놔야 될 거 같았다.
괜히 본대로 나가있다가 뒤통수 맞긴 싫으니까 말이야.
* * *
“카렌, 아직 멀었나?”
“슬슬 조금만 옆으로 가도 화살표 방향이 휙휙 바뀌는 걸로 봐선, 거의 다 도착한 거 같긴 하다만….”
마도구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포탈을 찾아 나선지도 어느덧 한 달이 훌쩍 넘었다.
중간 중간 뒤탈이 없을 거 같은 작은 마차들까지 뺏어가며 쉼 없이 달려온 덕일까, 우리는 그 짧은 시간 만에 제국 서부에서 거의 남부 끝자락까지 닿을 수 있었다.
카렌의 손에 쥐인 마도구 속의 화살표가 계속 흔들거리는 걸로 봐선, 그녀의 말마따나 이젠 거의 포탈을 목전에 두고 있는 거 같았다.
“아, 찾은 거 같군.”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저 멀리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동굴 앞에 꽤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포탈은 도대체 언제 열리는 거야?”
“젠장… 벌써 한 달째 여기서 이러고 있다고. 빌어먹을 난쟁이들이랑 인간 놈들 눈에 띌까봐 숲속에만 박혀있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해!”
임프나 그렘린처럼 약해빠진 종족들도 몇몇 있긴 했지만, 예상외로 가고일이나 몽마 같은 놈들이 인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긴 아무리 버림패로 보내질 정도로 제 종족들 중에서 약해빠진 놈들이라고는 해도, 녀석들 또한 엄연히 7대 종족의 일원이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애초에 종족의 태반이 밭이나 매고 있었을 임프 같은 놈들보단 그들이 좀 더 살아남기에 수월했겠지.
그러니 끝까지 남아 이곳까지 온 녀석들 중에 7대 종족인 놈들이 많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저기 동굴 입구에 서있는 덩치 큰 가고일이랑, 그 왼쪽에서 혼자 여유롭게 제 손톱이나 다듬고 있는 몽마. 둘 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다.”
“그럼 저 두 녀석이 마도구를 가지고 있는 놈들이겠군.”
“음. 그렇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카렌을 보며, 그녀가 말한 두 마족의 생김새를 유심히 살폈다.
온건파 놈들이 마도구를 모두 빼돌렸음에도 따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다른 놈들처럼 그저 그런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셈이었다.
따로 기억해둬서 나쁠 건 없겠지.
특히 한 놈은 이미 익숙한 얼굴이고 말이다.
“흐응… 누가 또 새로 온 모양이네?”
“음, 제법 많이들 모여 있군 그래.”
나는 아직 수풀 뒤쪽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우리를 눈치 채고선 슬쩍 이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몽마를 보며, 씨익 미소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릴리아나.
훗날 색욕의 마왕 릴리스의 사천왕이 되는 그녀가 눈웃음을 지으며 내 미소를 받아쳤다.
분명 내가 다른 용사 두 명과 함께 암살한 전 사천왕의 자리를 이어받았던 놈이었지.
다른 근본 있는 셋에 비하자면 조금 실력이 떨어지는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어지간한 탑 클래스 용사 두 명 정도는 홀로 상대할 수 있는 괴물이었다.
그런 놈이 정찰대에 끼어있었단 말이지.
“뱀파이어에 발록. 그리고… 응? 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카렌 공주님 아니야?”
그녀는 나와 내 뒤를 따라 모습을 드러낸 발라크는 그냥 지나치더니, 카렌에게 시선이 닿자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흥. 함부로 이 몸을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망할 창녀.”
“후후… 까칠한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네. 앞의 두 명은 혹시 이번에 새로 만든 부하야? 흐음… 만들 거면 좀 제대로 된 놈을 써먹지. 뒤쪽에 발록이야 그렇다 쳐도, 앞에 있는 애는 좀 너무 볼품없는걸.”
