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발라크. 아무래도 네가 미끼가 좀 되어줘야겠다.”
“미끼… 말씀이십니까?”
“그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도시 앞을 지키고 있는 수인 경비들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시간을 좀 들인다면 셋이서도 아주 상대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조금 전에 그 자경단장이라는 놈이 카렌의 무영창을 보고서 깜짝 놀랐던 걸 생각해보면, 적어도 이 근처에 그 정도 수준의 마법사는 몇 없다는 얘기니까.
다수를 상대로 어마어마한 화력을 보일 수 있는 마법을 막아낼 수 있는 건, 기본적으로 같은 마법사뿐이다.
물론 상대의 수준이 높아지면 얘기가 달라지긴 하겠지만,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이런 외지에 그런 녀석이 있을 리가 없지.
만일 카렌이 게릴라식으로 마법을 쏘고 도망치기를 계속 반복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래, 그럴 여유만 있었다면 말이지.
“카렌, 뭔가 스태프나 완드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나?”
“흥. 이 몸이 그런 하찮은 도구에 의지하고 다닐 것 같나?”
없다는 얘기군.
나는 그래도 명색이 마법사인 주제에 제 무기도 따로 가지고 다니지 않는 그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윽… 왜,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냐! 이 몸은 위대한 지배자, 마룡왕 카르카쉬의 핏줄이다! 그런 나약한 자들이나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쓰는 무기 따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당연한 거다!”
“…그래. 너한테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
“이익….”
나는 제 주먹을 꾹 쥐며 무어라 따지려다 마는 꽉 막힌 용족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는 수 없군. 일단 이거라도 받아라, 발라크.”
“이건… 뭡니까, 형님?”
“나뭇가지다. 두께가 좀 있으니, 멀리서 보면 스태프는 아니더라도 얼추 완드 정도로는 보이겠지.”
아니, 그렇게 보여야만 했다.
나는 근처 바닥에 떨어져 있던 굵은 나뭇가지를 그의 손에 쥐어주며, 도시 성벽을 가리켰다.
“좀 있으면 저쪽에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올 거다. 그러면 적당히 잡힐 듯 안 잡힐 듯 거리를 재면서 도망치도록 해라. 놈들이 너를 마법사라 착각할 수 있게, 그 나뭇가지를 잘 보이게 두는 것도 잊지 말고.”
“제가 병사들을 잡아두는 동안 도시를 털 생각이신 거군요, 형님.”
“그래. 네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잘할 수 있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완벽하게 해내보이겠습니다!”
음, 아주 좋아.
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발록을 만족스러운 미소로 지켜보다, 곧 카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카렌. 도시 중앙에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겠나? 안에 있던 놈들이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올 정도만 되도 좋을 거 같은데 말이야.”
“이 몸을 뭐로 보는 거냐. 도시를 아주 통째로 구워주지.”
그녀는 내 도발에 코웃음을 치며, 허공에 마법진을 띄워 올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이리저리 선을 그을 때마다, 새하얀 빛으로 반짝이는 동그라미 안에 복잡하게 생긴 도형과 수식들이 자리를 잡았다.
“발라크, 슬슬 준비하도록.”
“예, 형님!”
나는 금세 안쪽이 가득 들어찬 마법진을 보고선, 미리 발라크를 아래로 내려 보냈다.
되도록 많이 나와 줬으면 좋겠는데.
“파이어 볼.”
화륵-
곧 카렌이 완성된 마법진을 앞에 두고서 나지막이 입을 떼자, 그 앞에 시뻘건 불길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전에 마주친 수인 놈들에게 썼던 것과 같은 마법이었지만, 이번엔 단순히 무영창으로 시전했던 것과는 크기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음.”
과연 용족은 용족, 그중에서도 마왕의 핏줄이라는 걸까.
제 붉은 머리칼만큼이나, 눈앞의 불덩이는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훌륭한 수준이었다.
이런 걸 맞는다면 뼈는커녕 한줌 재조차 남지 않으리라.
확실히 그렇게 자존심을 세우고 으스댈 만큼, 적어도 마법에 있어선 독보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직 훗날 전장을 누비며 미치광이 붉은 용이라 불릴 만큼 완숙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녀는 충분히 쓸 만한 전력이었다.
