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22화 (22/200)

제22화

하이엘프임을 증명하는 녹색 머리칼. 그리고 에리스, 그 망할 년이 자기 동생 자랑을 늘어놓을 때마다 항상 빠트리지 않았던 총명한 하늘색 눈과 그 왼쪽 아래 찍힌 눈물점.

난 주점 주인이 알려준 곳까지 갈 필요도 없이, 중간에 과일을 내놓고 있는 가게 앞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발라크.”

에이다의 말이 사실인 것을 확인한 나는, 우선 곧장 언덕으로 되돌아갔다.

그랜드마스터의 동생인 그녀를 납치하기 전에, 먼저 정리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으니까.

“오셨습니까, 형님.”

“음? 빨리 왔군, 에릭. 혹시 마을에 없었나?”

“으읍! 읍!”

“그, 그럴 리가! 진짜에요! 거짓말하지 않았어요! 그, 그래… 제, 제가 찾아볼게요. 제가 내려가서….”

나는 제멋대로 지레짐작을 하고선 몸을 덜덜 떠는 에이다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있었으니까.”

“그, 그렇죠? 하, 하하… 그럼 이제 제 동생은….”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힐끔힐끔 발라크의 손에 잡혀있는 자신의 동생을 바라봤다.

그래, 원하는 것도 얻었으니 이제 이 관계를 청산할 때가 됐지.

서걱-

툭-

“…아?”

시퍼런 날이 번뜩이고, 에이라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푸슛- 퓻-

목 위를 잃은 몸뚱이가 간헐적으로 피 분수를 뱉어내며 휘청거렸다.

발라크가 목줄을 잡고 있던 터라 고꾸라지진 않았지만, 그 덕에 몇 번이고 자신의 동생이었던 것에서 뿜어진 핏물에 얼굴을 적신 에이다의 표정이 점차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아… 아아아아악!”

그녀는 순식간에 죽어버린 제 동생을 보고선, 충격에 다리가 풀린 듯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에, 에이라… 에이라….”

에이다는 애타게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헤진 바지가 땅에 쓸며 찢어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통을 향해 기었다.

결국 그녀는 자기가 죽은 지도 모른 채, 곧 풀려날 줄만 알고 안심한 표정의 에이라의 머리를 품에 안아들었다.

검이 지나간 단면에서 줄줄 흐르는 피가, 에이다의 가슴팍을 새빨갛게 물들여갔다.

“어째서… 원하는 대로 알려줬잖아! 마을에도 있었다면서! 그런데 왜… 도대체 왜!”

그녀는 눈물로 자신의 얼굴에 튄 동생의 피를 흘려보내며, 악에 받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우리 얼굴을 본 녀석들을 굳이 살려줄 필요가 없지. 그랬다가 괜히 나중에 뒤탈이 나면 어떡하려고.”

애초에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괜히 여기서 두 놈을 풀어줬다가, 옆에 있는 숲에 들어가서 엘프들 사이에 우리들에 대한 얘기가 돌기라도 하면 그만한 낭패도 없었다.

이제 곧 예쁘게 선물을 준비해서 에리스, 그 빌어먹을 년에게 보냄으로서 인간과 엘프의 사이를 틀어버릴 예정인데.

거기서 만일 우리가 그녀의 동생을 찾으려고 했다는 사실이 퍼져있는 상태라면, 당연히 인간들의 소행이 아니란 걸 눈치 챌 수밖에 없겠지.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카렌과 발라크는 척 보기에도 인간과 달랐으니까.

“이, 이 쓰레기 같은….”

“원망은 저승에 가서 해라.”

스걱-

[레벨이 올랐습니다!]

나는 악귀 같이 찡그려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덤벼들려는 녀석의 목을 베어냈다.

[당신은 뱀파이어로서의 능력을 일깨우기에 충분히 강해졌습니다.]

[이제부터 원한다면 자유자재로 몸을 박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음?”

피가 묻은 검을 대충 털어내고 허리춤에 집어넣던 나는,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 이런 식인가.

