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음.”
후룹-
큼지막한 고기가 들어 있는 스프가 짭짤한 맛과 함께 입안에 감칠맛을 남기고, 목구멍을 따라 뱃속으로 떨어졌다.
명치 아래 안쪽부터 시작해 몸 전체가 따뜻하게 덥혀지는 느낌에, 절로 입 꼬리가 올라갔다.
“…괜찮군.”
셀레스트에게서 엘프가 있다고 전해들은 도시에 도착한 나는, 곧장 수소문을 통해 엘프가 일한다는 주점을 찾아 들어와 있었다.
딸랑-
“어서 오… 에이다! 아니, 왜 이렇게 늦었어.”
“죄송해요, 아주머니. 동생이 열이 나서 오는 길에 약 좀 타오느라….”
“뭐? 에이라가? 으음… 그럼 다시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에요. 그냥 열이 조금 나는 정도니까. 오늘도 손님이 꽉 찼네요? 바로 도와드릴게요.”
안에서 느긋하게 스프를 떠먹으며 기다리기를 십 분 정도.
나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곧장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나르기 시작하는 녹색 머리의 여인을 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찾았군, 엘프.
“이야… 에이다 씨, 오늘도 예쁘네.”
“그뿐이겠어? 성격도 아주 참하지. 그러고 보니 저번에 길가에서 에이다 씨 동생을 봤는데 말이야. 그쪽도 나이는 어려 보이지만 예쁘장하니, 제 언니처럼 훌륭하게 자랄 거 같더라고. 거기에 아주 애가 싹싹한 게, 뭐 하나 장을 보는데도 그렇게 말을 예쁘게 하는지… 엘프들은 다 그런가 싶더라니까?”
우습군.
나는 그녀의 등장과 함께 근처 테이블에서 쏟아져 나오는 얘기에, 피식하고 코웃음을 쳤다.
성격이 아주 참해?
“크흐흡….”
나는 쏟아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담아내느라 곤욕을 치렀다.
겉보기에는 그럴지 몰라도, 실상은 그 어떤 다른 종족들보다도 겉과 속이 다른 녀석들이 바로 엘프다.
당장에 생긴 것만 보더라도 저 에이다라는 하이엘프는 스물 남짓이나 될까 싶지만, 실상은 백을 넘겼을 거다.
보통 엘프들은 인간의 네 배.
하이엘프는 그보다 반은 더 산다고 하니까.
거기에 성격도, 애초에 숲속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자기들끼리만 모여 사는 놈들인 만큼 낯선 이들에 대해 배타적이었다.
자기들을 세계수의 자식이라고, 다른 종족들과는 달리 고귀한 피가 흐르고 있다고들 믿던가.
용사 시절, 그래도 훈련소를 졸업할 때쯤엔 나름 용사랍시고 대우해주는 주변 사람들 덕분에 잠깐이나마 사명감에 불타던 시절이 있었다.
마족들의 습격으로 위기에 빠진 세계. 그리고 힘을 합쳐 그들을 구하기 위해 소환된 용사들.
연합은 약삭빠르게도 아무것도 모르는 용사들을 제 뜻대로 이용해먹기 위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그들을 전장 중에서도 최전방으로 내몰았다.
하지만 그렇게 다들 용사라고 어화둥둥 띄워주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뒤에서 아니꼬운 시선을 보내던 놈들이 있었지.
그게 바로 저 엘프들이었다.
앞에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용사님, 뒤로는 그래 봐야 천박한 인간들 주제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도적이었던 나는, 기척을 숨기고 몰래 돌아다니는 연습 중에 그런 놈들의 진짜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여기 스프 한 그릇만 더 주시오.”
“예!”
나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주문을 받는 에이다라는 하이엘프를 보며, 그녀가 퇴근할 때까지 천천히 남은 스프를 홀짝였다.
* * *
에이다는 뉘엿뉘엿 해가 다 넘어가고 나서야, 짐을 챙긴 채 천천히 주점 밖으로 나섰다.
나는 조금 거리를 두고 슬금슬금 뒤를 쫓으며, 그녀가 도시 외곽에 있는 판자촌을 지나서 홀로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오두막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저긴가.”
그러고 보니 아까 동생을 위해 약을 타오느라 늦었다고 했던가.