“타올라라. 미개한 종족들이여, 한줌 재가 되어 사라져라.”
어느덧 시뻘겋다 못해 주홍빛으로까지 물든 집채만 한 불덩이를 쏘아낸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곧 자기가 만들어낼 작품을 지켜봤다.
단순히 팔짱을 끼고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임에도, 언뜻 기품과 우아함이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저 입만 다물었더라면 더 그럴싸한 모습이었을 텐데.
콰아아앙-!
곧 길게 포물선을 그리며 성벽을 넘어간 불덩어리가, 굉음을 내며 허공에 연기를 뱉어냈다.
도시에서 꽤 멀리 떨어져있던 지라 안쪽 상황이 어떤지 자세히 살필 수는 없었지만, 희미하게 들려오는 비명과 절규소리가 퍽 마음에 들었다.
성문 앞에 나와 있다 허둥지둥 안쪽을 살피러 들어간 경비들이 주춤거리며 다시 바깥을 살피는 모습을 보아하니, 곧 일이 시작될 것 같았다.
“저기 저놈이다! 놓치지 말고 무조건 생포해!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잡아서 그 배후를 캐내야한다!”
열 명, 스무 명.
가장 앞에서 검을 뽑아들며 발라크를 향해 달려가는 놈의 뒤를 따라 나오는 병사들의 수가, 얼추 백은 되는 것 같았다.
많아야 만 명도 안 될 거 같은 도시에서 저 정도나 되는 병력이 빠져나갔다는 건, 이제 안쪽에는 기껏해야 반도 남아있지 않을 거란 얘기였다.
나는 녀석들이 발라크를 따라 어느 정도 성벽에서 멀어졌다 싶을 때쯤, 천천히 발을 떼어 언덕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가자.”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건가? 아무리 병력이 좀 빠졌더라도 둘이서 성 안으로 들어가는 건 조금 걱정되는군.”
“왜, 막상 들어가려니까 마왕의 핏줄도 겁이 나나?”
“읏… 그, 그런 게 아니라 무모하다는 얘기다! 아직 안에 몇이나 남았는지 모르는데, 무작정 둘이서 도시를 공격한다는 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 카렌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이게 별로 똑똑한 방법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강해도 쪽수에는 장사 없는 법.
조금 더 능력치를 키운 뒤였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이렇게 당당하게 고작 둘이서 성문을 두드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 국경에 붙은 도시인데, 안에 있는 병사들이 마냥 약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거기에 어쩌면 기사들도 있을지 모를 노릇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과 수인의 전쟁을 부추기기 위한 밑 작업일 뿐.
도시를 점령하러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여차하면 그냥 도망치면 된다는 얘기였다.
적어도 발라크를 잡기 위해 나선 놈들이 돌아오기 전이라면, 지금의 실력으로도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제길… 도대체 어떤 놈이! 설마 인간인가? 그 쓰레기 같은 놈들이 기어코… 누, 누구냐!”
“그건 곧 죽을 놈이 알 필요 없다.”
서걱-
나는 아까 도시를 나온 부대들과 같이 떠난 경비들을 대신해 자리를 채운 녀석의 목을 베어내며, 유유히 성문을 지나쳤다.
“빨리 불을 꺼! 부상자들을 어서 치료소나 신전으로 옮겨라! 어이, 거기! 그쪽에 불이 번지지 못하도록 막아!”
안쪽은 예상했던 것과 달리, 생각보다 질서정연하게 피해를 최소화시키고 있었다.
불덩이가 떨어졌던 곳으로 보이는 커다란 화재현장 앞에서 수인들을 지휘하며 일사분란하게 조치를 취하는 모습은, 적이면서도 속으로 감탄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훌륭하군.
하지만 그렇기에 방해돼.
“꼭 물이 아니더라도 좋다! 뭐든 불을 끌 수 있는 거라면 다 가져오도록 해! 불이 더 번지기 전에 빨리 잡아야… 읏!”
촤악-!
“크윽… 뭐냐, 네놈은. 칩입자인가?”
