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에리안. 그랜드 마스터 에리스의 동생이 맞나?”
나는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에리안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 어떻게 그걸….”
에리안은 방금 전에 내 모습을 확인하고 놀랐던 것보다 더 크게 당황하며, 쥐고 있던 화살을 조심스레 시위에 메었다.
그야 그렇겠지.
그녀가 그랜드 마스터의 동생이라는 건 숲 밖의 누군가가 알아선 절대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혹 누군가 그 사실을 알고서 에리안을 죽이거나 납치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에리스가 분노에 정신을 잃고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다.
어쩌면 자칫 전쟁을 벌이자고 목소리를 높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아무리 그녀가 그랜드 마스터라고 한들 혼자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에리스를 따르는 젊은 엘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과연, 네 언니가 입이 닳도록 자랑할 만하구나. 아름다운 눈이야.”
“네놈… 설마, 언니를….”
이 사내는 위험하다.
에리안은 순간 소름이 자신의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그가 노리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신의 언니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녀가 이런 알 수 없는 무뢰배에게 당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 하나가 전부는 아닐 터였다.
혹시라도 자신을 미끼로 언니를 꾀어, 함정에 빠트리려는 걸지도…
“…그렇게는 안 되지. 넌 지금 여기서 죽는다.”
시위를 고쳐 잡은 그녀는, 내 미간을 향해 화살촉을 겨누었다.
멍청하긴.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나는 순식간에 쏘아져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선 몸을 작은 박쥐 떼로 나누어 흩어졌다.
픽-
목표를 잃은 화살은 허공을 지나쳐 천장에 콱 박혔다.
나는 지근거리에서 날린 자신의 공격이 빗나간 것을 보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곧장 화살촉을 손질하던 방으로 돌아가려는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읏, 이게!”
십수 마리의 박쥐들이 그녀의 몸을 스치듯 지나쳐, 문 앞에 모여들어 하나로 합쳐졌다.
“혹시 이걸 가지러 온 건가?”
나는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채, 옆에 놓인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놀리듯이 눈앞에서 흔들어주었다.
“이… 빌어먹을!”
에리안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곧장 몸을 돌려 주방으로 뛰었다.
천천히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긴 내 눈에 보인 것은, 구석에 놓인 단검을 집어 들어 내게 겨누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지금 그런 장난감으로 날 어떻게 해볼 생각인가?”
이젠 웃기지도 않는군.
나는 코웃음을 치며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아무리 엘프들이 궁술뿐만 아니라 적이 붙었을 경우를 대비해 검술 같은걸 조금 배워둔다고는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다시 거리를 벌릴 틈을 벌기 위한 최소한의 실력만을 갖출 뿐이었다.
하물며 꺼내는 게 평범한 검도 아니고, 날이 짧은 단검이라니.
차라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마을사람들이라도 부르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물론 그래도 나한테 잡히는 건 똑같았겠지만 말이야.
“얕보지 마! 너 같은 쓰레기는 활이 없어도 충분해!”
그녀는 발끈하며 내게 달려들었다.
가볍게 그 공격을 쳐낼 생각으로 검을 휘두르려던 나는, 단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퍼런 기운에 눈살을 찌푸렸다.
검기.
그것도 생각보다 형태가 뚜렷하게 잡히는 마력을 보며, 팔을 거두고 슬쩍 몸을 비틀어 피하는 쪽을 택했다.
후웅-
“같잖은 수를… 아! 이, 이런….”
나는 그대로 나를 지나쳐, 방금 전까지 내가 막고 있던 방으로 달려가는 그녀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 멍청한 놈! 네 머리도 딱 그 박쥐처럼 짐승 수준인가 보구나. 바보같이, 그걸 따라 문밖으로 나오다니 말이야!”
에리안은 그대로 내게 비웃음을 날리며, 제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난 그런 그녀를 멍하니 지켜보다 그만, 아까부터 꾹 깨문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려던 웃음을 터트려버리고 말았다.
