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21화 (21/200)

제21화

“에, 에이다! 도대체 왜… 컥!”

푸욱-

날카로운 단검이 갑옷의 틈새로 살갗을 찢으며, 섬뜩한 소리와 함께 깊이 파고들었다.

곧장 목에 꽂아 넣은 단검을 빼낸 에이다는, 힘없이 고꾸라지는 경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맞으며 다음 녀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히, 히익… 왜, 왜 그러는 겁니까! 저흰 에이다 씨의 동생 분을 구하기 위해서….”

“이 멍청한 놈, 정신 차려! 지금 이유가 중요해? 그냥 속은 거야! 저 미친년이 우릴 죽이기 위해서 자기 동생을 판 거라고!”

“빌어먹을… 북쪽에선 수인이 난리더니, 여기선 엘프가 지랄이군! 쓰레기 같은 년, 그동안 아닌 척 착하게 구느라고 아주 힘들었겠어!”

단칼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린 자신의 동료를 보며, 경비들은 그제야 검을 뽑아 들었다.

“빌어먹을 인간 놈들… 너흰 아무것도 몰라. 에이라가 위험하다고. 쓸모없는 놈들… 애초에 에이라가 그 빌어먹을 놈한테 납치당하지 않게 잘 지켰으면 됐잖아. 아무리 하찮은 족속들이라 할지라도 제 집을 돌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에이다는 조용히 무어라 중얼거리고선 입술을 꾹 깨물며, 다른 곳에서 자신의 동생을 수색하다 방금 그 비명을 듣고 달려오고 있을 경비들을 떠올리고선 잽싸게 앞으로 달려들었다.

“죽어!”

“이 망할… 아아아악!”

“게리드! 이 썩을 년이!”

촤악-!

단검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갑옷 사이사이로 핏물이 터져 나왔다.

경비들은 이를 악물고 그녀에게 검을 휘둘렀지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싸늘한 시체가 되어 바닥에 눕고 말았다.

“하악, 흐으… 윽!”

하지만 에이다의 상태 또한 마냥 멀쩡하진 못했다.

한 번에 세 명의 경비를 상대한 그녀는, 곳곳에 검상을 입은 채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나마도 긍지 높은 세계수의 직계 자손이었기에, 다른 하이엘프들과 마찬가지로 어릴 적부터 궁술을 배우며 수십 년간 신체를 단련해서 이 정도에 그친 거였다.

활도 아니고, 손에 맞지도 않는 단검을 들고서 숙련된 경비들을 상대로 아무런 피해 없이 승리를 따내는 건 무리였다.

“저쪽이다! 저기서 비명이….”

“칫….”

그녀는 근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곧장 나무 위로 올라가 몸을 숨겼다.

“이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비명을… 어?”

곧 수풀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낸 병사는, 눈앞의 참상을 목도하고선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존, 갑자기 왜 멍청하게 멈춰서고 그래? 뭐 이상한 거라도… 허억!”

“이게 뭐야… 게리드? 켄타?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뒤늦게 도착한 세 사람 또한 바닥을 피로 흥건하게 적시며 쓰러져있는 동료의 시체를 보고선 주먹을 꾹 쥐었다.

“망할….”

에이다는 제 동료의 시체를 껴안고서 분노와 울음을 터트리는 녀석을 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 주제도 모르는 데다가 천박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싫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목숨을 걸고 놈들을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에이라, 사랑스러운 동생을 잃을지도 모르니까.

이깟 추레한 인간들의 목숨 따위, 그에 비하면 한 줌 모래만 한 가치도 없었다.

그녀는 손에 든 단검을 역수로 꼬나 쥐며, 나무 바로 아래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인간을 향해 뛰어내렸다.

* * *

“흐으, 으읏….”

털썩-

나는 피범벅에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다시 돌아와, 힘이 다 빠졌는지 내 앞에 무릎을 꿇는 에이다를 내려다봤다.

“으읍, 흐으읍!”

“에이라….”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언니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동생의 모습이 썩 감동적이었다.

