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흡혈귀의 수치라.
그러고 보니 이 몸뚱이가 그런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가.
나는 우선 왜 이 무례한 늑대인간이 여기 있는지 얘기를 나누기 위해, 카렌이 남아있을 동굴로 들어갔다.
“칫… 진짜 뱀파이어잖아?”
“그러면 저놈이 그….”
안에는 그 싸가지 없는 녀석 말고도, 늑대인간이 여섯이나 더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들이군.
두 종족끼리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엄연히 적진 한가운데인 곳에서까지 이렇게 대놓고 적의를 들어낼 줄이야.
그래도 덤벼들지는 않는 걸 보면 최소한의 선은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좋게 대해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똥개들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또, 똥개? 이 모기자식이, 지금 누구더러 똥개라는 거냐! 피도 못 빨아먹는 반푼이 주제에!”
“그만, 소고스. 지금 같은 정찰대끼리 싸울 때가 아니야. 뱀파이어가 됐든 발록이 됐든 용족이 됐든, 우연찮게 만난 김에 서로 알고 있는 게 있으면 정보 좀 나누자고. 어쩌면 그게 전공을 세울 기틀이 되어줄지도 모르잖아?”
“…우연찮게?”
나는 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늑대인간을 물리고 앞에 나선 여인을 보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뒤쪽에 앉아있는 카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정말로 그냥 우연히 마주친 모양이었다.
다행히 우리가 아이시스와 악마족들을 찾아갔던 것처럼, 어디 소문이 퍼진 건 아닌 듯했다.
“그래, 그럼 잠시 얘기 좀 나눠보지. 그쪽 말대로 괜찮은 정보가 있다면 공유해서 나쁠 건 없을 테니 말이야.”
“그쪽이 아니라 셀레스트다. 긍지 높은 보름달의 전사지.”
“음… 그래, 셀레스트.”
나는 아까 입구에서 먼저 마주쳤던, 자랑스럽게 제 가슴을 쭉 펴 보이는 여인을 보며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천장을 향해 바짝 세운 꼬리가, 그녀의 높은 자부심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아까 우연히 이쪽과 마주쳤다고 했는데, 어디서 오는 길이지? 최근 이 근처에 있는 마을에선 수인들이 꽤 배척받는 분위기던데 말이야. 너희들도 그걸 피해갈 수 없었을 텐데.”
평상시의 늑대인간들은 생김새가 보통의 개과 수인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지금으로선 그들이 보름달 아래에서 완전히 늑대의 형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지 않는 이상에야 크게 위화감을 느끼긴 힘들겠지.
생각해보면 아쉬운 일이었다.
마계 7종족으로 분류되는 뱀파이어, 늑대인간, 악마족, 용족, 발록, 가고일, 몽마 모두.
아직 이들이 그들의 특성은 물론 존재 자체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이 바로, 중간계를 정복하기 가장 좋은 때일 텐데 말이다.
물론 상대를 모르는 건 마족들도 마찬가지였기에 조심스러운 것도 있었겠지만, 본래 호전적인 마족의 특성상 온건파만 아니었다면 단번에 밀고 들어왔을지도 몰랐을 텐데 싶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 그렇지 않아도 그 망할 수인들 때문에 서쪽에서 쫓겨난 참이야. 빌어먹을… 이제 거의 도시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릴 준비가 끝났었는데. 북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갑자기 인간들이 멋대로 우리를 짐승 취급하며 공격하더군.”
그녀는 빠득빠득 이를 갈며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도시 하나를 통째로 날릴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니.
순간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왕군이 침공하기 직전에, 제국 서쪽에 있던 후작령 휘하의 도시 하나가 알 수 없는 테러로 쑥대밭이 되어버린 일이 있었다고 했던가.
범인을 찾겠답시고 조사단을 꾸렸지만,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해서 흐지부지되던 찰나에 마족들이 쳐들어와서 그대로 넘어갔다고 들었다.
그게 이 늑대인간들이 벌인 일이었던 건가.