“하하하하! 흐흐, 흣… 크흐흐….”
“뭐, 뭐야… 화살이….”
뒤늦게 화살이 가득 들어있어야 할 화살통이 텅 비어져있는 걸 발견한 녀석은, 잔뜩 당황하며 제 방을 뒤적였다.
“혹시, 이걸 찾고 있나?”
“그, 그건… 대체 어느새….”
투두둑-
나는 뒤집어쓴 로브 안쪽에서 화살을 꺼내 바닥에 떨어트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설마하니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그 방을 나왔을까.
화살을 하나 꺼내 보란 듯이 그녀를 놀려먹던 그 순간에, 이미 화살통은 모두 비워져있었다.
용사 시절, 포로로 잡힌 아군을 구출 혹은 암살하기 위해서 악마족으로 변장해 그들이 끌려간 도시에 숨어들었을 때.
가고일 간수가 보는 눈앞에서 그가 눈치 채지도 못하게 허리춤에 있던 열쇠를 훔쳤던 나다.
그런 내게 있어, 갑작스러운 침입에 당황하고 있을 엘프의 눈을 속이고 화살을 빼돌리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셈인가. 다시 그 장난감으로 덤벼볼 텐가?”
“큿… 으으….”
나는 가만히 서서 내 눈치를 살피며,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는 에리안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단 두 가지뿐.
방금 전처럼 단검으로 덤벼들던가, 아니면 날 뿌리치고 어떻게든 도망치던가.
물론 뭘 선택하는 결과는 정해져있었다.
“이… 젠장!”
그녀는 결국 덤벼드는 쪽을 택했다.
처음에 자신을 제치고 먼저 문 앞을 가로막았던 걸 생각하면, 도망치는 건 불가능할 거라 판단했으리라.
그나마 자신의 검기를 보고 몸을 피했었으니, 어떻게 한 대라도 맞춘다면 혹시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
“죽어!”
후웅-!
그 말대로, 아직 이 몸뚱이는 변변찮은 방어구도 없이 맨몸으로 검기를 받아낼 수준은 못됐다.
잘못해서 급소라도 맞는 순간엔 아무리 나라고 한들 저세상으로 떠날 수밖에 없으리라.
그래, 맞는다면 말이지.
“이익… 이, 제기랄!”
훙- 후웅-
시퍼런 검기는 계속해서 허공만을 가를 뿐이었다.
맞을 만하면 박쥐로 변해 사라졌다가 다시금 뒤에서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나는 다잡은 물고기가 제풀에 지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하악, 흐으….”
“다 날뛰었나?”
“이… 닥쳐! 읏….”
쿵-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쓰러질 때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익숙하지도 않은 검기를 무리해서 다룬 탓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력과 함께 정신력과 체력의 소모가 큰 기술인데, 숲을 나온 뒤로 평소 검은커녕 활조차 잡을 일없이 살았을 그녀가 버텨봐야 얼마나 버티겠는가.
“크윽….”
난 바닥에 쓰러진 채 표독스러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에리안을 보며, 씨익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팅- 트르르륵-
나는 그녀가 쥐고 있던 단검을 차서 멀리 떨어트린 뒤, 그녀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괜히 돌아가는 중에 난리를 피우면 귀찮아질 테니, 미리 힘을 빼두는 게 좋겠지.
“뭐, 뭐냐… 네놈, 지금 무얼 하려… 히익!”
콰악-
쩍 벌린 입이 그녀의 목을 물며, 송곳니가 살갗을 뚫고 들어갔다.
“아, 아아아… 흐이….”
꿀꺽- 꿀꺽-
꽤 상큼한 단맛이 느껴지는 핏물이 꿀렁꿀렁 목을 넘어갔다.