물론 그들에게만 말이다.

나는 우습기 짝이 없는 신파를 보며, 그녀가 떨어트린 단검을 주웠다.

“실망이군. 난 분명 모두 정리하라고 했을 텐데. 일곱이나 살려 보낸 모양이더군.”

“그, 그건… 생각보다 놈들이 강해서….”

“핑계는 받지 않아. 이걸로 협상은 없던 일이 되겠군.”

“…뭐? 너, 너!”

나는 단검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내고선 다시 허리춤에 꽂으며, 내 말에 발끈하며 덤벼들려는 녀석을 향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농담이다, 농담.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까지 인심이 야박하진 않아.”

“이….”

에이다는 그런 나를 쳐다보며 뿌득 이를 갈았다.

이거 참, 놀리는 맛이 있어.

자칫하면 버릇이 들겠군.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다.

이렇게 계속해서 누가 갑인지를 마음속에 박아줘야, 이후에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할 테니까.

예를 들면 이제부터 그녀를 길잡이 삼아 에리스 그년의 동생을 찾아가야 할 텐데,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던가.

그런 일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래. 어쨌든 자리를 좀 옮기고 얘기하지. 계속 여기 있으면 도시로 돌아간 놈들이 인원을 더 채우고서 다시 찾아올 테니까 말이야.”

“…알았어요.”

“카렌, 발라크. 이동한다.”

나는 다시금 고분고분해진 그녀를 데리고서, 숲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에이라, 조금만 참아. 언니가 꼭 구해줄게.”

“으읍….”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숲을 벗어나 자그마한 마을이 보이는 언덕까지 다다른 나는,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두 자매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꼴에 엘프랍시고, 그렇게 다쳤음에도 뒤처지지 않고 잘도 따라왔군.

“좋아, 그럼 어디 다시 협상을 좀 시작해볼까?”

“…원하는 게 뭐예요?”

나는 체념한 듯 힘없이 입을 여는 그녀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내가 엘프 하나를 찾고 있는데 말이야. 듣자 하니 너희 엘프들은 숲 밖에 나와 있는 녀석들끼리 자주 연락을 나눈다지?”

“그건 그렇지만… 저라고 밖에 나와 있는 모든 동족들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에요. 만일 제가 당신이 찾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면….”

“오, 그건 아니지. 혹시나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지금부터 그 잘난 세계수한테 기도라도 드리는 게 좋을 거야. 부디 네가 내가 찾고 있는 녀석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기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귀여운 동생을 노예로 팔아버릴 테니까. 아니, 아예 둘이 묶어서 파는 건도 나쁘지 않겠군. 그편이 값을 더 받을 수 있겠어. 어차피 지금 네년은 경비들을 죽이고 달아난 범죄자니까, 딱히 뒤탈도 없을 테고. 그렇지 않나?”

“크으윽….”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제 입술을 꾹 씹는 에이다를 보며, 삐뚜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만하면 함부로 거짓을 내뱉진 못하겠지.

“…누구죠?”

“음?”

“찾고 계신다는 그 엘프. 혹시 이름이나 특징을 알고 계신 게 있나요?”

나는 결심이 선 듯 독기가 서린 눈빛으로 고개를 든 그녀를 보고선, 그때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안.”

“…네?”

난 이름을 말하기가 무섭게 두 눈을 떠는 녀석을 보며, 씨익 입 꼬리를 올렸다.

“그랜드 마스터, 에리스의 동생이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에이다는 눈가를 파르르 떨며 자꾸 뻐끔거리기만 할 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보아하니 어디 있는지 아는 눈치로군.

차르륵-

“흐읍! 큽… 컥….”

“에, 에이라!”

나는 고민에 빠진 듯한 그녀의 선택을 돕기 위해, 손에 쥔 쇠사슬을 힘껏 잡아당겼다.

갑작스레 당겨진 목줄에 그만 넘어져 버린 에이라는, 꽤나 고통스러웠는지 제 목을 붙잡고서 버둥버둥 바닥을 굴렀다.

