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댕- 댕-
여덟 시.
나는 도시 종탑의 시계가 울리는 것을 확인하고선,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북문 앞에 난잡하게 늘어선 용병들이 아흔두 명.
예상보다 조금 적은 수였지만, 이 정도만 하더라도 수인족의 작은 마을 하나를 덮치는 것 정도는 문제없으리라.
“그럼 올 사람은 다 온 거 같으니, 출발하도록 하겠소.”
“다들 빨리빨리 끝내고 오자고!”
“그래. 흐흐, 벌써부터 이 반짝이는 금화로 뭘 할지 고민이 되는구먼.”
저마다 금화를 한 개씩 나눠받은 용병들이 열정을 마구 내비쳤다.
보통 이렇게 보수가 커다란 일은 선불로 지불하는 법이 드물기에, 모두들 선뜻 먼저 값을 지불한 나를 좋게 바라봤다.
슬금슬금 도망치려는 놈은 없는 건가.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근처에 카렌을 대기시켜 놓았건만, 아쉽게도 우리 용족 아가씨께서 움직일 일은 일어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그쪽 형씨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서 온 거요?”
“아, 이쪽은 동쪽에서부터 개인적으로 고용한 호위요. 아무리 요즘 제국 치안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상인 혼자 대륙을 돌아다니기엔 영 꺼림칙하지 않겠소?”
나는 로브를 뒤집어쓴 채로 내 옆을 지키고 있는 발라크를 보며 물어오는 남자를 향해, 아주 믿음직스럽다는 표정으로 녀석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흐음, 호위라. 확실히 덩치부터 힘 좀 깨나 쓰게 생겼구먼. 하긴, 생판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선뜻 금화를 뭉텅이로 내놓는 사람이 혼자 돌아다닐 리가 없지.”
“거 호위는 하루에 얼마씩 받고 일하는 거요? 괜찮으면 나도 좀 끼어볼까 하는데. 이래 뵈도 거력의 울칸 하면 북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오.”
“하하하!”
나는 꽤 대범한 한 용병의 말에,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덩치로만 보면 키가 2m에 닿을 법한 발라크와 비슷한가.
주변에서도 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아하니, 확실히 한가락 하는 놈인 모양이었다.
그래, 혹시 모르니까 여기서 먼저 기를 눌러놓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를 이기면 생각해보겠소. 참고로 하루에 은화를 열 개씩 주고 있다오. 발라크, 괜찮겠소?”
나는 묵묵히 고개를 주억이는 녀석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한 번 실력을 보여주고 간다면, 그의 존재가 좋은 억제력이 되어줄 테지.
지금이야 다들 금화도 받았으니 무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하고 있긴 하지만, 마을에 도착해서 아이시스와 그 일행들이 만들어놓은 참사를 눈에 들인다면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하, 하루에 은화를 열 개나… 크흠. 그런 좋은 일자리가 있다는 걸 알았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거 형씨한테 따로 악감정은 없수다. 원래 이런 건 실력으로 쟁취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 그쪽도 허락했으니, 나중에 다른 말하기 없기요.”
괴력인지 거력인지, 울칸이라는 자는 등에서 커다란 대검을 뽑으며 발라크에게 달려들었다.
심판의 호령도 뭣도 없는 대련의 틀조차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어찌 보면 기습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일격이었다.
“하압!”
텁-
“아, 아니?”
하지만 그의 공격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발라크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 무, 무슨 힘이… 흐으으읍!”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제 대검을 붙잡은 손을 바라본 녀석이 안간힘을 쓰며 팔뚝을 크게 부풀려보았지만, 본래 잡혔던 자리에서 아주 조금 밀어내는 게 고작이었다.
“…더 할 텐가?”
“크윽….”
텅그렁-
“…내가 졌소. 역시, 괜히 그만큼 돈을 받고 있는 게 아니구려.”
