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저기 봐! 장미 음각이 새겨진 시커먼 묵빛 갑옷… 에베르 후작가의 흑장미 기사단이야!”
“어이, 이봐. 저쪽에… 파르메르 백작가가 자랑하는 마도병단 아닌가?”
“세상에… 정말 전쟁이 일어나려는 모양이군.”
용병들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수인족 마을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돌아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그간 시간이 날 때마다 국경 근처를 돌아다니며 양쪽의 상처를 조금씩 헤집어준 결과, 기어코 전쟁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말았다.
비록 국가 간의 전면전으로까지 이어지진 않았지만, 인류제국의 북부와 수인연합의 남부끼리 국지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출정이다! 감히 허락도 없이 멋대로 국경을 넘어, 제국의 땅과 백성들을 무참히 짓밟은 짐승들에게 인간의 분노를 보여줄 때가 왔다!”
“와아아아!”
북문 앞에 모인 수천 명의 군대가 내지른 함성이 도시 전체를 찌르르 울렸다.
제국 북부의 전력이 모였다고 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숫자긴 했지만, 각 지역의 귀족들이 보내온 병력들은 하나 같이 기사단이나 마도병단과 같은 고급인력들이 대다수였다.
아무래도 식량사정이 풍요로운 제국 동부나 남부와는 달리 북부의 토지는 척박하기 그지없는지라, 군대의 규모를 포기하고 정예들만을 모아 빠르게 승부를 보려는 모양이었다.
이 전쟁이 제국 전체의 싸움이었다면 모를까.
내부에서 어떤 정치적인 다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북부만의 싸움이 되어버린 이상, 식량이 모자라면 다른 지역의 귀족들에게 값을 치르고 사와야 할 테니 부담이 되었을 터.
덕분에 전쟁의 규모가 예상했던 것보다 작아진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만 하더라도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셈이었다.
어디까지나 훗날 연합이 이루어졌을 때를 대비해, 인간과 수인 사이에 감정의 골을 남겨놓는 게 주된 목표였으니까.
“칼리스….”
나는 가장 선두에 서서 군을 이끌고 나서는 묵빛 갑옷의 기사를 보며, 조용히 이를 갈았다.
흑장미 기사단의 단장이자, 에베르 후작가의 적자.
후작의 뒤를 이어 가문을 더욱 번창시킬 거라 모두가 입을 모으는, 군략과 검술의 천재.
태생부터 정통성 있는 귀족임에도 어디 하나 모나지 않고, 가신들은 물론 제 영지민들까지도 확실히 챙겼기에 참 평판이 대단한 놈이었지.
듣기로는 에베르의 영지에선 제국 황제보다 녀석에게 더 충성을 다한다고 했던가.
그런 소문 때문에 한 번 크게 곤혹을 치를 뻔했을 정도로 인덕이 훌륭한 놈이었다.
그래, 딱 제국민들에게까지만 말이다.
“용사들은 얼마든지 소환할 수 있다고 했던가.”
자기 가신들은 죽어도 내보내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용사들의 힘만을 쥐어짜내는 놈이었지.
덕분에 그놈과 같이 전장에 섰다가, 누가 봐도 미끼로 내던져지는 자리에 억지로 끌려들어간 용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제국의 충견 칼리스.
뼈대 좀 굵은 용사들 사이에선, 그렇게 불리는 놈이었다.
“…죽일 수 있을까?”
나는 그의 뒤에 바짝 붙어 따르고 있는, 똑같은 묵빛 갑옷을 입은 백 명의 기사들을 살폈다.
하나 같이 기세가 제법 날이 선 실력자들뿐이었다.
두세 명 정도는 어째 잡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다섯 정도가 모이면 지금의 나로서는 도망조차 쉽지 않을 거 같았다.
[에릭 가이오스]
[뱀파이어]
[레벨 : 20]
[힘 : 57] [민첩 : 47][체력 : 58][마력 : 38]
여기서 능력치가 조금만 더 높았더라면 그냥 정면으로 파고들어도 됐겠지만, 굳이 그런 무식한 방법을 쓸 필요는 없겠지.
도적에겐 도적의 방법이 있으니까.
전쟁통에 혼란한 틈을 타 뒤를 파고드는 칼날은, 제아무리 강자라고 한들 쉽사리 피할 수 없는 법이다.
