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25화 (25/200)

제25화

울창한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숲 한가운데.

엘프 둘이 활을 빼어 든 채로 마을을 나와, 어둑어둑한 숲속을 천천히 살피고 있었다.

“어휴, 오늘만 해도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네. 요즘 들어 왜 이리 순찰이 많아진 건지.”

“최근에 북쪽에서 인간들하고 수인들하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하잖아. 아마 그것 때문 아니겠어?”

“그러니까, 그건 북쪽 얘기잖아. 게다가 인간 놈들이 아무리 멍청하더라도, 설마하니 그 와중에 우리들까지 건들겠어? 그랬다가 잘못하면 양쪽에서 얻어맞을지도 모르는데.”

“그게 있잖아, 이건 비밀인데….”

최근 들어서 부쩍 늘어난 순찰 횟수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자신의 동료를 지켜보던 황갈색 머리의 엘프는, 힐끔힐끔 주변을 살피다 조심스레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번에 수도에서 온 형님한테 들은 얘긴데, 아무래도 밖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더라고. 에리스님이 별동대를 꾸리고 있다는 소문까지 돈다던데? 아마 그거랑 연관이 있는 거 같아.”

“그게 정말이야? 에리스님이 직접 나서실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데… 설마 진짜로 인간들이?”

자신의 동료에게서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들은 금발 머리의 엘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에이, 말 그대로 그냥 소문이겠지. 전쟁은 무슨.”

사르륵-

그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선, 앞에 있는 수풀을 헤치고 조그마한 공터로 들어섰다.

철퍽-

“응? 으… 뭐야. 뭔가 이상한 게 밟혔는데? 설마 동물들 변은… 흐아아아악!”

“왜, 왜 그래? 도대체 뭐… 흐어어억!”

그들은 앞서가던 놈의 신발에 밟힌 무언가를 확인하기가 무섭게, 깜짝 놀라 뒤로 엎어졌다.

“이, 이게 무슨….”

시체.

그것도 덩그러니 머리만 잘려 놓여있는 동족의 시체였다.

그들은 밖으로 흘러내린 눈알 때문에 드러난 구멍 사이로 구더기가 들끓고 있는 그 끔찍한 모습에, 속에 있는 것을 비워내기 시작했다.

“웨에에엑!”

“우욱… 우웨엑!”

죽은 지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인지, 썩어문드러진 살점이 아까 밟은 신발 밑창에 달라붙어 찌익 늘어났다.

“도,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앵앵대는 파리들이 모여 있는 곳 하나하나, 똑같이 머리만 남은 시체들이 바닥에 놓여 썩어가고 있었다.

“서, 설마….”

“말도 안 돼… 그럼 정말로?”

그 순간, 두 엘프의 머리 한편에 전쟁이라는 단어가 문득 떠올랐다.

지금 수도에서 돌고 있다던 그 소문과, 눈앞에 벌어져 있는 끔찍한 참상.

속으로는 제발 아니길 빌었지만, 그들은 이미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도, 돌아가자. 우선 촌장님한테 알려야 해.”

“잠깐. 저쪽에 뭔가 있는데?”

“…뭐? 저, 저건 또 뭐야.”

한시라도 빨리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마을로 돌아가려던 둘은, 시체들 가운데 밑동이 드러난 나무 위에 놓여 있던 물건을 발견하고선 잠시 걸음을 멈췄다.

머리만 남은 시체들이 널브러진 주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토끼 그림이 그려진 핑크색 상자.

그들은 마치 누군가에게 선물로 준비한 듯, 새빨간 리본이 묶여있는 그것을 앞에 두고선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어, 어떡하지?”

“…일단 가져가야겠지?”

“혹시 무슨 함정이라던가….”

그 자리에서 알 수 없는 상자를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한 그들은, 결국 두 눈을 질끈 감고서 그것을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읏… 이거, 생각보다 무거운데?”

“…그래도 다행히 함정은 아니었던 모양이네. 어쨌든 이제 빨리 돌아가자. 젠장… 도대체 어떤 빌어먹을 놈이 이런 짓을….”

두 엘프는 그길로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차마 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 내용물은 확인하지 못한 채.

* * *

“에리안, 도대체 어딜 간 거니….”

창밖에 난 푸른 잎사귀들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넓은 방 안쪽을 비췄다.

그 안엔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빼어난 용모를 가진 녹색 머리칼의 여인이, 벽에 기대어 무언가 불안한 듯 제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엘븐하임의 그랜드 마스터 에리스.

그녀는 항상 한 달에 한 번씩은 숲으로 돌아와 자신의 안부를 전하던 동생을 떠올렸다.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이미 올 때가 한참 지났건만, 자신의 동생은 일주일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숲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에리스 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그렇겠죠? 아니, 꼭 그래야만 해요.”

만에 하나 에리안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다면…

그녀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며 입술을 꾹 씹었다.

마음 같아선 자리를 비우고 찾으러나가고 싶었지만, 여왕이 직접 찾아와 말리는 바람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아마 혹시라도 정말 그녀의 동생에게 변고라도 생긴 거라면, 거기서 그녀가 이성을 잃어버릴까봐 그런 것이리라.

“곧 여왕님께서 닷새 전에 보낸 수호자들이 돌아오지 않습니까? 금방 동생분의 소식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똑똑-

“에, 에리스 님. 카디안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세요.”

“…예.”

에리스는 자신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금발의 엘프를 바라봤다.