“덕분에 지난 세 달 동안 차근차근 쌓아온 계획이 물거품이 됐어. 아주 끝내주는 전공이 됐을 텐데 말이야.”
하긴, 어딘가 이상하다 싶었다.
카렌도 아이시스도 지난번에는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넘어갔을 텐데, 도대체 누가 어디서 온건파들을 납득시킬만한 전공을 세운 건지 의문이었다.
누군가 눈에 띌만한 전공을 세웠더라면, 분명 용사 시절에 그와 관련된 얘기를 한 번쯤은 들었을 법도 한데 말이지.
거기에 그런 사정이 있었던 건가.
“그거 참 안타깝군.”
결론은 내가 북쪽에서 인간과 수인 사이에 국지전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들이 쫓겨나게 된 것 같았다.
저런, 미안해라.
그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땐 딱히 손해는 아니었다.
물론 죽은 사람들로 따지자면 단순히 도시 하나를 날린 게 더 많을지는 몰라도, 이쪽은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수인의 전사와 주술사들을 수백 수천 명이나 날려버렸으니까.
거기에 두 종족간의 사이를 완전히 틀어버렸으니, 전공의 크기로 따지자면 비교할 것도 없이 이쪽이 훨씬 우위였다.
그나저나 아까 서쪽에서 올라왔다고 했던가.
“그런데 혹시 그 쫓겨났다는 곳에서 엘프를 본적은 없었나? 귀가 크고 길쭉한 애들 말이야.”
“…엘프? 아, 그 귀쟁이들? 그러고 보니 그런 놈들이 몇 명 있긴 했지. 그런데… 너무 이쪽만 말하는 거 아니야? 우리도 뭐 좀 듣고 싶은데.”
그래, 엘프를 보긴 봤단 말이지.
물론 그게 내가 찾는 녀석일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외지에선 서로 같은 종족끼리 이따금씩 교류를 하는 편이니까 알음알음 찾아갈 수 있으리라.
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바라는 대로 입을 열어주었다.
“그래, 뭐가 좋을까. 혹시 지금 북쪽의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나?”
“…떠 보는 거야? 미안하지만 방금 말했듯이 우린 이제 막 서쪽에서 올라오는 길이라서 말이지. 북쪽에 대해선 최근에 인간이랑 수인끼리 한 번 박 터지게 붙었다는 것 빼고는 아는 게 없어.”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이걸로 도움이 되겠군. 실은 그쪽 상황이 아주 정리된 건 아니라서 말이야. 듣자하니 아직도 국경에선 간간히 서로 부딪히고 있다더군. 그 근처에 커다란 숲이 하나 있는데, 그 중앙 즈음에 있는 동굴에 악마족들이 잠시 머물고 있지. 찾아가면 같이 전공을 좀 나누어먹을 수 있을 거다.”
악마족들은 전공을 나누는 걸 그리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정찰대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아이시스는 그들을 매몰차게 버릴 수 없을 거다.
물론 굳이 버릴 필요도 없이, 아이시스라면 자신들보다 더 수인과 닮은 녀석들을 데리고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알고 있겠지.
“그 국경 근처에 악마족이? 설마….”
셀레스트는 꼬리를 바짝 세우며, 팍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에 잠긴 시간이 지날수록 구겨짐이 심해지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 국지전이 일어난 이유에 그들이 끼어있진 않을까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에릭, 넌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증명할 수 있나?”
“내가 무엇 하러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겠나. 종족간의 원한은 집어두고, 일단은 같은 편인데 말이야. 그리고 증명은 그쪽도 못하는 게 피차일반 아닌가?”
“으음, 그건….”
“게다가 이 정도면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 정보를 받아가야 할 정도인 거 같은데. 내가 들은 거라고는 끽해야 실패해버린 너희 계획이랑, 엘프 몇 좀 봤다는 게 전부인 듯한데. 이쪽은 전공이라고는 아무것도 세우지 못한 너희를 위해 방법까지 제시해주고 있잖은가.”
“으…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하지. 미안하다….”