결국 대검을 놓으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떨어트린 무기를 다시 집고 자리로 돌아갔다.
“세상에, 그 울칸의 대검을 맨손으로….”
“믿을 수 없군. 혹시 기사 출신인가?”
“어쩌면 저 상인이라는 자도 실은 귀족나리인 걸지도 모르겠군. 암, 그러니까 금화를 그렇게 들고 다닐 수 있었겠지.”
발라크의 실력을 본 이후로, 용병들의 발걸음은 한결 더 가벼워졌다.
여태까지는 아무리 마을에서 밭일하는 수인들을 상대하는 일이라고는 해도 죽을 위험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기에 다들 얼굴에 조금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제는 같은 편에 그 같은 강자가 있으니 걱정을 덜은 모양이었다.
“저기 보이는군.”
“저게 그 수인 놈들한테 공격당했다던 마을이란 말이지?”
“젠장… 별 것도 아닌데 벌써 몸이 다 떨리는군. 아직도 그 반쯤 미쳐버린 여편네한테 들었던 얘기가 생생하구먼.”
용병들을 데리고 국경을 향해 걸은 지도 벌써 며칠이나 지났다.
도중에 있는 두 마을에 들려 쉬면서 몇몇 생존자나 마을에 갔다와본 이들에게 종종 얘기를 전해들은 그들은, 저 멀리 있는 마을 입구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게 무슨… 우욱!”
“웨에엑!”
금세 마을 입구에 도착한 이들은 벌써부터 코를 찌르는 악취에 인상을 찌푸리며, 몇몇 비위가 약한 자들은 그대로 근처에 오늘 아침이었던 것을 토해냈다.
떠나기 전보다 훨씬 심해졌군.
그때도 마냥 좋은 냄새는 아니었지만, 이제는 절로 코를 막으러 손이 올라갈 정도였다.
“…들어가지.”
몇몇 용병들이 굳이 안쪽을 둘러볼 필요가 있겠냐고 눈빛으로 항의해오긴 했지만, 나와 발라크를 필두로 모두들 하나씩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따라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아쉽지만 모두들 이 끔찍한 광경을 눈에 담아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마음이 약해질지도 모를 노릇이었으니까.
수인족에게 전쟁의 불씨를 확실하게 피우기 위해선, 그들 스스로가 나서서 복수하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백 명에 달하는 인간들이 마을을 덮쳐서 죄 없는 이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그런 광경을 자연스레 연출시키려면, 용병들에게 수인에 대한 분노를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철퍽-
“…이게 뭐야. 진흙 같은… 히, 히익!”
“서, 설마 이거 사람 시체인가? 이런 빌어먹을 짐승 새끼들! 도대체 마을에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런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마을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반응이 확실하게 터져 나왔다.
입구 앞에 질퍽하게 깔려 있던 냄새나는 오물을 밟은 남자는, 자기가 밟은 게 썩어문드러진 사람의 내장이라는 것을 깨닫고선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시커먼 내장이 삐져나와있던 곳 위에는 앵앵대는 파리와 구더기들로 가득 찬 시체가, 두 팔로 자신의 창자를 쥐어 담으려는 모습으로 벽에 기대어 있었다.
“…제국은? 군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이건… 이런 건 그냥 학살이잖아!”
“가끔 수인 놈들이 국경을 넘어서 마을을 약탈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이런데도 여태까지 아무 일 없이 넘겼단 말이야?”
“이런 썩을! 어이, 상인 양반! 분명 이 마을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게 의뢰 내용이라고 했었지?”
“쓰레기 같은 짐승 놈들. 이건 전쟁이야! 지금은 이 마을 하나였지만, 언젠가는 제국 전체를 노리고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나는 속으로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잔뜩 분노에 찬 용병들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았다.
하지만 이런 경우엔 조금 과해서 나쁠 건 없겠지.