나는 내 몸을 위아래로 슥 훑어보더니 곧 초승달처럼 눈가를 휘며 고개를 젓는 릴리아나를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그야 그 녀석, 피도 못 빨아먹는 반푼이잖아. 우리 쪽엔 꽤 소문이 자자했는데, 마룡왕님께서 다스리는 곳까진 닿진 못했나 보네.”
또 그놈의 소문 얘긴가.
나는 속으로 크게 한숨을 푹 내쉬며, 슬그머니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아무래도 마계로 돌아가기 전에, 여기서 서열정리를 한 번 마치고 가야할 듯싶었다.
대외적으로 약하다고 알려져 있으면 상대의 빈틈을 유도하기가 쉽기 때문에 그 소문이 마냥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었지만, 이후에 본대와 함께 넘어온 뒤에 편하게 활동하기 위해선 괜찮은 자리를 하나 꿰차놓는 편이 좋았기에 슬슬 떼어낼 때가 된 거 같았다.
“너….”
“하. 뭘 모르는군. 소식이 이렇게 느려서야. 이번 정찰대 중에서 가장 큰 공을 올린 남자를 못 알아보고, 그저 소문 하나만 믿고서 멋대로 입을 나불대는 꼴이라니.”
“…흐응?”
그렇게 검을 막 뽑아 들려던 찰나.
갑자기 카렌이 앞으로 나서며 나를 변호하는 덕에, 난 허리춤에서 잠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 모자란 흡혈귀가 가장 큰 공을 올렸다고? 아하핫! 이제 보니 공주님, 농담도 잘하네? 항상 딱딱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농담 아니야. 에릭, 정말로 대단해.”
“응? 어머… 아이시스까지.”
그리고 이후에 그녀의 뒤쪽에서 수풀을 헤치며 나타난 아이시스까지 합세해 나를 추켜세우자,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완전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으음… 이거 참 묘한 기분이군.
“이봐, 들었어? 저 뱀파이어가….”
“저 녀석, 흡혈귀의 수치라고 소문난 그 녀석이잖아? 그런 놈이 정말로….”
가만히 세 여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대치하고 있는 동안, 주변에서 수군거림이 점점 커져갔다.
음,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군.
뭐가 됐든 결국 그들 사이에서 내 평가가 올라가고 있는 셈이니까.
“어? 뭐야, 아이시스. 왜 거기서 멍하니 그러고 있… 으엑! 에릭 가이오스….”
“셀레스트인가.”
나는 뒤늦게 아이시스의 뒤에서 늑대인간들을 이끌고 등장한, 은회색 머리칼의 여인을 바라봤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걸어오다 나를 딱 발견하고서는 바짝 세우는 꼴이, 마치 뭐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보였다.
“칫, 네놈도 살아있었나? 콱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보다 다들 왜 여기서 가만히 이러고 있는 거지? 보아하니 포탈은 이미 열려있는 거 같은데.”
“음?”
포탈이 열렸다고?
그녀의 말마따나, 정말로 동굴 입구에 전에 없던 까맣게 일렁이는 무언가가 생겨나 있었다.
심지어 그 앞에 있던 가고일을 비롯해 몇몇은 이미 포탈을 넘어갔는지, 주변에 모습이 보이지도 않았다.
“흐응… 그래, 뭐. 저 반푼이가 정말 일등공신일지 아닐지는 나중에 보면 알겠지.”
싸가지 없는 녀석.
나는 끝이 하트모양으로 뾰족하게 솟은 꼬리를 살랑이며 포탈 안으로 들어서는 릴리아나를 보고선, 잔뜩 인상을 구겼다.
그래, 어디 나중에 한 번 보자고.
그 예쁘장한 면상이 어떻게 구겨지는지 한 번 볼 만하겠어.
“…우리도 이만 가지.”
“예, 형님.”
“음, 알았다.”
나는 곧장 일렁이는 포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