나는 조용히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지금 막 불이 켜진 오두막을 바라보았다.
엘프들은 다른 종족들에 대해서 배타적인 만큼, 자기들끼리는 아주 강한 유대를 이루는 편이었다.
하물며 그게 자매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그것도 단둘이 숲에서 나와, 인간들 사이에 끼어 살아가고 있다면 더더욱.
“…아주 좋아.”
나는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내일 에이다가 집을 비웠을 때 다시금 이곳을 찾기로 했다.
혹시라도 내가 원하는 정보를 모르고 있다한들, 제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알아 오겠지.
엘프들은 그런 놈들이니까 말이야.
* * *
“오늘도 고생했어, 에이다. 에이라는 좀 괜찮아졌니?”
“네. 어제 약을 먹어서 그런지, 열이 많이 내렸더라고요. 이제 하루 이틀만 더 지나면 쌩쌩해질 거 같아요.”
“어휴, 그거 참 다행이네. 자, 이건 보너스. 나중에 에이라가 다 나으면 둘이서 맛있는 거라도 사 먹으렴.”
“감사합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앞치마를 벗어 걸어놓고 주점 밖으로 나왔다.
늙어서 추레하게 주름살이 잡힌 인간이 챙겨준 은화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후우… 나이도 어린 녀석이 꼬박꼬박 반말은… 재수 없게. 하여튼, 이래서 인간들은 안 된다니까.”
끽해야 내 절반이나 살았을까 싶은 녀석이, 어린 동생을 데리고 고생하는 모습이 장하니 뭐니.
식사를 하러 왔으면 곱게 음식만 먹고 나갈 것이지, 음흉한 눈빛으로 힐끔힐끔 쳐다보고 상스럽게 추파나 던지는 꼴을 보면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에이라가 걸린 지병의 약초가 대륙 중부와 동부에서만 자생하는 게 아니었더라면, 이런 질 떨어지는 곳에 나와서 살 필요도 없었을 텐데.
하다못해 숲 안에서 약을 구할 수만 있었더라도…
“…아니지. 그러자고 추악한 인간들을 숲에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어느덧 저 멀리 보이는 오두막을 바라보았다.
에이라.
내 사랑스러운 동생.
남들처럼 숲을 지키는 훌륭한 수호자가 되고 싶어 했지만, 지병 때문에 몸이 약해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가여운 아이.
하지만 그럼에도 에이라는 항상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는 일이 없었다.
“…힘내자.”
나는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오늘 있었던 짜증과 피로를 지워냈다.
올해로써 숲을 나온 지도 벌써 10년.
그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돈을 모아 꾸준히 약을 챙겨준 덕에, 이제 앞으로 1년 정도면 그녀의 병도 완치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러면 에이라를 데리고 다시 숲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끼익-
“에이라, 언니 왔어.”
나는 오두막의 문을 열며, 지금쯤 새근새근 자고 있을 동생을 찾았다.
“에이라?”
오늘은 거실에 없네.
항상 늦게 돌아오는 나를 기다린다고, 문 앞에서 기다리다 잠이 들어 있었는데.
혹시 아직 열이 다 내리지 않아서, 방에 들어가 쉬느라 그런 건가?
“어? 이게 왜 여기 그대로….”
그렇게 에이라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방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내가 없는 동안 챙겨먹으라고 꺼내놓았던 약이 그대로 남아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약을 거른 적이 없던 애가, 무슨 이유로…
“…서, 설마! 에이라!”
나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에, 다급히 에이라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덜컥-
“아… 아아….”
없다.
침대에 다소곳이 누워 잠들어있어야 할 에이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 아래, 평평하게 개여있는 이불을 보고선 그만 휘청거리며 뒤로 쓰러졌다.
“에, 에이라… 도대체 어디에… 어?”
지금 막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물을 쏟아내려던 나의 눈에, 고이 접혀 침대 끝에 놓여있는 종이가 들어왔다.
“이건….”
혹시 에이라를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을까.
덜덜 떨리는 손길로 종이를 펼친 나는, 안에 적힌 글귀를 보고선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
“흑… 아, 안 돼… 에이라!”
내가 집을 비운 사이, 그녀는 누군가에게 납치당하고 말았다.
* * *
“저기 오는군. 아주 눈물 나는 자매애야, 그렇지?”