그 또한 엘븐하임을 지키는 수호자 중 한 명이었지만, 아쉽게도 여왕이 그녀의 동생을 찾아 보낸 이는 아니었다.

“에리스 님, 지금 나와 보셔야 될 거 같습니다,”

“무슨 일이죠?”

“저, 그게….”

에리스는 문 앞에서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보며, 제 고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동생이 걱정되어 마음이 심란한 차에…

“…알았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짜증을 내거나 싫은 티를 보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단순히 평범한 수호자나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라, 엘븐하임에 있는 모든 엘프들의 우상이었으니까.

착하고 아름답고 그리고 강한 하이엘프.

그녀는 적어도 남들이 보는 앞에선 항상 완전무결해야만 했다.

“이쪽에, 여왕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왕님께서?”

에리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보며, 무언가 불길한 낌새를 느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을 왕성으로 불렀으면 불렀지, 절대 먼저 찾아오진 않을 그 엉덩이 무거운 여왕이 지금 이곳에 와있다고?

“부르셨습니까, 여왕폐하.”

“…에리스.”

그녀는 어딘가 불안한 듯 입술을 달싹이는 여왕을 보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지금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뭔가 큰일이라도 생긴 듯한…

“서, 설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에리스는, 잔뜩 불안한 표정으로 눈앞의 여왕을 올려다봤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그녀는 속으로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카디안, 그걸 가져오세요.”

“…예, 폐하.”

그녀는 여왕의 명에 따라 무언가를 챙겨 들어오는 남자를 바라봤다.

상자?

그에게서 귀여운 토끼 그림이 그려진 분홍색 상자를 받아든 에리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여왕을 쳐다봤다.

“저, 이건 대체….”

“그… 어떻게 위로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에리스. 하지만 이것하나만큼은 꼭 약속할게요. 왕가는 그녀의 넋을 달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러니까, 부디 저희를 믿고 최대한… 참아주세요.”

“그게, 무슨….”

여왕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마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이.

위로? 넋?

“아… 아아… 서, 설마….”

그녀가 남기고 간 말들을 천천히 곱씹어보던 에리스는, 곧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사색이 된 얼굴로 제 손에 놓인 상자를 바라봤다.

“에, 에리안… 아니야, 안 돼… 제발!”

상자는 이미 한 번 누군가 열어봤던 모양인지, 그저 떨리는 손으로 툭 건드린 것만으로도 뚜껑이 벗겨졌다.

“아….”

툭-

그렇게 상자 안의 내용물을 발견한 그녀는, 그만 들고 있던 것을 놓쳐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아아아아아악! 에리안… 어째서! 왜!”

머리.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제 동생의 머리를 품에 안고서 오열했다.

“대체… 대체 누가, 어느 개자식이! 죽여… 죽여주마. 감히 에리안을… 내 사랑스러운 동생을….”

한참 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바닥에 떨어진 상자를 구겼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제 눈꺼풀조차 닫지 못하고 죽어버린 동생의 눈은, 항상 맑고 총명했던 하늘색을 잃어버린 채 흐물흐물해져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참으라고? 왕가를 믿고? 아니, 절대 그렇겐 못해. 빌어먹을 놈, 개 같은 놈! 기필코 찾아주마… 그리고 없애주겠어. 네놈의 소중한 사람들 모두, 하나하나 보는 앞에서 배를 가르고 그 내장을 입에 쑤셔 박아주겠어!”

* * *

“좋아, 아주 좋아.”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세계수 아래, 엘븐하임의 수도 끝자락에 있는 거대한 저택이 흔들리고 여기저기 무너지는 것을 보며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에리스 그 빌어먹을 년이 내가 준비한 선물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집안에서 기쁨에 몸서리를 치는 모양이었다.

“이만 나가지.”

“음? 벌써 말인가? 좀 더 가까이서 확인하진 않는 건가?”

“물론 나도 그러고는 싶지만 말이야….”

지금 한창 제 동생을 잃은 슬픔에 손에 잡히는 모든 걸 쳐부수고 있을 그녀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없다는 건 무척이나 아쉬운 일이었지만, 당장은 이렇게 멀리서 지켜보는 걸로 만족해야만 했다.

여기서 더 안으로 들어갔다간 혹시라도 수호자들에게 발각될지도 모를 노릇이니 말이다.

평생을 숲에서 살며 짐승과 침입자들을 상대로 엘븐하임을 지켜온 그들의 기감은, 상상 이상으로 정확하고 또 날카로웠으니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저것만 봐도 이미 내가 준 선물은 잘 도착한 거 같으니.”

나는 그길로 처절한 비명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것만 같은 도시로부터 등을 돌리며,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직 시간을 두고 좀 봐야 할 게 좀 남아있긴 했지만, 그건 밖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거였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에리스.

이성을 잃고 검을 뽑을 테냐, 아니면 네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네 종족을 위해 동생을 잃은 슬픔을 꾹 눌러 삼킬 테냐.

만일 혼자서라도 복수를 하겠답시고 숲 밖으로 뛰쳐나와 준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아마 엘프 여왕도 있고 다른 수호자나 원로들도 있을 테니 거기까지 바라는 건 무리일 테지.

하지만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던 딱히 크게 상관은 없었다.

결국엔 전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들의 가슴 속엔 다른 종족에 대한 불신이 새겨질 테고, 그건 훗날 연합을 안쪽에서부터 좀먹는 벌레가 되어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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