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계속 쫓아라! 한 놈이라도 더 죽여!”
“빌어먹을 인간 놈들! 거긴 내 고향이었단 말이다!”
갑자기 인간 기사들이 있던 곳을 덮친 불기둥에, 팽팽했던 전황은 금세 수인들에게로 기울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잠시 후퇴해서 병력을 보충할 생각이었던 그들은, 갑작스레 찾아온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비록 왜 자기들끼리 마법으로 같은 편을 공격했는지는 아직 의문이었지만, 혹시나 함정일까 싶었던 생각은 금방 안으로 들어갔다.
버림패도 아니고, 주력인 기사들의 목숨을 미끼로 쓰다니.
그런 멍청한 작전이 존재할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대단해.”
아이시스는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조그맣게 벌린 채, 그 풍경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에릭 가이오스….”
혈마왕, 체르페슈 블라드가 다스리는 땅을 받치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인 가이오스가(家)에서 태어난 이단아.
그에 대한 소문은, 나태의 마왕의 영지를 벗어나 악마족과 몽마의 땅까지 퍼져있었다.
“피를 두려워하는 흡혈귀… 종족의 수치라고? 저게?”
처음 동굴에서 그를 만났을 때 마룡왕의 딸인 카렌과 같이 있는 걸 보고 어느 정도 혈통 있는 뱀파이어일 거라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설마하니 그 소문의 주인공일 줄은 몰랐다.
흡혈귀가 피를 두려워한다니.
너무나 터무니없는 얘기에 혹시 누군가 악질적으로 꾸민 말이 아닐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소문과 실물이 이렇게나 차이가 날줄은 몰랐다.
길바닥을 전전하는 임프들조차 비웃던 반쪽짜리 뱀파이어는, 마왕의 후계를 마치 애완동물 다루듯 목덜미를 채다가 던질 정도로 강단 있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고작 오십도 안 되는 인원을 이용해, 만 명이 넘는 규모의 국지전을 일으켜버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흉계마저 꾸밀 줄 아는 놈이었다.
“다 거짓이었어.”
지금의 그를 보고서, 누가 종족의 수치라고 비웃을 수 있겠는가.
왜 마계에 그런 소문이 돌았던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 이런 반응을 노리고서, 무언가 날카로운 한 수를 위해 지금껏 묵묵히 칼날을 갈고 있었던 걸까?
처음에 일부러 모르는 척 대단한 뱀파이어라고 슬쩍 떠보았을 때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던 걸 보면, 자신의 오명이 나도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새였는데 말이다.
어쩌면 온갖 멸시와 불명예스러운 취급을 다 감내해가며 자신의 본질을 숨겨온 그야말로, 절대 남에게 함부로 제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밤의 귀족에 가장 걸 맞는 인물이 아닐까.
“…프랭, 어떻게 생각해?”
“네, 네? 어… 슬슬 저희도 수인들을 향해 공격을 퍼부어야 하는 게 아닌지….”
“…아니야, 됐어.”
나는 에릭에 대해 물었지만, 저 앞에 인간들을 계속 쫓으며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있는 수인들을 가리키는 프랭을 보고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깊게 생각할 필요 없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에릭이 만들어준 기회를 잡아내는 것.
당장은 이 전쟁을 끝내고, 최대한 커다란 전공을 세우는 게 우선이었다.
“쓸어버려.”
“예, 대장!”
“대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다들 저 털복숭이들을 공격해! 전공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나는 수인들의 발밑에서 솟아나는 각양각색의 마법들을 보며,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를 품었다.
그 무능한 오라비를 제치고 올라서기 위해선, 아버지를 납득시킬만한 큰 공이 필요했다.
그것이 내가 버림패로 취급받던 정찰대에 자원해 들어온 유일한 이유였다.
“에릭….”
그리고 그는, 내게 그 지름길을 보여줄 유일한 열쇠였다.
* * *
“푸하….”
[호랑이 부족 대전사, ‘울마크’를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힘이 ‘2’ 증가합니다.]
[체력이 ‘1’ 증가합니다.]
숲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 나온 나는, 전쟁이 끝나고 내버려진 시체들을 흡혈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이시스를 비롯한 악마족들의 마법세례에 수인들마저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내쫓기듯 도망쳐버린 덕에, 벌써 오십이 넘는 시체를 처리했음에도 아직 남아있는 게 산더미였다.
[흑장미 기사단의 상급 기사, ‘메르시안’을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민첩이 ‘2’ 증가합니다.]
[체력이 ‘1’ 증가합니다.]
“흐흐, 크흐흣….”
나는 마지막으로 칼리스, 그놈의 연인을 처리하고선 바닥에 내던졌다.
텅그렁-
시커먼 묵빛 갑옷이 바닥에 부딪히며, 텅 빈 깡통 같은 소리를 냈다.
도망치는 인간들을 하나라도 더 죽이기 위해서 끈질기게 달라붙는 수인들 때문에, 제 연인의 시체마저 두고 떠나다니.
나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울리는 것만 같은 그의 처절한 울부짖음 떠올리며,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카렌, 뒤처리하도록.”
“명령하지 마라! 이 몸은 네 부하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일전에 구해줬기에 같이 어울려주고 있을 뿐….”
“그래, 부탁하마.”
“…흥.”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픽 돌리는 카렌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꼬박꼬박 내 말을 들어주기는 하는 게, 어째 내가 노예에서 구해준 은혜를 마음에 담아두고는 있는 모양이었다.
“파이어 볼.”
화륵-
나는 그녀가 무영창으로 쏘아낸 불덩이가, 한곳에 모아놓은 시체들을 집어삼키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인간들도 수인들도, 곧 사람을 보내서 시체를 수습하려고 들겠지.