소리 없이 녀석의 뒤를 잡고선 재빠르게 검을 휘두른 나는, 그대로 목이 잘리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치명상을 피해간 놈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거기서 그걸 피했다고?
…생각보다 거물이 걸린 모양인데.
“부, 부족장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조금 다치긴 했지만, 큰 상처는 아니야. 그보다 어서 놈을 붙잡아라! 왜 도시를 습격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야만 한다!”
빌어먹을… 부족장이라고?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순식간에 나를 둘러싼 수인들을 훑었다.
대족장이나 다른 족장들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지금 내 능력치로는 쉽사리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일대일로 기습을 노려도 승패를 확신할 수 없는 실력자.
연합시절의 군대로 따지자면, 급 낮은 장군이나 천인장 정도에 달하는 놈이었다.
마왕군에서도 나름 정예부대의 일원으로 뽑힐 수 있는 강인한 전사.
그런 놈이 왜 이런 변방의 작은 도시에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계획을 좀 바꿀 필요가 있어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분명 괜찮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괜찮을 거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보다 빨리 도망칠 준비나 해라.”
“뭐? 이, 이런 무책임한….”
생각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아서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어떻게 보면 더 잘된 일일수도 있었다.
부족장이나 되는 놈이 있는 곳을 건드렸으니, 이쪽은 확실하게 전쟁의 불씨를 지폈다고 봐도 되겠지.
남은 건 무사히 살아서 나가는 것뿐.
그리고 이쪽도 아주 못해먹을 건 아니었다.
“꽉 잡아라.”
“뭐, 뭐하려고… 꺄악!”
“놈들이 도망칩니다!”
“무엇하느냐! 어서 잡아라!”
나는 발이 느린 마법사인 카렌을 안아들고서, 곧장 성문 쪽을 막고 있는 놈을 향해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카앙-!
“빌어먹을 침입자 녀석! 그냥 가게 내버려둘….”
쩌억-!
“컥….”
한 번 검을 막아낸 녀석의 머리를 투구 째로 찍어버린 나는, 그대로 놈의 시체를 밟고서 포위망을 빠져나왔다.
“이, 이런… 놓치지 마라!”
발라크가 병력들을 많이 유인해간 것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포위망이 두 겹, 세 겹으로 되어있어 도망치는데 훨씬 애를 먹었을 테지.
“카렌! 멍하니 안겨 있지만 말고 마법이라도 쏴라!”
“읏, 그… 아, 알겠다!”
화륵-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내 품에 딱딱하게 안겨 있던 그녀의 손에서 시뻘건 불길이 타올랐다.
“마, 마법사… 한 명이 아니었던 건가!”
“병사들 말고 민가나 다른 녀석들한테 날려라!”
콰아앙-!
“흐아아악! 부, 불이… 허으으윽….”
“아아악! 사, 살려… 누가 좀….”
그녀의 손짓을 따라 날아간 불덩이가, 이전의 화재에서 대피한 사람들이 모여 있던 곳 위에 떨어졌다.
“이… 천인공노할 놈들이! 잡아! 어떻게든 잡아라!”
아니, 그럴 수는 없을 걸.
나는 씨익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카렌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주 잘했어. 이번엔 저 허름한 판자촌을 향해 쏴라.”
“읏… 아, 알았다.”
화르륵-
“이, 이런 빌어먹을!”
아직 기존에 있던 화재도 잡지 못했는데, 옹기종기 붙어있는 낡은 판자촌에 불덩어리가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도시를 전부 태우고 싶지 않다면, 당연히 발을 돌릴 수밖에 없으리라.
그럼 이쯤에 한 번 기름을 부어줘야겠지.
나는 슬그머니 아주 자연스럽게 로브의 머리 부분을 펄럭이며, 녀석을 향해 맨얼굴을 드러내었다.
“이, 인간… 이 쓰레기 같은 놈들이 기어코 전쟁을 바라는가!”
콰아앙-!
“크윽… 젠장! 일부만 쫓고, 나머지는 지금 당장 화재를 잡으러간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도시가 다 타버리고 말 거다!”
결국 판자촌에 불길이 치솟는 걸 본 녀석은 이를 갈며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일이 조금 꼬이긴 했지만, 결국 내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아주 훌륭한 작전이었어.