어쨌든, 일단 녀석을 잡는 건 기회를 봐서 생각해볼 일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흑장미 기사단에 녀석의 연인이 있었다고 했던가?
내가 용사로서 활동할 적에는 이미 혼인을 치르고서 검을 놓고 후작 부인의 삶을 살고 있긴 했지만, 한때는 같은 기사단에서 서로 등을 맡기던 전우였다지.
“…저기 있군.”
백 명이나 되는 기사들 사이에서 녀석의 연인을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투구 안쪽으로 채 집어넣지 못한 연보라색 머리칼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모습이, 눈에 확 띄었으니 말이다.
그래.
제 사람이라면 영지민 하나조차 잃는 걸 극히 싫어하는 녀석에게 있어선, 어쩌면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이 제 죽음보다 고통스러울지도 모를 노릇이지.
혹시나 이번 기회에 저 빌어먹을 놈을 죽이진 못하더라도, 녀석의 연인만큼은 기필코 차가운 시체로 바닥을 구르게 해주리라.
“…에릭, 왔어?”
“음. 방금 막 도시에서 제국군이 출발했다. 수인 쪽은?”
“우리가 떠날 땐 아직. 하지만 지금쯤이면 국경에 다다랐을지도.”
그런가.
역시 수인 쪽이 한발 먼저 움직인 모양이군.
짐승 놈들, 언제나 싸움에 있어선 다른 그 어떤 종족보다도 빠르게 치고 나갔었지.
“혹시라도 들키지 않도록 천천히 거리를 두고 따라간다. 아무리 국지전이라고 해도 하루 이틀 만에 일이 끝나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놈들이 치고 박고 싸우고 있을 때, 그 사이에 숨어들어서 안쪽을 야금야금 파먹는 거다.
난 저 멀리 보이는 제국의 군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빌어먹을 짐승 놈들! 약탈로도 모자라서 무고한 마을사람들을, 그것도 어린 피붙이까지 그리 끔찍하게 죽여 놓고. 기어코 이리 군을 이끌고 또 다시 국경을 넘다니!”
“참으로 뻔뻔하기 그지없군. 너희 인간들이 먼저 국경을 넘고 우리의 도시와 마을을 헤집지 않았더냐!”
인류제국의 북쪽 국경 근처.
일전에 아이시스와 악마족들이 습격한 마을 주변에서 맞부딪힌 두 종족은, 서로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며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생각보다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네.
나는 포물선을 그리며 수인들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마법들과 음산한 기운과 함께 인간들의 발밑에서 피어오르는 주술들을 보며, 잠시 주변에 숨어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카렌. 내가 신호하면 저 시커먼 갑옷을 입은 인간들 머리 위에 크게 한 방 날리도록 해.”
“…알았다. 그런데 괜찮겠나? 그랬다간 전황이 단숨에 수인들 쪽으로 기울어질지도 모르는데.”
“괜찮아. 그쪽은 아이시스랑 악마족들이 맡아주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혹시 모르니 마법을 쓰고 나면 바로 도망치도록. 발라크, 너는 옆에서 카렌을 지켜라.”
“그러면 형님은….”
“내 걱정은 하지 마라. 금방 일을 마치고 합류할 테니까.”
치열했던 싸움은 어느덧 절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처음엔 양쪽 모두 막강한 화력을 내뿜으며 격렬히 부딪히고 있었지만, 이젠 슬슬 다들 힘이 빠져 물러날 조짐이 보였다.
서로 전력이 비등비등한 터라,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었다.
마법사들도 주술사들도 모두 제자리에 주저앉아, 그나마 체력을 어느 정도 안배해놓은 몇몇만이 남아서 전열이 후퇴할 수 있도록 지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
“음! 파이어 스트라이크!”
쿠구구구-
“뭐, 뭐야! 갑자기 왜 땅이… 서, 설마. 빌어먹을 짐승 놈들, 아직도 이만한 여력을 남겨두고 있었나!”
쭉 뻗은 카렌의 손앞에 펼쳐진 마법진이 빛을 내뿜자, 기사들끼리 맞붙은 전장에서 흔들림이 시작했다.
화르륵-
“이, 이건… 마법? 어, 어째서!”
“크윽, 왜 아군이… 다, 다들 피해! 도망쳐라!”
콰아아아앙-!