갑자기 없어진 시체를 보고서 잠시 동안은 서로가 서로를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시간이 지나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런 의심의 씨앗을 남기게 되더라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냥 내버려두었다간, 오히려 삐쩍 말라붙은 시체를 보고선 더 큰 의심을 사게 될 테니까.
거기에 카리스, 그 빌어먹을 놈에게 한 방 더 먹여줄 수 있기도 하고 말이지.
흐흐, 제 연인의 장례를 시체도 없이 치러야 한다니.
거 무능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군.
“…에릭.”
“음, 아이시스. 무슨 일인가.”
나는 어느덧 재가 되어 백골만이 남아버린 시체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옆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글쎄. 북쪽에서의 일은 이제 거의 마무리된 거 같으니, 슬슬 다른 전공을 세우러 가봐야겠지.”
사실 무얼 하러 갈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에리스.
내 심장에 제 화살을 박아 넣은, 망할 엘프의 그랜드마스터.
그 빌어먹을 년에게 보낼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제국 서쪽으로 갈 예정이었다.
“다른 전공….”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무어라 중얼거리고선, 이내 맑은 하늘색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도, 같이 가도 돼?”
“…너도 같이 말이냐?”
나는 지그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힘들 거 같군.”
“…왜?”
“그야 넌 이끌어야 할 부하들이 있지 않은가. 정찰대장이 마흔이 넘는 부하들을 버리고 가면 쓰나.”
솔직히 말해서 아이시스를 데리고 다닌다면 분명 도움은 될 테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봤을 때 그건 별로 옳지 못한 일이었다.
당장에 그녀의 능력을 이용해서 무언가 큰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닌 이상에야, 이만 여기서 헤어지는 게 맞았다.
그래야만 이후에 세울 전공을 어이없이 나누어먹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녀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따로 떨어져있던 게 아닌 이상에야, 부하의 공적은 그 상급자에게도 일부 돌아가게 되어있으니까.
“…응.”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는 아이시스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말없이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읏, 에릭….”
난 잽싸게 머리를 빼내고 새초롬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는 그녀를 보며,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인간과 수인의 국지전은 끝난 게 아니다. 물론 군대를 끌고 와서 부딪히는 건 이걸 마지막으로 흐지부지될지도 모르지만,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이후 간간히 사람을 보내올 거다. 그걸 막다보면 언젠간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서, 꽤 강한 놈들이 소수 정예로 조사차 나오겠지. 그런 녀석들은 보통 한 자리를 하는 놈들일 테니, 사로잡으면 꽤 그럴싸한 전공을 올릴 수 있을 거다.”
“…고마워.”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충고를 던져주고선 등을 돌렸다.
이렇게 호의를 베풀었으니, 나중에 마계로 돌아가면 위에 한 마디라도 더 꺼내주겠지.
뭐가 됐든 결국 윗선에 전공을 보고하는 건 일개 대원이 아니라 대장일 테니, 이 정도 콩고물을 흘려주는 것 정도야 나름의 투자라고 봐도 되리라.
“카렌, 발라크. 가자.”
난 슬슬 장작을 다 태우고 꺼져가는 불길을 뒤로하고, 국경 근처를 벗어나 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 이제 복수의 시간이다.
망할 귀쟁이 녀석들아.
* * *
“자네, 소식 들었나? 듣자하니 서쪽에 수인족들 무리가 숨어살았던 모양이야. 빌어먹을 짐승 놈들. 자기들 땅에나 가서 살 것이지.”
“혹시 거기서도 마을사람들을 학살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거 아니야? 하여튼 이래서 머리 위에 뿔 달리고 귀 달린 놈들은 상종하지를 말아야한다니까.”
북쪽 국경에서 악마족들과 헤어지고 서쪽으로 걸음을 옮긴지도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나는 중간 중간 들리는 도시마다 내가 의도했던 대로 수인들에 대한 분노가 차있는 사람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육포만 다섯 주머니? 어디 멀리 나가시나 봅니다.”
“예, 서쪽에 볼일이 있어서요. 듣자하니 거기 엘프들이 몇몇 숲을 나와서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하던데.”
“엘프들이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도 있었지요. 소문으로는 숲에서 쫓겨난 녀석들일지 모른다고 하더랍니다. 은화 한 개만 주세요.”
나는 상인에게 은화 하나를 건네며, 육포가 한 가득 들어있는 주머니 다섯 개를 건네받고 가게를 나섰다.
“거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세요. 요새 수인들 때문에 난리도 아니던데, 역시 이종족들은 믿을 게 못된다니까.”
“충고 감사합니다.”
딸랑-
가게 밖으로 나온 나는, 곧장 도시 근처 숲에서 기다리고 있는 카렌과 발라크에게로 향했다.
이종족들은 믿을 게 못 된다니.
인류제국도 만만치 않게 더럽고 뼛속까지 썩어문드러졌는데 말이야.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꼴이군.
“발라크, 왜 거기 그러고 서있나.”
금방 숲속으로 들어온 나는, 동굴 안에서 쉬고 있었을 발라크가 밖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선 고개를 갸웃했다.
안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저, 형님. 그게….”
“하! 진짜로군. 정말로 그 에릭이잖아?”
“음?”
나는 그의 뒤에서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늑대인간인가?
뱀파이어인 이 몸뚱이와는 서로 못 잡아먹는 앙숙 같은 종족이었다.
“…나를 알고 있나?”
“오, 그럼. 알고 말고. 우리 늑대인간들 중에 네 소문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있나.”
반짝이는 은회색 머리칼을 흩트리며 나타난 여인은, 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나타나 내 앞에 섰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새빨간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씨익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안 그래? 흡혈귀의 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