나는 한 번 크게 피를 빨아들일 때마다 뭍으로 끌어올려진 물고기처럼 펄떡이는 그녀를 지켜보다, 이내 적당히 이를 빼내고선 입가에 묻은 피를 핥았다.
[수호자 지망생 하이엘프, ‘에리안’을 흡혈했습니다.]
[대상의 모든 피를 마시지 않아, 흡혈의 효과가 감소합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민첩이 ‘1’ 증가합니다.]
[마력이 ‘3’ 증가합니다.]
“후우….”
나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들을 보고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비록 지금은 아직 죽일 때가 아니라 절반 정도밖에 흡혈하지 않아 효과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어차피 일을 마치고 나면 그때 마저 나머지를 마실 생각이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히이… 히이이….”
나는 파르르 떨며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을 들쳐 매고서, 조용히 마을을 빠져나갔다.
벌써부터 에리스, 그 빌어먹을 년이 제 동생의 죽음에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내 입가가 저 반짝이는 별들 가운데 걸린 초승달마냥 휘어졌다.
* * *
“어이, 일어나라.”
짜악-!
발라크의 솥뚜껑만한 손바닥이 새하얀 살결을 내리쳤다.
정신을 잃고 기절해있던 에리안은 뒤이어 자신의 머리채를 붙잡고 들어 올리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일어난 듯 눈을 깜빡이며 신음을 흘렸다.
“여, 여긴….”
“이제 정신이 좀 들었나?”
“네놈은… 히, 히이이익! 컥!”
찰캉-
나는 눈을 뜨기가 무섭게 내 얼굴을 보고선 뒷걸음질을 치려다, 카렌이 옆에서 붙들고 있던 사슬 때문에 목줄이 당겨져 괴로워하는 그녀를 내려다봤다.
“흐으… 너, 너희들.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아? 전쟁이야, 내가 없어지면 우리 언니가….”
“그래? 그럼 더더욱 죽여야겠군.”
“…뭐?”
에리안은 너무나도 담담한 반응을 보이는 나를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곧 옆에 있던 발라크와 카렌까지 한 번 슥 훑어보고는 얼굴을 파랗게 물들였다.
“아, 아아… 다 인간도, 수인도 아니야… 뭐, 뭐야. 너희들 대체 뭐냐!”
“우리? 글쎄….”
나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살피고 있는 그녀를 향해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네 생각처럼, 인간도 수인도 아니라고 해두지. 아, 물론 당연히 드워프도 아니다. 그러니까,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건 우리랑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거다. 하지만… 네 언니는 괜찮을까? 아마 여기서 널 죽이면 가장 의심을 사는 건 인간이 되겠지. 마침 꽤 가까운 곳에서 엘프 한 명이 무고한 경비들을 학살한 일이 있었으니, 그에 대한 보복으로 널 잡아 죽였다고 하면 어느 정도 앞뒤가 맞을 거란 말이지.”
하지만 사실은 범인이 인간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될까.
원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코 동생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에리스는, 과연 어떤 책임을 지게 되는 걸까.
“그, 그만… 그만둬….”
꽤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인지, 에리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기어와 내 발목을 붙잡았다.
아아… 과연 네년이 그렇게 칭찬할 만하구나, 에리스.
생각보다 눈치가 빨라.
하나가 조금 아쉽지만 말이야.
뻐억-!
“허윽….”
“그만둬? 그게 아니지, 에리안. 자, 우리 다시 한 번 가볼까?”
나는 그녀의 명치를 발로 차버리며, 활짝 웃는 얼굴로 살짝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허으윽, 흐윽….”
에리안은 얻어맞은 곳을 붙잡고서 잔뜩 괴로워하다, 곧 입술을 꾹 깨물고 다시금 내 쪽으로 기어와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만… 둬주세요….”
“크흣, 흐흐흐… 아하하하하!”
그래, 이거야.
나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의 앞에서, 그야말로 미친 듯이 웃어재꼈다.
좋아, 그만둬주지.
지금 당장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