곧 대지가 쩌억 갈라지며, 벌어진 제 주둥이에서 시뻘건 불길을 뱉어냈다.
“흐아아아악! 아아악!”
“부, 불이… 크, 그르륵….”
미처 피하지 못한 기사들이 화염에 휩싸여 타들어갔다.
중간 중간 마력을 펼쳐 불길로부터 몸을 보호한 녀석들도 있었지만, 그들 또한 금속으로 제련한 갑옷이 열기에 달궈지는 것만큼은 막아내지 못했다.
적어도 지금 전장 한가운데 높이 솟은 저 불기둥 아래 있던 이들은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봐도 무방하리라.
“이런 빌어먹을! 마법사들 중에 첩자가 있다! 빨리 찾아서 잡아내!”
첩자?
나는 이미 카렌이 발라크와 함께 모습을 감춘 숲속을 바라보며, 마법사들 사이에서 있지도 않은 첩자를 찾는 지휘관들을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자, 그럼 녀석들이 다시 정신을 차리기 전에 일을 마무리지어 볼까?
스릉-
나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든 채, 도망치고 있는 기사들 사이에서 연보라색 머리를 찾았다.
어디냐, 설마 그 불기둥에 휩쓸린 건…
“허억, 헉…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왜 아군의 마법이 우리 쪽에….”
“…찾았다.”
나는 입가를 씰룩이며, 다른 두 명과 함께 퇴각하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전쟁통에 뒤에서 공격이라도 당했는지 뒤통수 부분이 우그러진 투구를 벗고 옆구리에 낀 그녀는,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땀에 젖은 머리칼을 휘날리고 있었다.
“설마 파르메르의 마도병단에 배신자가….”
“조심하십시오, 메르시안… 컥!”
푸욱-
검 끝이 갑옷의 이음매 사이를 파고들며, 살갗을 찢고 쑥 들어갔다.
“칫….”
깔끔하게 한 번에 끝내고 싶었는데, 설마 이걸 눈치 채고 대신 맞을 줄이야.
역시 전력으로 후퇴하고 있는 이들을 따라잡으면서 기척을 완전히 숨기는 건 무리였나.
“오, 오르만! 네 녀석… 뭐하는 놈이냐! 설마, 정말로 아군에 배신자가….”
카앙-!
“메르시안 님! 이놈은 저에게 맡기시고, 어서 도망치십시오!”
“아, 알겠다!”
“으음….”
나는 낙마하며 고꾸라진 녀석을 대신해 곧장 앞으로 나서 내 검을 막아내는 기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메르시안! 괜찮소? 네놈…!”
젠장, 시간이 없군.
나는 이 난리통에도 제 연인을 찾고선 이쪽을 향해 검 끝을 세우며 달려오는 칼리스를 보고선, 몸 안에 흐르는 마력을 일깨웠다.
카가가각-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라!”
“크윽… 무, 무슨 힘이… 아아악!”
서걱-
“타, 탈로스! 제길… 배신자 주제에 검기도 사용할 줄 안단 말인가!”
히히힝-!
나는 마력을 통해 검에서 시퍼런 기운을 뿜어내며, 단번에 앞을 가로막던 기사를 두 동강내고 말을 뺏어 달렸다.
“젠장! 몸뚱이가 정말 빌어먹게도 안 따라주는군!”
이 적은 마력으로 검기까지 뽑아든 이상, 조금이라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도 몸 안의 마력이 구멍 난 바가지처럼 새어 나가는 게 느껴졌다.
기회는 딱 한 번.
나는 어느덧 코앞까지 따라붙은 여인의 등을 향해, 시퍼런 검기를 내질렀다.
푸욱-
“커윽….”
“메, 메르시안!”
[레벨이 증가합니다.]
나는 여자가 울컥 피를 토해내며 실 끊긴 인형처럼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보고선, 재빨리 전장을 빠져나갔다.
“아, 아아… 어째서… 이, 이 빌어먹을 배신자 놈이!”
“칼리스 님, 진정하십시오! 우선 도망치셔야합니다! 뒤쪽에 수인들이….”
“큭… 흐윽… 으아아아아아!”
뒤에서 흐느끼며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가 승전보처럼 울려 퍼졌다.
썩 괜찮은 기분이군.
“하하하하!”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카렌과 발라크를 따라 숲속으로 몸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