몽마들이 잠자는 이의 꿈속에 들어갈 수 있고 악마족들이 가문에 따라 고유한 특성을 가지는 것처럼, 뱀파이어 또한 그 종족만이 가지는 특별한 힘을 몇 가지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피를 조종해 날카롭게 만들어 쏘아내거나, 상대의 출혈을 가속시키는 등.

일명 혈마법이라 불리는 특이한 마법과, 지금 내가 얻은 박쥐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뱀파이어가 그런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굳이 따지자면 용사 시절에 봤던 흡혈귀들 중에, 못 쓰는 놈들이 절반 정도는 되었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당연히 이 몸뚱이가 본래 피를 두려워하고 반푼이라 불린 것처럼 무언가 문제가 있기에 쓰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저 개인의 강함에 달린 일이었나.

하긴, 그러고 보니 혈마법까지 쓸 줄 아는 놈들은 못해도 어지간한 간부급은 됐었지.

“왜 그러십니까, 형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어쨌든 쓸 수 있는 패가 늘어난 건 잘된 일이었다.

박쥐화는 급할 때 위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능력이었으니까.

뿐만 아니라 밤중에 몰래 어딘가로 잠입할 때 써먹을 수도 있었고 말이다.

콰악-

나는 아직도 몸을 움찔움찔 떨어대며 피를 뱉어내고 있는 두 시체를 집어 들고서, 살갗에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심약한 하이엘프, ‘에이라’를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로는 능력치가 증가하지 않습니다.]

[숲을 나온 하이엘프, ‘에이다’를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로는 능력치가 증가하지 않습니다.]

쯧, 능력치는 오르지 않는 건가.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다르게 말하자면 그만큼 내가 강해졌다는 얘기일 테니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에릭 가이오스]

[뱀파이어]

[레벨 : 25]

[힘 : 88] [민첩 : 72][체력 : 85][마력 : 52]

나는 어느덧 총합 300을 코앞에 두고 있는 능력치를 보며,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게 다 북쪽에서 시체들을 한 번 크게 털어먹은 덕분이었다.

툭-

“슬슬 갔다 올 테니 정리하도록. 이번에 잡아올 길잡이는 아는 게 좀 많을 테니까, 당분간 바빠질 거야.”

나는 삐쩍 말라붙은 두 시체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선,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하늘을 쳐다봤다.

밤이 머지않았다.

새 능력을 얻었으니 바로 한 번 써먹어봐야겠지.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어떻게 하면 몸을 박쥐로 바꿀 수 있는지 그 방법이 머릿속에 절로 떠올랐다.

파삭-

난 쉽게 부스러지는 시체를 짓밟으며, 마을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아삭-

밤늦게 집에 돌아와 잘 익은 과일을 한입 베어 문 녹색 머리칼의 엘프는, 인상을 찌푸리며 들고 있던 바구니를 식탁에 던졌다.

거칠게 식탁 위로 떨어진 바구니는, 안에 있던 과일 몇 개를 밖으로 뱉어냈다.

아무렇게나 데구르르 굴러간 과일들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이런 맛없는 걸 값을 받고 팔다니. 숲에선 돈을 쥐어줘도 안 먹을 불량품을… 뭐가 남쪽에서 힘들게 들여온 맛난 과일이라는 거야? 하여튼, 이놈이고 저놈이고 인간들은 모두 간사하기 짝이 없다니까.”

올해로 벌써 숲을 나온 지도 백이십 년째.

본래 수호자가 되고 싶었던 에리안은, 너무 뛰어난 언니를 둔 탓에 다른 일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지엄한 세계수 어머니의 규율 아래, 한 가지에서 나올 수 있는 수호자는 단 한 명뿐.

그것이 혹시라도 가지 한쪽에 모든 권력이 쏠릴까하는 걱정에, 수천 년도 더 전부터 이어진 전통이었다.

그녀의 재능이 모자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보통 평범한 엘프들에 비해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하이엘프들 중에서도, 최소한 같은 또래에 한해선 누구도 에리안을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였다.