“말해.”

“그건….”

에이다는 결국 동생이 괴로워하는 모습에, 동족을 팔아넘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선택이 미래에 무슨 결과를 불러올지, 감히 짐작조차 못 한 채.

* * *

“여기가 확실한가?”

에이다의 안내를 받아 에리스, 그 빌어먹을 엘프의 동생이 있는 곳을 찾아 걸음을 옮긴 지도 어느덧 열흘.

나는 꽤 높은 산봉우리에 서서, 전에 있던 도시보다 훨씬 서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을 내려다봤다.

“…네. 저희도 세 달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살았어요. 하지만 너무 여기까진 그 약이 잘 들어오지 않아서 자리를 옮긴 거고요.”

“음, 그렇군.”

“그럼 이제 풀어주시는 건가요?”

“아니, 아직은 아니야.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진, 너희를 풀어줄 수 없다.”

“그런… 알았어요.”

나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푹 숙이는 에이다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젠 완전히 순종적인 개가 다됐군.

물론 어디까지나 이렇게 목줄을 쥐고 있는 동안에만 그런 걸 테지만 말이야.

“카렌, 발라크. 기다리고 있어라. 확인하고 올 테니.”

“예, 형님. 그동안 잘 맡고 있겠습니다.”

나는 똑 부러지게 대답하는 발라크와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카렌에게 잠시 두 자매를 맡기고, 산을 내려 마을로 향했다.

“거 못 보던 양반이네. 여긴 무슨 일이오?”

“그냥 여기저기 떠돌고 있는 용병입니다.”

“용병? 뭐, 안에서 사고만 치지 마시오.”

“예, 물론이죠.”

나는 품에서 용병패를 꺼내 슬쩍 보여주며, 자경단으로 보이는 경비를 지나쳐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북쪽에 있을 때는 후작이 걸어놓은 수배 때문에 번거롭게 뒷돈을 먹여야 했는데, 서쪽에 들어서고부터는 아무래도 정반대라서 그런지 내 수배지를 찾을 수 없었다.

물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고 있긴 하지만, 이런 작은 마을을 지날 때는 그런 걱정하지 않아도 돼서 편하게 들락날락거릴 수 있었다.

“음.”

나는 한적한 시골 마을의 작은 주점에 앉아, 꼬치안주를 으적였다.

곧 대낮부터 가게에 들어와 술도 없이 안주만 시킨 내게, 후덕하게 생긴 주인장이 말을 걸어왔다.

“처음 보는 손님인데, 이 마을엔 무슨 일로 오셨소?”

“그냥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중입니다.”

“뭐 행상인이나 그런 거요? 으음, 차림새를 보니까 그건 아닌 거 같고. 그래! 손님, 이제 보니 용병이었구먼.”

난 옆에서 조잘대는 가게주인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선, 우물거리던 꼬치를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혹시 이 마을엔 뭐 특산품이라던 게 볼거리라던가. 그런 거 없습니까?”

“이런 작은 마을에 무슨 특산품이 있다고. 그렇지만 볼거리라… 외지인인 손님한테는 볼거리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있긴 하지.”

빙고.

나는 속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향해 물었다.

“볼거리라 할 만한 사람이라뇨?”

“으음, 정확히 말하면 엘프겠지. 실은 이 마을에 아주 끝내주게 예쁜 엘프 처자가 한 명 살고 있거든. 원래는 따로 자매 둘까지 해서 셋이 살았는데, 그쪽은 얼마 전에 떠나서 가버렸다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 엘프가 그렇게나 예쁩니까?”

“암, 두말할 것도 없지.”

“…이거,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안 보고 갈 수가 없겠군요. 혹시 어디 가면 그분을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 그러니까, 일단 가게 밖으로 나가면은….”

나는 주인장이 알려주는 길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며, 씨익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전에 엘프 자매가 이곳에 살았다는 걸 보면, 에이다의 말이 아주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자, 그럼 이제 직접 가서 확인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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