아직 하이라이트도 보이지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나 격한 반응이라니, 마을 중앙에 전시되어 있을 아이시스의 작품을 본다면 과연 그들이 어떻게 나올까 미치도록 궁금했다.
“…신이시여.”
“욱… 우웨에엑!”
마을을 가로지르며 국경을 향해 나아간 이들은, 기어코 꼬챙이처럼 꿰어져선 바닥에 꽂혀 장식된 시체들을 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도시에 들려 이들을 데려오는 사이에 썩어버린 몸뚱이는 시꺼먼 진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세로로 길게 갈라진 배에서 구더기가 돌아다니는 내장을 아래로 흘리고 있었다.
“…젠장.”
원통함에 눈꺼풀조차 닫지 못한 채, 이젠 흐물흐물해져선 시신경과 이어진 채로 밖에 튀어나온 눈알과 시선을 마주친 한 용병이 기어코 검을 뽑아들었다.
꼬챙이에 꿰인 시체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손수 눈을 감겨준 그는, 내가 일전에 조각상을 빼내었던 어미와 그 피붙이의 앞에 서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크흑… 기필코 복수해주겠소. 그대들을 이렇게 만든 빌어먹을 짐승 녀석들에게….”
나는 저마다 이를 갈며 무기를 빼어든 용병들을 보고선,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방아쇠는 당겨졌다.
인간과 수인은 절대 쉬이 연합을 이루지 못하리라.
나는 어서 마을사람들의 복수를 하러 떠나자는 그들의 요구에 걸음을 재촉하며, 있으나마나한 검문소를 피해 산길에 들어섰다.
* * *
“아아아악!”
“어, 어째서 인간들이….”
“도, 도망쳐! 어서 옆 마을에 가서 이 사실을 알려야해. 무기를 든 인간들이 쳐들어왔다고!”
날붙이에 베인 수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비명과, 건물이 불타오르며 무너지는 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히이익… 대, 대체 왜….”
“도망치지 말고 싸워! 적어도 여자들과 애들이 도망칠 때까진… 크아아악!”
자경단만으로는 역부족이라 마을의 남자들이 낫과 괭이 같은 걸 손에 쥐고서라도 같이 맞서봤지만, 당연하게도 평소에 칼밥으로 먹고사는 용병들의 상대가 되진 못했다.
눈앞에서 자신의 남편과 아들 그리고 아버지를 잃은 여인과 아이들에게서 피눈물과 통곡이 흘러나왔지만, 시퍼렇게 날이 선 날붙이는 피를 묻히기를 멈추지 않았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적어도 이 아이만은….”
“…너희도 그랬겠지. 난… 난 아직도 제 어미의 품에서 시커멓게 타 죽어간 그 아이의 시체가 눈앞에서 떠나지 않아….”
기어코 미처 도망치지 못한 여자들과 아이들에게까지 향한 검 끝은, 마을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서야 더 이상 벨 것이 없어 멈출 수 있었다.
“후욱, 후우… 이 쓰레기들… 빌어먹을 짐승 놈들!”
“어이, 그만! 그만해! 이미 죽었어, 죽었다고!”
“크흑… 으흐흐흑….”
전에 마을에서 본 끔찍한 광경이 잊히지 않는 건지, 이미 죽인 시체를 마구 헤집는 이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아이시스가 그래놓은 것처럼, 보란 듯이 수인들의 시체를 꼬챙이에 꿰어 걸어놓고 나서야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크흡….”
“왜 그러십니까, 형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복수.
나는 도시로 돌아오는 동안, 용병들이 마을을 나서면서 입구 바닥에 새겨놓은 글자를 떠올리며 자꾸만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고역을 치러야만 했다.
그들은 알고 있을까?
인간도 수인도, 모두 내 손안에서 놀아났을 뿐이라는 걸 말이다.
이제 남은 건 곧 멋들어지게 완성될 작품을 보며 감상하는 것뿐.
어느덧 저 멀리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