다만 그녀의 친언니, 에리스의 재능이 압도적이었을 뿐.

그녀는 일반적으로 재능 있는 하이엘프가 백 살은 되어야 간신히 될 실력을 갖출 수 있다는 수호자를, 고작 마흔의 나이에 따낸 희대의 천재였으니까.

“한 엘프가 자신의 동생이 납치당했다며 거짓으로 경비들을 꾀어낸 뒤, 기습하여 열세 명을 피살하고 도주 중….”

그렇게 자신의 혈육 때문에 그토록 갈망하던 꿈을 버리게 된 에리안이었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언니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한참이나 어린 나이임에도 어느덧 자신들보다 훨씬 강해진 에리스를 시기하고 질투한 원로들이 마침 전임자가 자연의 곁으로 돌아가 비어버린 감시역을 떠맡기려고 할 때도, 자기가 대신 나서 그 역할을 자처할 정도로 끔찍이 제 언니를 아끼고 있었다.

비록 그 자리가 그들의 숲을 벗어나 인간들 사이에 끼어 살며, 밖으로 나간 동족들의 삶을 돕고 한편으로는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하는 덕에 모두에게서 기피당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설마, 이거 에이다 얘긴가?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 그럴 애가 아니었는데.”

에리안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같은 마을에서 살고 있었던 두 어린 자매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문제가 있어서 숲 밖으로 쫓겨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아픈 제 동생의 약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살던 아이들이었다.

가끔 집으로 놀러 와서 무례한 인간들의 행태를 들먹이며 푸념을 늘여놓고 가긴 했지만, 아픈 자기 동생을 떠올리며 몇몇 불합리한 일도 꿋꿋하게 버텨내던 녀석이었다.

“으음… 아무래도 한 번 가봐야겠어.”

그런 아이가 다짜고짜 이런 일을 그냥 벌일 리가 없었다.

분명 누명을 썼던가, 아니면 또 비열한 인간들이 그녀를 어떻게 해보기 위해 무슨 악랄한 짓거리라도 저지르려고 했던 것이리라.

“빌어먹을 인간 놈들. 보나마나 제 추악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결국 일을 저지르고만 거겠지. 불쌍한 에이다….”

에리안은 혹시라도 그 착한 아이들이 뭐라도 먼저 잘못했을 경우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언제나 먼저 무례를 저지르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항상 추레하고 비겁한 인간들뿐.

자신과 같이 고귀한 피를 이은 하이엘프인 그녀가, 조금이라도 못된 일을 벌였을 리는 없었다.

“…거기, 누구죠?”

먹던 과일을 내려두고 언제나처럼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화살촉이 녹슬지 않도록 잘 닦아주고 있던 에리안은, 갑자기 자신의 집 한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옆에 있던 활을 빼어들었다.

“…무례하군요. 이 시간에, 숙녀 혼자 사는 집에 몰래 발을 들이다니.”

그녀는 재빨리 손질하고 있던 화살을 하나 뽑아 메기고선, 천천히 시위를 잡아당겼다.

“숙녀라… 나이를 생각하면 숙녀보단 할망구가 더 정확한 말이 아닐까 싶군.”

“…뭐? 이, 인간 주제에! 그런 걸 네 멋대로, 너희 하찮고 추레한 것들의 기준으로 따지지 마라!”

피슝-!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놓자, 쏘아진 화살이 가볍게 벽을 뚫고서 방금 전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날아갔다.

“크아아악!”

“흥, 쓰레기 같은 게 겁도 없이….”

“이렇게, 쓰러질 줄 알았나?”

“!”

벽 너머에서 들려온 비명에, 이만 시체를 치우기 위해서 방에 들어가려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귓가에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혹시 몰라 하나 더 챙겼던 화살을 휘둘렀다.

후웅-

“뭐, 뭐야 너….”

화살촉이 허공을 가름과 동시에 뒤를 돌아본 그녀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선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바, 박쥐? 아니….”

그곳엔 커다란 박쥐 날개로 제 몸을 감싼 창백한 인상의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