나는 그래도 아주 염치가 없는 건 아닌지, 꼬리를 축 늘어트리며 고개를 푹 숙이는 그녀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됐다. 어차피 이건 정보 거래가 아니라 공유니까 말이야. 수지에 안 맞는 장사라도 어쩔 수 없지. 그보다 이제 그 엘프들에 대해서 얘기를 좀 듣고 싶은데.”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셀레스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래. 엘프 말이지….”
이후 그녀에게서 자기들이 마주쳤던 엘프들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나는 그중에서 최대한 에리스와 비슷한 특징을 가진 녀석들을 추려냈다.
그렇게 나온 게 대략 세 명 정도.
우선 그 세 놈들이 있다는 도시로 먼저 가봐야겠군.
“그럼 얘기도 전부 나눈 거 같은데, 서로 갈길 마저 가지.”
“좋아. 볼일도 다 끝났는데 굳이 네 핏기 없는 얼굴을 더 보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나는 결국 헤어지는 순간까지 툴툴대는 녀석을 무시하고, 곧장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잠깐, 거기 용족. 너, 분명 마룡왕님의 공주님 맞지?”
늑대 계집과의 얘기를 마치고 동굴 밖으로 향하는 에릭을 따라 나서기 직전.
나는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알면 함부로 이 몸에게 말 놓지 마라, 하찮은 것.”
감히 이 몸의 발길을 막은 무례한 녀석을 향해 시선을 주고 있자니, 그 모습이 어디서 본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 여자도 아이시스, 그 계집이랑 마찬가지로 우리 성에 몇 번 얼굴을 비췄던 놈이었지.
그래 봐야 딱히 기억에 남는 녀석도 아니었지만 말이야.
“하! 용들이 까칠하기로는 마계 제일이라더니. 어쨌든, 왜 공주님이 저런 반푼이 흡혈귀랑 같이 다니는 건진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소문만큼 대책 없는 놈은 아닌 것 같긴 해도, 정말 아무 문제없는 녀석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얘기 자체가 돌지 않았을 테니까.”
“흥. 쓸데없는 참견이다. 그리고….”
소문이라.
에릭 그 녀석에게 무슨 꼬리표가 붙어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반응을 보아하니 별로 좋은 얘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이제 와서 아무 상관없는 얘기였다.
“이 몸은 소문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이 눈으로 본 것만을 믿을 뿐. 적어도 이 몸이 보기에 에릭은, 아주 대단한 녀석이다.”
거기에 아주 건방지기까지 하지만 말이지.
감히 이 몸을 제 부하처럼 부려먹으려 들다니.
그건 아직까지도 불만스러웠지만, 그래도 봐줄 수 있었다.
그는 그럴 자격이 있는 남자였으니까.
강하고, 얍삽하고, 대담하다. 그리고 어찌됐든 날 그 빌어먹을 인간 귀족 놈으로부터 풀어준 녀석이었다.
“카렌, 거기서 뭐하나. 빨리 와라, 두고 가기 전에.”
이 자식이 또…
나는 울컥 새어 나오려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 몸한테 명령하지 마라!”
“그래서, 안 올 건가?”
가고 있다, 이 망할 녀석!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고 있는 바깥으로 나오자, 입구 앞에 멈춰서 안쪽을 바라보고 있는 창백한 피부의 사내가 보였다.
그는 그대로 내 뒤를 따라 나온 늑대 계집을 보고선, 비릿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셀레스트, 아까 북쪽 국경 근처에 악마족이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물었나?”
“…그랬었지.”
“이제야 답을 해줄 수 있을 거 같군. 그야 당연히 내가 그들을 데리고 거기서 전공을 세웠기 때문이지. 그럼, 이만 정말로 가보도록 하겠다.”
…악취미다. 굳이 그런 건 밝히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거기서 전공을? 아. 너, 너였냐! 거기서 인간이랑 수인을 싸움 붙인 녀석이! 이, 빌어먹을 모기 자식!”
“프흐흐….”
나는 뒤늦게 그의 말을 이해하고 성을 내는 여인을 보고선 숨을 죽이고 끅끅대는 녀석을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참, 별것도 아닌 걸로 싸우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