“으읍! 읍!”
전날에 에이다가 집을 비운 틈을 타서 그녀의 동생을 납치해온 나는, 저 멀리 초조한 얼굴로 수풀을 헤치며 다가오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에이라!”
“언니… 커흑!”
나는 두 자매의 감격스러운 상봉을 보며, 동생의 목에 걸린 사슬을 잡아당겼다.
녀석은 갑작스레 당겨진 목줄에 걸려, 거친 숨을 토해내며 괴로워했다.
“에, 에이라! 너, 너 이 새끼!”
“이런, 미안하군. 갑자기 튀어 나가려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이지 뭐던가. 그런데… 어째 생긴 거랑 다르게 말투가 아주 험악하군, 에이다 양. 너무 무서워서 그만 이대로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걸. 물론, 네 동생도 같이 데리고 말이야.”
“읏… 죄, 죄송합니다.”
그래, 그래야지.
나는 눈치 좋게 바로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높이는 에이다를 보고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야 좀 얘기를 나눌 자세가 된 거 같군.”
“…바라시는 게 뭐죠? 제가 어떻게 해야 에이라를….”
“오,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마. 일단 제대로 확인부터 하고 가자고. 에이다, 혼자 온 게 맞겠지?”
“물론이에요.”
“그래?”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에이다를 보고선, 그녀의 뒤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카렌, 발라크. 정말인가?”
“…네, 네?”
그럼 그렇지.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자마자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는 그녀를 보며, 삐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다른 사람을 데려온 모양이군.
안타깝게도, 전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지금 막 무기를 든 인간들이 숲속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형님.”
“음. 어림잡아 스무 명은 되는 거 같군.”
스무 명이나?
나는 인간도 아니고 일개 엘프 하나가 납치됐을 뿐인데 그 정도나 되는 병사들이 움직였다는 사실에 놀라며,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에이다를 바라보았다.
그저께 주점에서 봤을 때도 그렇고, 생각보다 인망이 높은 모양이었다.
하긴, 적어도 겉으로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모두에게 친절히 대하며 살았겠지.
거기에 생긴 건 예쁘장하니, 어디 경비대장이라도 하나 꾀어서 사람을 끌어모은 걸지도 몰랐다.
“수, 수인? 아니, 그러기엔 뭔가….”
나는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둘을 보고선 당황하는 그녀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하는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에? 으, 아아… 그, 그게….”
“분명히 아무도 데리고 오지 말고 혼자 오라고 했을 텐데? 그런데도 뒤에 경비를 스물이나 달고, 같잖은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나를 속이려고 들다니.”
찰캉-
“아으윽! 컥, 커헉….”
“네 귀여운 동생이 어떻게 되도 상관없나 보지?”
“에, 에이라! 아니에요! 저건 그저… 그….”
“마음 같아선 협상은 그냥 없던 걸로 하고, 이대로 이년을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그녀는 팽팽하게 당겨진 사슬에 목이 졸리면서 안색이 파리해져 가는 동생을 보며, 울상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허리춤에 달고 있던 단검을 하나 꺼내 던져주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처리해.”
“…네?”
“못 들었나? 네가 데리고 온 짐덩이들을 모두 정리하라는 말이다. 설마 긍지 높은 세계수의 딸이, 숲에서 인간 스무 명도 못 잡겠단 소리는 하지 않겠지?”
아마 못 잡을 거다.
아무리 하이엘프라고 해도, 숲을 지키는 수호자가 아닌 이상이야 활도 아니고 단검으로 스물이나 되는 경비를 상대하는 건 무리일 터.
하지만 그녀는 거부할 수 없을 거다.
그랬다가는 자기 동생이 죽고 말 테니까.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허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는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줍는 그녀를 보며, 손에 쥔 사슬을 다시 한번 잡아당겼다.
“으, 컥!”
“네가 아무리 빨리 덤벼든다고 해도, 이쪽이 먼저 죽을 테니까.”
“알았어요! 할 테니까 제발 에이라는….”
“알아들었으면 빨리 가지 그래? 너무 늦으면 또 어떻게 될지 몰라.”
“읏….”
나는 결국 입술을 꾹 깨물고선 숲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경비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보며 입가를 비틀었다.
자, 그럼 어디 가만히 구경이나 좀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